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에게 개방된 도심 속 정사, 부산 연산동의 묘봉산 혜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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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에게 개방된 도심 속 정사, 부산 연산동의 묘봉산 혜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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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지만 '화주보살'에 대해 검색하면 이 글이 뜹니다.. 아마 시주 명단에 적힌 화주(化主) 때문에 유입되는 듯 한데, 그 정보를 찾으러 온 사람의 시간을 아껴드리기 위해서 여기 위에 정리해둡니다.

화주보살(貨主菩薩)은 절의 운용을 위한 재물을 관리하는 보살(菩薩)을 말합니다. 재정관리를 하는 보살을 말하죠. 그 외 불교 용어는 이 불교 관련 용어 정리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569)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연제문화체육공원 쪽에서 잘 정리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이렇게 길이 끝이 난다. 여기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맑고 향기로운 도심 속 행복도장'이란 표어를 사용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혜원정사'의 입구가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면 절의 입구가 나온다. 5월 중순엔 석가탄신일 연등 행사 준비를 한다고 이렇게 절 안팎에 임시로 지은 통로가 지어져 있다. 저 멀리 돌에 '묘봉산(妙峰山) 혜원정사(慧苑精舍)'라는 이름도 새겨져 있다.

여기는 차량 입구다. 문 너머로 절 건물뿐 아니라, 혜원정사가 운영하는 선재어린이집도 보인다. 어린이집은 만불전(萬佛殿)이란 건물에 들어서 있다. 옆에 살짝 보이는 이 만불전은 만 분의 부처를 모신 적가이다. 혜원정사의 사찰 중 거의 유일하게 24시간 개방하고 있는 전각으로, 3층 건물로 이루어진다. 

혜원정사(慧苑精舍)의 일주문격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기본적으로 범종루(梵鐘樓)인 이 건물은 총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는 범종(梵鐘)이 있고, 아래의 문에 사천왕이 모셔져 있는 천왕문이 자리한다. 

無解空器 大道成滿
[무해공기 대도성만]
入此門內 莫存知解
[입차문내 막존지해]
앎없는 빈 그릇이어야 큰 도를 가득 이루리라 이 문안에 들어오려면 아는 것과 깨달은 것이 있다고 말라 

왼쪽엔 서방, 북방을 지키는 사천왕이 오른쪽에는 동방, 남방을 지키는 사천왕이 모셔져 있다.

문 뒷편에서 보면 이 건물이 범종루(梵鐘樓)라고 적혀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절의 왼편엔 종무소, 공양소, 요사, 해우소와 같은 절 관리 시설이나 교육장이 들어서 있다.

한창, 연등축제 준비 기간이라 건물이 나오는 사진을 찍긴 어려웠다ㅠ 이후에 절 전체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부처님 오신 날에 가거나, 그 축제 준비 기간 전에 방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쪽은 대웅보전쪽이다.

혜원정사 가람배치도 (출처 : 혜원정사)

절의 건물들은 이렇게 배치되어 있다.

절의 오른편에 있는 '마음()을 밝히는(明) 전각(殿)'이란 뜻의 명심전(明心殿)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양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같이 모신 전각이다. 이곳에 주지스님의 방사가 있으며, 현재 주지스님이 귀빈을 맞이하는 접견실과 사찰 업무를 의논하는 회의실로 쓰이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에는 수미단 위에 좌우협시보살을 거느린 석가모니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닫집을 세워 봉안하고 있다. 

육화전(六化殿)은 처음엔 이 지역의 분묘를 치우고 절을 세워야 할 필요가 생겨 그때 묻힌 분들을 봉안한 것을 시작으로, 사진에 보이는 2층 입구로 들어가면 불자들의 법회장소로 이용될 뿐 아니라 불자들의 신청을 받아 영구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웅보전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면 여러 건물이 나오는데 바로 눈에 띄는 것이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이다.

그 옆에 문이 하나 있는데, 위에는 '지리산 무쇠소'라고 적혀 있으며, 오른쪽엔 '혜원정사 창건주 고산 대선사 기념관'이라고 적혀 있다. 문도 닫혀 있고, 거기에 게이트문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열어보진 못했다.

