<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고국천왕 관련 내용 정리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속 고국천왕 관련 내용 정리

728x90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삼국시대 파트에서 고국천왕은 꽤 중요한 왕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삼국사기>엔 고국천왕에 대해 어떻게 기술했는지 정리해봤습니다.

1. <삼국사기><고구려본기><신대왕> 내용 중 고국천왕 관련 기사

1-1. 신대왕 12년(176)

12년(서기 176년) 봄 정월(正月), 군신(群臣)이 태자(太子)를 세울 것을 청했다.


3월, 왕자(王子) 남무(男武)를 왕태자(王太子)로 세웠다.

176년 3월, 고구려 제8대왕 신대왕은 아들인 왕자(王子) 고남무(高男武)를 왕태자(王太子)로 세웁니다.

고남무(男武)라는 이름이 바로 후에 고국천왕이라고 불리는 왕의 이름입니다.

 

1-2. 신대왕 15년(179)

15년(서기 179년) 가을 9월, 국상(國相) 답부(答夫, 명림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03세였다. 임금은 왕이 몸소 찾아와 슬퍼하며 7일간 조회(朝會)를 파하고, 이에 예로써 질산(質山)에 장사를 지내, 수묘(守墓) 20가(家)를 두었다.


겨울 12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고국곡(故國谷)에 장사 지내고, 호(號)를 신대왕(新大王)이라 했다.

그가 왕태자로 책봉된 지 약 3년만인 179년 12월, 신대왕은 사망합니다.

 

2. <삼국사기><고구려본기><고국천왕> 내용

2-1. 고국천왕 즉위까지

고국천왕(故國川王)[혹은 국양(國襄)]의 이름은 남무(男武)[혹은 이이모(伊夷模)]이며, 신대왕(新大王) 백고(伯固)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돌아가셨을 때(서기 179년) 나라 사람들[國人]이 맏아들 발기(拔奇)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伊夷謨)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았다.

한(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196~222) 초기에 발기(拔奇)가 형인데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가(涓奴加)와 함께 각각 하호(下戶)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公孫康)에게 가서 항복했다가, 돌아와 비류수(沸流水) 위에서 살았다.

임금은 키가 9척(九尺)이고 모습과 자태가 씩씩하고 뛰어나며(雄偉), 힘은 솥(鼎)을 들어 올릴 만큼 세었다. 일에 임해서는 경청하여 결단하고 관대함과 엄함[寬猛]을 적당히 지켰다.

<삼국사기><고국천왕>에 따른 가족관계도

이 부분은 꽤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삼국지><위지>에 따르면, 204년(건안 9년), 아버지가 죽고 공손강(公孫康)이 요동태수(遼東太守)가 되었으며, 이후 낙랑군을 나눠 대방군을 신설하는 등 요동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그런데 204년이면 이미 고국천왕(?~197)이 사망한 이후기에, 건안(196~222) 시대에 들어서야 고국천왕 즉위 초기의 왕위분쟁이 일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현대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이이모(伊夷模)를 고구려 10대 왕, 산상왕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실제로 산상왕 초기 기사를 보면 그의 형 발기(發岐)가 산상왕의 연우(延優)의 왕위 등극을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공손씨에게 요청해 군사를 빌려 본국 고구려를 치기도 했죠. 그래서 산상왕의 이름은 고연우(延優)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고이이모(伊夷模)가 아닐까하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2-2. 고국천왕 2년(180)

2년(서기 180년) 봄 2월, 왕비 우씨(于氏)를 세워 왕후(王后)로 삼았다. 왕후는 연나부(掾那部) 우소(于素)의 딸이다.


가을 9월, 임금이 졸본(卒本)에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냈다.

고국천왕은 이전에 연나부(掾那部) 우소(于素)의 딸 우씨(于氏)를 비로 삼았는데요. 즉위 이듬해인 180년 봄에 그녀를 왕후로 삼습니다. 왕후 우씨가 왕후가 됨으로써 외척의 힘이 강해졌고, 결국 왕후 자체로 이후에 있을 반란과 을파소의 등장과 같은 큼직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3. 고국천왕 4년(182)

4년(서기 182) 봄 3월, 갑인(甲寅) 밤, 붉은 기운[赤氣]이 태미(太微)를 관통했는데, 마치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星]이 태미(太微)에 나타났다.

