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자들을 추모하는 새벽벌도서관 앞의 민주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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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외친 자들을 추모하는 새벽벌도서관 앞의 민주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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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벽벌도서관 앞에서 민주 항쟁을 기념하다

부산대 새벽벌도서관 앞에는 이런 작은 동산이 있다. 3개의 입구 중 나무계단으로 올라가는 길로 올라가 봤다.

계단을 올라가면 위로 치솟는 듯한 탑이 하나 보인다.

기념터를 가기 전에 좌우로 작은 산책로도 있는데, 잠깐 거닐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중앙의 계단 입구로 오면 바로 마주칠 수 있는 10.16부마민중항쟁탑과 그 주위를 두르고 있는 둥근 기념터를 마주할 수 있다.
 

2. 10.16부마민중항쟁탑

기념탑 정면 기념탑 뒷면
10.16 부마민중항쟁탑

억눌린 우리 역사
터져나온 분노
매운 연기 칼바람에도
함성소리 드높았던
동트는 새벽벌
시월이 오면
핏발 선 가슴마다
살아오는 십 일육
동지여 전진하자
깨치고 나가자
뜨거운 가슴으로
빛나는 내일로

부마민중항쟁 9년(1988년) 10월 16일
1979년 10월 16일 아침
여기 반도의 남단 부산에서
반역을 심판하는
시퍼런 분노의 칼날 세우며
유신철폐!! 독재타도!!
유신철폐!! 독재타도!!
억누를 수 없는 해방의 불길
솟아오르다

주최-부산애국시민

1970년대, 박정희의  10월 유신(1972), YH사건(1979.08) 등 그때까지도 그는 독재 정치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9년 10월 26일, 부산직할시의 부산대학교를 중심으로, 며칠 뒤 경상남도 마산시의 마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를 중심으로 '유신철폐, 독제타도'라는 구호로 시위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약 4일간의 항쟁이 시작되었고, 이 항쟁으로 결국 10.26 사건으로 이어져 박정희 시대의 종말을 이끌어 내었으며, 이후 집권한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의 독재를 막기 위한 5.18 광주 민주화운동(1980), 6월 민주 항쟁(1987)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3. 6기의 기념비

부마민주항쟁을 기리는 이 기념터의 뒷편으로 쭉 와서 찍은 사진이다. 둥근 기념터엔 기념탑 맗고도 6기의 비석들도 세워져 있다.
 

3-1. 고 정행구 열사 추모비

추모비 앞면 추모비 뒷면
고 정행구 열사 추모비

친구여 너의 웃음은 투쟁의 소중한 희망이었고
친구여 너의 눈물은 뼈 아픈 반성이라오
가끔은 실망도 하고 힘겨움에 돌아서 눈물 흘려도
투쟁의 이 한 길 함께 간다면 승리는 우리 것이다
- 열사의 애창곡 <편지8> 중에서
열사의 약력

1992년 부산대 섬유공학과 입학
1993년 섬유공학과 선전부장
            중앙통일선봉대 활동
1994년 섬유공학과 부학생회장
1994년 11월 25일 유서를 남기고 학우들 곁을 떠남

10주기를 맞아 새벽벌에서 공부하며 애국하는 학생으로 살다간 열사의 뜻을 기리며 동문들의 마음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2004.11.25.

정행구 (출처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 연대회의)

정행구는 1992년 부산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입학한 뒤, 이듬해 섬유공학과 선전부장과 중앙통일선봉대 활동을 시작했다. 94년에는 섬유공학과 부학생회장으로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강화를 위해 부산대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했는데, 그래선가 그는 학생회 선거가 끝난 뒤인 11월 25일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였다.
 