혜원정사 지리산 무쇠소 개관식 모습 (출처 : 불교신문)

이곳은 2021년 12월 16일, 혜원정사 방장실에서 '고산당 혜원 대선사 추모관'인 '지리산 무쇠소' 개관식이 열렸다.

생전 고산 스님의 별칭인 지리산 무쇠소를 추모기념관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절에서 가장 높은 스님인 조실스님(큰스님)이 계시는 방장실(方丈室)의 정면이다. 여긴 절의 설립자였던 고산 스님이 오래 머물렀던 곳으로 지금은 위에서 말했듯 그를 추모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방장실 바로 앞엔 5층석탑이 있는데, 이는 1989년 고산 스님이 스리랑카 순방을 갔을 때 받은 석가여래 진신자리 2 과를 봉정받은 것을 모시기 위해 만든 석탑이다. 크기도 크고 위엄도 있는 그런 탑이었다.

비 앞면 비 뒷면
오층석탑
건립대공덕비
시주질(施主秩)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744사(士)
청신사(淸信士) 경오생(生) 신춘호(辛春浩)
청신녀(淸信女) 신미생 금덕성화(金德性華)
장자 정유생 신동원(辛東原)
자부(며느리) 신축생 민선영(閔先永)
차자(次子, 둘째 아들) 정유생 신동윤(辛東倫)
자부 경자생 김희선(金希鮮)
삼자(三子, 셋째 아들) 경자생 신동익(辛東益)
자부 계묘생 노재경(盧在庚)
차녀(次女, 둘째 딸) 기미생 신윤경(辛倫京)
손녀 무진생 신수정(辛修姃)
서랑(壻郞, 사위) 무진생 신은선(辛垠宣)
서랑 임진생 박재준(朴載俊)
장녀 을미생 신현주(辛炫周)
외손녀 신유생 신혜신(辛惠晨)

시(時)
증명(證明) 고산(皐山) 혜원(慧苑)
주지(住持) 이천종현(利天宗賢)
총무(總務) 지웅(智雄)
화주(化主) 정불이성(鄭不二姓) 이성각심(李性覺心)

안민관서(安民寬書, 백성을 편안하게, 책을 너그럽게)

불기 2533년(서기 1989년) 음 11월 3일

그 건너쪽 한 편에는 오층석탑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분들의 이름을 적은 오층석탑 건립 대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석탑의 뒷편엔 큰 기념비 하나가 보인다.

혜원정사가 창건된 1975년 직전 창립 배경부터 40여 년간의 절의 역사를 기록한 묘봉산 혜원정사 사적비인데, 2017년에 제막되었다. 이 기념비엔 혜원정사 창립배경부터 각 건물과 기념물이 세워지게 된 경위와 건물 규모나 건축 재료가 적혀 있으며,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혜원정사의 사찰로서의 자부심을 나타내며 오래갔으면 하는 바람을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엔 이 비를 만들 때 도움을 준 분들의 이름 몇몇을 기록하고 있다.

(혜원정사를) 늘 만나고 보기 때문에 그 귀함을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또, 사적비문을 읽어보며 여러분께서 얼마나 귀한 인연을 맺고 계시는지 아셨으면 좋겠다.

- 2017년  제막 당시 혜원정사 주지 원허 스님

비문 앞면
묘봉산(妙峰山) 혜원정사(慧苑精舍) 사적비명(事蹟碑)   아울러 씀[幷序]