 

2-4. 고국천왕 6년(184) : 좌원 전투(184)

6년(서기 184년), 한() 요동태수(遼東太守)가 군사[師]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쳤다. 임금이 왕자 계수(罽須)를 보내어 (한을) 막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임금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精騎]을 거느리고 가서 한군(漢軍)과 좌원(坐原)에서 싸워 물리쳤다. 베어진 (적의)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184년, 고국천왕은 한 요동태수의 침입을 막는 업적을 세웠습니다. 이 전투를 좌원 전투라고 하는데요. 172년에 일어난 좌원 전투와는 또 다른 전투로 보여집니다.

 

2-5. 고국천왕 8년(186)

8년(서기 186년) 여름 4월, 을묘, 형혹(熒惑, 화성)이 심(心, 심성(心星))에 머물렀다.


5월, 임진, 그믐[晦], 일식이 있었다.

 

2-6. 고국천왕 12년(190) : 외척 세력의 대두

12년(서기 190) 가을 9월, 서울[京都]에 눈이 여섯 자[六尺]나 내렸다.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했으며[驕侈], 다른 사람의 자녀를 겁탈하고 토지와 주택[田宅]을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國人]이 원망하고 분개했다.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자, 좌가려(左可慮) 등이 4연나(四椽那)와 함께 반란을 도모했다.

190년엔 중외대부(中畏大夫) 패자(沛者) 어비류(於畀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 등 왕후 우씨의 친척이 나라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고국천왕이 어비류와 좌가려 등의 반란 진압을 꾀합니다.

 

2-7. 고국천왕 13년(191) : 어비류·좌가려의 난 진압과 을파소의 등용, 5부 개편

13년(서기 191) 여름 4월, 좌가려(左可慮) 등이 무리를 모아 왕도(王都)를 공격했다. 임금은 기내(畿內, 왕도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명령을 내려 말했다.
"근래에 총애 받는 바에 따라 관직이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으로 승진되지 않으니, 독(毒)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우리의 왕실을 흔들고 있다. 이것은 과인이 똑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희 4부(四部)에 명령하니, 각각 자신의 아래에 있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천거[擧]하라!"

이에 4부(四部)가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했다. 임금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庸愚] 본디 큰 정사[大政]에 참여하기 부족합니다.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 사는 을파소(乙巴素)라는 사람은 유리왕(琉璃王)의 대신(大臣)이었던 을소(乙素)의 후손으로, 성질(性質)이 강직하여 굴하지 않고[剛毅]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등용되지 않아 힘써 밭을 갈며 생계를 이끌어 갑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다스리려[理國]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卑辭]과 중후한 예[重禮]로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의 벼슬을 주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于台)로 삼고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 선왕의 위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있으나 덕이 엷고 재주가 짧아 다스림에 미숙하다. 선생은 재능을 감추고 총명을 숨기면서 궁색하게 풀밭과 늪[草澤]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태도를 바꿔[幡然] 왔으니, (이것은) 나만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社稷)과 백성[生民]의 복이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공(公)은 그 마음을 다해 주시오."

파소(巴素)는 비록 뜻은 나라에 허락했지만 받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대답하여 말했다.
"저의 느리고 굼뜸으로는 감히 임금의 엄명(嚴命)을 감당할 수 없으니, 대왕(大王)께서는 어질고 착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高官]을 주어 대업을 달성하게 하십시오."

임금이 그 뜻을 알고, 곧 (을파소를) 국상(國相)으로 삼아 정사(政事)를 맡게 했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朝臣]과 왕실의 친척들[國戚]은 소(素, 을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신하들을 차별한다 하여 미워했다.

임금이 교서[敎]를 내려 말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참으로 국상(國相)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리라!"
소(素,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떳떳한 도리이다. 이제 상(上,임금)께서 나를 후의(厚意)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옛날의 은거를 생각하겠느냐!"
그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교(政敎)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


겨울 10월, 임금이 안류(晏留)에게 말했다.
"만약 그대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나는 파소(巴素)을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공적이 한데 모인 것은 그대의 공이다."
이에 그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사관이) 논평한다.
옛날의 밝은 임금들[哲王]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정해진 방법을 따르지 않았고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은(殷)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에게, 촉(蜀) 선주(先主)는 공명(孔明)에게, 진(秦) 부견(苻堅)은 왕맹(王猛)에게 그러한 것이 이와 같다. 이러한 뒤에야 현명한 사람이 자리에 앉고 능력 있는 사람이 관직을 맡아 정치와 교화가 밝게 닦여서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임금이 결연히 혼자 결단하여 파소(巴素)를 바닷가[海濱]에서 발탁하여 여러 사람에 흔들리지 않고 그를 여러 관리[百官]의 위에 두었으며, 또한 천거한 자[擧者]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선왕의 법도를 얻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결국 191년, 연나부 세력을 평정하고, 올바른 등용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 4부에 어질고 좋은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4부는 함께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천거했습니다.

