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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동래경찰서 남쪽 쌈지공원에 작은 표지석이 있습니다.
농주산터[弄珠山址] |
조선시대 남문 밖에 있던 야산(野山)터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가장 먼저 이 고장에서 순사(殉死)하신 분들을 모신 전망제단(戰亡祭壇)이 있었던 곳 |
바로 '농주산 전망제단터'라고도 알려진 '농주산터' 표지석입니다.
이 비석의 뒤쪽에 있는 부산동래경찰서 지역은 나즈막한 야산이 있었습니다. 그 산의 이름은 농주산(弄珠山)이었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이 때 동래부사 송상현을 포함한 많은 동래사람들이 순국했습니다.
1608년에 동래부사에 임명된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이후 송공사(현 송공단)에서 송상현과 여러 선열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서 송상현이 순절한 날에 휘진제를 올리도록하면서 동래성 남문 밖 야산인 농주산에 전망제단을 설치합니다.
이후 1741년에 동래부사에 취임한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 1694~1742)이 1742년, 송공단(宋公壇)을 세워 농주산 전망 제단에 있던 순절한 선열들의 위패를 이전하였습니다. 물론, 건물은 그대로 남겨뒀죠.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래경찰서가 세워지며 이 농주산 전망제단이 헐렸고, 그 야산도 평탄화 작업을 거쳐 이제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왜적(倭敵)에게 당한 고통을 달래기 위해 지은 제단은 그 전쟁을 일으킨 일본(日本)의 손에 허물리고 말았습니다...
슬프지만 그럼에도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 순절자들을 기린 흔적이 이곳에 오랜 시간 있었음과 그곳에 모신 분들을 안전히 송공단으로 옮겨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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