불지교법(佛之敎法, 불교)이 동쪽 땅에 널리 전해짐[流傳於東土]하야 무수한 중생[無數衆生]을 무불제도(無不濟度)하시나 도심포교(都心布敎)의 교화전지미협(敎化傳之未悏, 교화를 전하는 것이 잘 안되는) 고(故)로 나[我] 고산(皐山)이 을묘년[於乙卯歲](1975)에 전법포교(傳法布敎)의 대가람(大伽藍)을 건립코져 시내 모든 곳[諸處]을 돌아다니며[巡歷] 답사라가 산도아니고 들도 아닌 상태[非山非野,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님]인 이 옛 터[此古址]를 발견하고 조위(调圍, '주위'의 오타로 추정)를 성찰(省察)하니 오히려[] 천축(天竺, 인도)의 계족산(鷄足山)과 같하야 주산(主山) 정상에 있는 길고 큰 돌[有長大石]은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설법지 모양[說法地像]과 같음이요 왼편의 청룡봉상(靑龍峯)에 16암석(十六岩石)은 바르게 16나한(十六羅漢)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자리의 모습[聽法點頭之像]과 바르게 같음[正如]이요 뒷편에 배산성지(盃山城址)가야16고분군(伽倻十六古墳群)이 둘러싸고 편안하게 있음[圍繞安住]하여 과연[可謂] 천하명당절경(天下明堂絶景)이며 무수한 성인[無數聖人] 배출지다[輩出之地也]라 소이(所以, 까닭)로 산명(山名)을 묘봉산(妙峰山)이라 하고 사명(寺名)을 혜원정사(慧苑精舍)라 이름새김[銘名]하고 이 옛 땅[此古址]에 욕성건립가람예정지(欲成建立伽藍預定地, 가람 예정지로 세움을 이루고함)니라.
이 옛 땅[此古址]를 고찰(考察)컨댄 을축년[於乙丑歲](1925)에 주변의 동리(洞里)에 거주하든 김덕만(金德萬) 노인(老人)이 땔나무를 구하고자 [慾求火木]하여 우연히 이 산에 옴[偶來此山]하야 이 옛 터를 발견[發見此古址]하고 평소 불심(佛心)이 잠재(潛在)한지라 부인(夫人) 김순임(金順任)과 의논하여 사후(死後) 극락에서 나고 삶[住生極樂]을 발원(發願)하고 세 칸 기왓집 불당[三間瓦屋佛堂]을 건립하여 금동불상 1좌[一坐金銅佛]을 조성 봉안하고 간경염불(看經念佛, 불경을 보고 부처의 이름을 욈)로 세월을 거님[逍日]타가 내중여생(乃終餘生, 남은 여생을 마치는 동안)하다, 그 후[其後] 10여년간에 자손 등이 근면보전터니 관심이 미약함[微弱觀心]으로 각자(各自) 흩어져 감[散去]하야 폐사공휴지(弊寺空休地, 절을 닫고 비어 쉬는 땅)로 잠깐 지남[暫過也]니라.
숙세(宿世, 전생)에 연이 있어[有緣] 고(故)로 을묘세[於乙卯歲](1975) 초여름[初夏]에 나[我] 고산(皐山)이 꿈을 얻고 뜻을 폄[得夢發意]하야 가람을 건립하길 바람[欲願建立伽藍]하고 募緣重搆하며 재목을 모으고 돈을 구함[鳩材求金]하야 謹身艱苦로 한 칸 띠집을 만듬[作一間茅屋]하고 석가모니불상 한 좌[一坐釋迦牟尼佛]을 봉안하고 천일기도(千日祈禱)를 시작하여 불사(佛事) 성취(成就)를 기원(祈願)하니
2개 성상(星霜, 세월)을 경과하여 법당 앞뜰[前庭] 가운데에 분묘(墳墓) 2좌인 묘지 90평(坪)을 매입하고 영가(靈駕)를 영구 위패 봉안키로 하여 철근콘크리트로 80평 육화전(六化殿) 건물을 창건(剙建, 創建)하여 묘지 위패 봉안으로 시작해서 무수한 위패[無數位牌]를 봉안하게 되었다.
다음 12평 범종루(梵鐘樓)를 2층으로 건립함에 1층은 철근콘크리트에 대문(大門) 겸 천왕문(天王門)으로써 유아 등을 위해서 빙긋 웃는 사천왕[微笑四天王]을 봉안하고 2층은 목재건물로써 1000관(千貫) 범종(梵鐘)과 대고(大鼓)와 운판(雲板)과 목어(木魚)를 안치했으며, 정묘년[丁卯歲](1987)에 대웅전(大雄殿) 건립을 이루고자[欲成建立大雄殿]하야 전국 유명 대리(大利) 대웅전(大雄殿)을 도목수(都木手, 목수의 우두머리)와 동행시찰함에 범어사(梵魚寺), 통도사(通度寺), 해인사(海印寺), 월정사(月精寺), 봉은사(奉恩寺) 등 새롭게나 오래전에 건립한 대웅전[新古建立大雄殿]을 세밀(細密)히 고찰, 그러한 후[然後] 각 대웅전의 부족점을 보충하여 건립 시에 제1에 최고목수를 선정하고 최상 재목(材木)인 강원도 홍송(紅松)과 그 외[其外] 다가라스목(木)과 불상조성목(佛像造成木)은 백두산원목 홍송 직경 1메다(1m) 60센치(60cm) 원목을 중국과 대만을 경유하여 구입 조성하였으며 법당(法堂) 마루는 강원도 홍송으로 하였으며 불상은 석가보니불,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삼존좌불(三尊坐佛)과 문수보살(文殊菩薩), 보현보살(普賢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일광보살(日光菩薩), 지장보살(地藏菩薩), 문수동자(文殊童子), 보현동자(普賢童子), 남순동자(南巡童子), 선재동자(善財童子) 등 입상(立像)을 봉안하고 상단후불탱화(上壇後佛木幀畫), 약사여래후불목탱화(藥師如來後佛幀畫), 아미타불후불목탱화(阿彌陀佛後佛幀畫)를 봉안하고 대웅전 좌편에 53불목탱화(五十三佛幀畫)와 우편에 신장목탱화(神將木幀畫)를 봉안하였다.
문화재청에서