 

그런데 안류는 오히려 그 직을 사양하고, 유리왕(琉璃王) 시기의 대신(大臣) 을소(乙素)의 후예이면서 서압록곡(西鴨淥谷) 좌물촌(左勿村)에서 농사짓고 사는 을파소(乙巴素)를 추천합니다.

 

그러자 고국천왕은 을파소에게 중외대부(中畏大夫)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해 우태(于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을파소는 '더 높은 직을 맡아야 국정을 잘 운영할 수 있다'며 거절했고, 왕은 그의 숨겨진 의도를 알아차려, 국상(國相)으로 삼았습니다.

 

당연히 이런 파격적인 인재 등용 방식에 기존의 신하들은 불만이 많았는데, 이에 고국천왕은 '국상 을파소를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까지 멸할 것'이라 세게 말하며,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습니다. 또한, 그를 등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안류도 대사자(大使者)로 삼으면서 감사를 표했죠.

 

한편, 이 기사에서부터 4부(四部), 동부(東部)와 같이 방위명을 띤 부명(部名)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토대로 '고국천왕 초기까지는 부족적 성격을 띈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어 중앙 집권화에 한 발 더 나아갔다'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역사 교과서나 한능검에서도 간간히 보이니 참고바랍니다.

 

2-8. 고국천왕 16년(194) : 진대법의 실시

16년(서기 194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고 공급하여 구휼했다.


겨울 10월, 임금이 질양(質陽)으로 사냥을 갔다가 길에 앉아 우는 자를 보았다. (임금이)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했다.
"신(臣)은 가난하여 궁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니를 봉양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어, 한 되나 한 말의 곡식[升斗之食]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이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나의 죄로다."

(임금은)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했다. 그리고는 내외(內外, 서울과 지방)의 소사(所司, 해당 관청)에 명하여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과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老病貧]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물어[] 찾아 구휼하게 했다. 또 유사(有司, 관리)에게 명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官穀, 관청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의 식구 수에 따라 차등 있게 구휼해 빌려 주었다가[賑貸]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還納] 것을 항식(恒式, 법규)로 정했다. (나라) 안팎이 크게 기뻐했다.

194년, 고국천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흉년으로 품팔이를 할 수 없어 노모에게 밥을 지어드릴 수 없어 울고 있는 한 백성을 만난 뒤로, 진대법(賑貸法)이라는 법규를 만듭니다. 이 법규를 고국천왕이 만들었는지, 아님 그의 신하 을파소가 만들었는지는 명확하진 않습니다만, 이 진대법이 을파소와 고국천왕의 영향을 받긴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진대법은 매념 봄부터 가을까지(3~7월) 관청의 곡식을 식구 수에 따라 차등적으로 빌려주고, 겨울(10월)에 상환하게 하는 빈민구호제도였습니다. 이 내용도 역사 교과서나 한능검에서도 간간히 보이니 참고바랍니다.

 

2-9. 고국천왕 19년(197)

19년(서기 197년), 중국(中國)에 큰 난리가 일어나 한나라 사람들[漢人]이 난리를 피해 투항하여 오는 자가 심하게 많았다. 이때가 한(漢) 헌제(獻帝) 건안(建安) 2년(197)이었다.


여름 5월, 왕이 돌아가셨다.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 지내고, 호(號)를 고국천왕(故國川王)이라 했다.

고국천왕 즉위 당시 한(漢)에서는 나라의 망조가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황건적의 난(184)을 시작으로  십상시의 난(189), 동탁 토벌전(190~191) 등 동탁이 황제를 참칭하고, 또 여러 제후들과 지방 정권이 분열되어 군벌이 난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죠. 197년엔 한나라에서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며 원술 토벌전(197~199)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난을 피하기 위해 한나라 사람들이 많이들 투항했다고 하네요.

 

이후 그 해 5월 고국천왕은 사망하고, 그를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 지냅니다. 그래서 그의 왕호가 고국천왕(故國川王)이 되었던 것입니다.

 

고국천왕은 그의 치세 동안 좌원 전투(184), 어비류·좌가려의 난(190~191)에서 승리하며 대내외적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삼았으며, 어비류·좌가려의 난으로 인해 파격적인 인재 등용 방식을 채택해, 안류, 을파소와 같은 어질고 좋은 인재를 등용(191)합니다. 또한, 부족적 성격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변경했으며, 진대법을 발표(194)해 빈민구제에도 힘썼습니다. 그리고 이후 기록들을 보면 완벽한 부자 상속 확립은 아니였습니다만 왕위의 부자 상속 확립을 시도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