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진 관아터(金井鎭 官衙址)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6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280번지 일원 |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정산성은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1703년(숙종 29)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석축으로 개축한 산성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금정산성의 중성(中城)을 축성하면서 금정산성과 산성 일대를 관리하기 위해 좌기청 6간, 좌우행랑 각 5간, 군기고 4간, 화약고 1간, 내동헌 3간, 별전청 4간 규모의 금정진 관아를 만들었고, 1824년 (동래)부사 이규현(李奎鉉)이 금정산성 내에 건물을 짓고 진장(鎭將)을 배치하였다. 평상시에는 금정산성 내의 해월사(海月寺), 국청사(國淸寺)의 승려들이 성벽의 보수와 유지를 담당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금정산성 내에 있던 금정진 관아들이 파괴되고 여기에 있었던 무기 또한 몰수당하였다. 『동래부지(東萊府誌)』 「관해조(官廨條)」편과 1872년에 제작된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地圖)」 등에 금정산성 내 시설물의 위치 관계가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금정진 관아의 건물 규모와 함께 금정진 관아의 배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내용이 문헌상으로 남아있다. 또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20~50cm 규모의 크고 작은 할석(割石)을 이용한 금정진 관아터 석축(石築) 유구(遺構)가 확인되었다. 금정진 관아터는 조선 후기 왜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국내 최장의 산성인 금정산성을 관리하던 관방시설(關防施設)의 유지(遺址, 터)로서 관아 규모, 운영, 직제, 성격과 관군과 승군(僧軍)들이 머물며 생활했던 생활상 등을 조명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
1872년에 발간된 <금정산성진지도>에 따르면 금정진의 여러 건물들의 크기와 위치가 잘 묘사되어 있어, 향후 복원을 한다면, 꽤 좋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동래부지(東萊府誌)』 ‘관아조’에 “좌기청 6칸, 좌우 행랑 각 5칸, 군기고 4칸, 화약고 1칸, 내동헌 3칸, 좌기청 남쪽에 별전청 4칸이 있다.”라고 하였다. 1872년에 제작된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地圖)』에도 석축으로 정방형 부지에 건물이 표현되어 있다. 북쪽 건물은 좌기청[별장 집무처]으로 보이고, 팔작지붕이며, 정면을 기준으로 주 칸이 5칸으로 그려져 있다. 이 건물 전면 아래 좌우에는 행랑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좌측 건물은 팔작지붕이고 우측은 맞배지붕이다. 좌우 행랑[관리의 업무 및 숙식처] 모두 정면 주 칸이 3칸으로 그려져 있다. 좌기청의 남쪽 정면에는 별전청[군관들의 집무처]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팔작지붕이며, 정면을 기준으로 주 칸이 3칸으로 그려져 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왼쪽은 내동헌[근무자들의 숙식처]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별전청과 동일하게 팔작지붕에 정면 3칸으로 그려져 있으나, 규모는 작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건물도 왼쪽과 동일한 형식으로 팔작지붕에 정면 3칸으로 그려져 있다. - 부산역사문화대전 |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가 금정산성 중성을 지을 때 산성과 그 일대를 관리하기 위해 처음 금정진 관아(金井鎭 官衙)를 건설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때 이 건물은 철거되고, 그 안에 있던 여러 무기들도 압수당합니다.
그러다 1991년 8월 15일 발생하여 북진하다가 8월 23일에 부산에 상륙한 태풍 글래디스(Typhoon Gladys)가 부산을 휩쓸고 남해안으로 갔는데, 이 때 금정진 관아터 위에 자리잡았던 집도 무너져 버립니다...
1992년, 무너진 집에 대한 보수 공사를 하던 중, 주춧돌 6개가 나오면서 금정진 관아터의 실체가 알려지게 됩니다! 이 때, 지름이 1m 정도 되는 외삼문(外三門)의 원형 주춧돌 2개, 도자기편, 화살촉, 창, 칼, 숯 등이 발견되었죠.
이후 2004년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조사를 해서 유적을 확인했고, 2006년 문화재자료로 지정됩니다. 2007년엔 금정산성 종합 정비 계획을 논하던 자리에서 이 금정진 관아터 복원 이야기가 나왔지만, 토지 보상 문제와 발굴 조사에 대한 한계로 일단은 미뤄졌고, 지금까지도 그 터는 단순히 안내문으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약 200년 정도 이 자리에서 금정산성과 주변 마을 관리를 담당했던 이 금정진 관아터.
지금은 농지로 이용되고 있는 이곳은 세월의 풍파에 휩쓸려간 흔적을 잘 보여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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