비문 정면 기준 왼편
공기 불통(不通)으로 청개와(靑蓋瓦, 청기와)를 극심 반대로 청개와(靑蓋瓦)를 사용함과 동시에 밖공에 33은 99공(空)을 만듬[作]하여 공기가 통하게 하고 불상 위 보개(寶蓋)는 금강산(金剛山) 장안사(長安寺) 보개(寶蓋)와 같[如]히 1자로 연결제작하였고 법당  內ㅇ壁에는 석가모니불과 33조사(卅三祖師)를 화성(畵成)하고 외부 ㅇ壁에는 시방불보살(十方佛菩薩, 열 방향의 부처와 보살)을 화작(畵作)하였으며, 법당 외벽화(外壁畫)에 불타일생도(佛陀一生圖, 부처의 일생도)는 종체기용(從體起用) 도리(道理)로써 종동귀서(從東歸西)로, 심우도(尋牛圖)는 섭용귀체(攝用歸體) 도리(道理)로써 종서귀동(從西歸東)으로 화작(畵作)하고 외부 당(堂) 아래(下) 공기창(空氣窓)은 소형 충생(畜生) 출입 제한(堤限)으로 스댕 창살로 제작하여 근세(에) 드물게 보이는[稀見] 건축법으로 15칸 72평으로 건립한 보물급 걸작품(傑作品)이로다.
연차적(年次的)으로 대웅전 좌편에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을 봉안하고 그 앞[其前]에 방장실(方丈室)을 건평(建坪) 30평 목조건물을 건립하였으며 법당 우편에 백호봉(白虎峯)이 원래 없음[元無](이)라 첨성각(瞻星閣)을 ㄱ자로 60평 목조로 건립하여 백호봉(白虎峯)으로 상징하고, 을사년(乙巳年)(1989)에 나[我] 고산(皐山)이 스리랑카에 순방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 진신사리(眞身舍利) 2과(顆)를 봉정(奉呈)받아 방장실(方丈室) 앞[前]에 5층탑에 봉안하였다.
연차(年次)로 명심전(明心殿)을 철근콘크리트로 지평(地坪) 65평 3층 건물을  건립하여 1층에는 한국선다회(韓國禪茶會)인 다도법(茶道法)을 지도교수(指導敎授)하여 다법(茶法)을 수학(受學) 시행케 하며, 2층에는 시민선방(市民禪房, 시민이 참선하는 방)을 개설하여 사부대중(四部大衆,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네 부류의 무리)이 참선(參禪) 수행(修行)케 하였으

비문 뒷면
며 3층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문수(文殊), 보현(普賢) 삼신(三身)을 봉안하고 주지실(住持室)과 응접실(應接室)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후[其後] 만불전(萬佛殿)을 철근콘크리트로 지평 98평 3층 건물을 건립하여 1층에는 유아원(幼兒院), 2층에는 소강당(小講堂), 3층에는 만불(萬佛)을 봉안하여 24시간 개방하여 신도 등이 참선, 염불, 간경(看經), 주력(呪力)해서 수행 정진에 여념이 전무(全無)토록 하였으며, 좌편 청룡봉(靑龍峯)에 나한전(羅漢殿)과 삼성각(三聖閣)을 건립하여 신도 등의 기도 안식처로 하여 於焉過於三十餘星霜하야 가람의 전당요사(殿堂寮舍, 전당의 기숙사)가  완성하니 계곡이 더 빛남[溪谷增光]하고 풀과 나무가 아름다움을 머금음[草木含美]라 성스러운 경치를 스스로 이룸[聖境自城]이로다.
이 절[此寺]에는 보물급인 시지정문화재자료인 팔상탱화(八相幀畫)가 보존되어 있고 대웅전 뒤 임야[大雄殿後林野] 5천여 평(五阡餘坪)에 작설차밭[雀舌茶田]이 도심 중앙에 무성(茂盛)하여 근댁에 전무후무한 사실(事實)이다.
이[此] 가람은 수많은 성인으로 득도되는 곳[千聖得道之處](이)며 만인이 원한 것을 이루는 땅임[萬人願成之地也](이)니라. 새겨말함(銘曰)

나라의 남쪽 끝[國之南端] 이 정사[此精舍]는 스님이 득도하는 아름다운 경계[僧得道之佳境]라
이 거룩한 땅의 첨례를 보고 듣고[見聞瞻禮此聖地]하면 모두 해탈을 얻고 보리를 이룸[皆得解脫成菩提]하리라
또[又] 만약 사람이 일대사를 마치고자 함[若人欲畢一大事]인댄 이 곳을 방문해 마음을 반조[訪問此處心反照]하라
마음을 쉬면 곧 업장이 멸할 것이요[休心卽下業障滅]이요 반조하는 즉시에 정각을 이룸[反照卽時成正覺]하리라
 
세존응화(世尊應化) 2561(서기 2017) 음(陰) 9월 12일 세움[立] 해동사문(海東沙門) 고산(皐山) 지음 [撰]
대시주(大施主)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경오생 신춘호
신미생 김덕성화
정유생 신동원
신축생 민선영
정유생 신동윤
경자생 김희선
경자생 신동익
계묘생 신윤경
임진생 박재준
을미생 신현주
신유생 박혜성
무진생 신수정
경자생 신희선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신사생 신준호
정해생 한일랑
을유생 신동학
경술생 신동환
임자생 신경아

부산시 남구 남천동
신사생 이규열
을유생 조호자
경술생 이정석
갑인생 이소영

부산시 남구 남천동
임술생 유용술
갑자생 이극락화
을축생 유재진
            정희렬
임진생 유재흥
            김인재
정유생 유재순
           최명희
무술생 유재영

대구시 중구 북성로
계해생 조용호
갑자생 김명덕화
무자생 조광재
을축생 김경애
병신생 조동재
신축생 조수경
무오생 조수현
을축생 조수희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병자생 박준형
갑신생 정무진혜
계축생 박성진
을유생 박민정
경술생 박선정

부산시 연제구 연산4동
계유생 박마니화
신묘생 신동열
병신생 김금륜심
무술생 신종열
임인생 신미정
갑진생 신미애
신유생 신인석
계해생 신현석
정묘생 임나정

부산시 해운대구 마린시티2로
경오생 김재태
임오생 최정각심
갑진생 김성균
정미생 김종균
임인생 김진희
신축생 송민섭
임인생 김미희
갑인생 송기선

비문 정면 기준 오른편
연화질(緣化秩) 산중질(山中秩)
증명 고산(皐山) 혜원(慧苑)
회주(會主) 보광성주(普光性柱)
승법(乘法) 승조(僧肇)
금어(金魚) 김한열(金漢烈)
지전(持殿) 본열(本悅)
종두(鐘頭) 승진(昇眞)

지자(持者) 도일(道一)
원주(院主) 김반약심(金般若心)
화주(化主) 남정진심(南精進心)
                  정명일성(鄭明日性)
총무(總務) 현도(玄道)
주지(住持) 원허(元虚) 효명(曉明)

신도회장     이상수
수석부회장 권오공
부 회 장      신동렬
                   박영병
                   서보석
자비회
회장     이진법성
총무     김일상월

선지식회
회장     이원오성
총무     남정진심
만불회
회장     김보안인
총무     장서광지
지장회
회장     설법련화
총무     신보운인

관음회
회장     임진실성
총무     우세등광
합창단
단장     이대법성
총무     김서광주
선원
청중     최수마나
총무     황감로행

봉사단
단장     황만월심
총무     심대혜일

기념식수
예원정사 순례기념
도쿄 秋山礼
2019년 7월 1일

그 기념비 뒤에는 기념식수가  하나 있는데, 얼핏 내용을 보면 도쿄 순례 기념으로 받은 기념식수를 심은 것으로 보인다.

대웅보전 뒷편의 해수관음상을 뒤로한 채 쭉 가면, 2022년(불기 2566년) 음력 11월 26일에 점안봉안(點眼奉安, 불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 봉안)으로 완성된 마애지장보살(磨崖地藏菩薩)이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엔 소각장같이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ㄱ자 형태가 특징인 첨성각(瞻星閣)이다. 절의 첨성각은 사찰에서 스님이나 신도들이 거처하는 집인 요사(요사채)를 말한다. 일종의 수행자 기숙사인 셈!

참성단 쪽 계단을 따라 내려와 보면 마애약사여래삼존불(磨崖藥師如來三尊佛)을 볼 수 있다.

왼쪽부터 일광보살(日光菩薩),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월광보살(月光菩薩)이 모셔져 있으며, 비문에 따르면, 코로나 19 사태를 빨리 이겨내길 바라는 염원을 모아지었다고 한다.

조성공덕비 정면
마애약사여래삼존불(磨崖藥師如來三尊佛) 조성공덕비(造成功德碑)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瑠璃世界)에 상주하시며 중생을 질병의 고통에서 구제하시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에 대한 신앙을 30만근의 동(銅)으로 조성했다는 분황사(芬皇寺) 약사여래부처님의 기록과 이 땅에 현존하는 수많은 약사여래상에서 알 수 있듯, 이른 시기부터 성행한 한민족의 대표적인 불교 신앙 중 하나이다. 코로나 19로 전세계가 고통받던 2020년 여름, 묘봉산(妙峰山) 혜원정사(慧苑精舍) 주지 원허(元虛) 효명(曉明)은 약사여래부처님을 혜원정사에 봉안하여 약사여래불의 원력으로 코로나 시국을 타개하는데 보탬을 주고, 이곳에서 기도하는 모든 중생들의 고통 소멸과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였다. 이에 가로 5.5m, 높이 3.3m 크기의 자연석에 약사여래부처님을 본존불로 모시고 일광(日光)·월광보살(月光菩薩)을 각 좌·우협시보살을 부조로 조각한 약사여래 삼존불을 조성하기로 하여, 2021년 8월 완공하였다.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시는 본 불사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고 기꺼이 마음을 내어준 수많은 사부대중의 동참이 있기에 가능하였다. 이번 불사에 도움을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이 비에 기록을 남긴다. 공간의 한계로 참여한 모든 이를 기록하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느끼며, 이곳에서 기도하는 모든 불자님의 가정에 건강과 화목이 깃들고 약사여래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길 두 손 모아 약사여래부처님께 발원합니다.
불기 2565년(서기 2021년) 음 7월 일
묘봉산 혜원정사 주지 원허(元虛) 효명(曉明) 합장(合掌)

설변자(說辨者)
(이하 생략)

이렇게 부산의 도심 속 사찰 중 하나인 혜원정사 답사를 끝냈다.

정사(精舍)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절'은 아닌 단순히 '정신을 수양(精)하는 집(舍)'이라는 뜻이기에, '포교, 불교 교육'을 주목적으로 하는 곳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다른 절에서도 이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곳은 유독 시민에게 24시간 개방되는 기도처가 있어 주변에서도 어떤 시간이든 자유롭게 기도하러 올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절을 많이 다니진 않았지만 색다르다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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