3-2. 이종률 교수 기림비

바닥 기념비 앞면 기림비 앞면
민족건양, 외세영어, 자주통일

민족사인(民族史人) 산수 이종률(山水 李鍾律, 1905~1989) 교수

선생은 경북 영덕에서 출생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6.10만세운동과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 등의 항일독립운동으로 여러 번 투옥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조선학술원 조직 활동과 민족건양회를 창립하였으며, 한국전쟁 이후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1952~1961)와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4월혁명 이후에는 민족일보 창간과 민주민족청년동맹 결성을 지도하였으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5.16쿠데타 후 민족일보 사건으로 1심은 무죄였으나 상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며, 옥중에서 민인혁명론(民人革命論)을 완성하였다.
선생은 일생을 민족건양(民族建陽), 외세영어(外勢領御), 자주통일 운동의 한길을 걸으시다가 1989년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민인혁명을 주창한 산수 이종률 교수 탄생 100주년 기림비


분열된 조국사들 구출하는 길은 자주통일의 민족혁명뿐이며,
인간혁명은 바로 그 뿌리에서 피어나는 가지요 꽃이다."

기념일 : 2005년 6월 6일

부산대학교,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사)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연구단체협의모임

산수 이종률 선생 (출처 : 뉴스와이어)

1902년, 경상북도 포항시 죽장면에서 아버지 이규환과 어머니 벽진 이씨 이점실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1년 점곡공립보통학교(현 점곡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곧, 항일운동가들이 세운 안동의 동명학교(현 안동초등학교)으로 진학한다.
 
1924년에는 서울로 가 배재고등보통학교(현 배재고등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고, 이후 경성청년회, 공학회, 정론사, 명덕청년회, 조선인단체협의회, 신간회 도쿄지회, 근우회 도쿄지회, 재일조선청년동맹, 사회실정조사소, 형평청년전위동맹, 상록회 등 다양한 반일 운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그는 서울로 돌아와 사회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조선학술원, 민족문화연구소, 에스페란토조선학회, 민족건양회, 민주주의독립전선 등 민족주의적인 사회 운동을 하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남북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한창 이던 1957년 부산대학교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 외 민족문화협회 등 다양한 교육 활동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을 목격하고, 민족건양회를 소집해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을 창립했으며, 이후에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창립에도 일조했고, 민족통일연맹(민통련) 발족을 지원하거나 남북 협상 통일론을 설파하는 등 통일 운동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집권한 박정희의 눈에는 반국가적 행위로 여겨졌고, 그래서 그는 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 사건과 민족일보 사건으로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옥중에서 민종혁명을 통한 인간혁명까지의 인간사적인 혁명을 해야한다는 <민인혁명론>을 완성한다.
 
1965년 12월 형 면제되어 석방된 뒤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이후 다양한 교육 운동을 펼치다가 1988년 3월 그의 동래구 명륜동의 자택 수일원(秀一苑)에서 생을 마감한다.
 

3-3. 고 양영진 열사 추모비

추모시비 앞면 추모시비 뒷면
어머니의 손톱


어미니 손톱을 깎아 드릴께요
자꾸만 쌓이는 쥐똥같은 가난
깎아 드릴께요
똑똑 끊어졌어도 뛰어다니는
피곤 잡아 드릴께요
어머니 보이세요
신문지에 검은 손톱날이 떴군요
경지정리로 파헤쳐진 들녘
의 활자위로
어머니 가난을 위해
절 어머니 손톱 속에 가둬두지 마세요
자라나는 우리의 슬픔이 될 뿐이예요
쌓이는 쥐똥이 될 뿐이예요
어머니 잡겠어요
우리의 창문을 넘보고
간밤불면 마저 갉아먹는 녀석
잡아버리고 말겠어요
어머니 이리 가까이 앉으세요
손톱을 깎아 드릴께요
1967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
1986년 동래고등학교 졸업
1986년 부산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1988년 국문과 학술부장 역임. 귀성회장 취임 
             1학기 전방입소 거부투쟁
             부대문학 기획, 「우리 전선을 뚫고가는 깃발이 되어」 주도
(1988년) 8월 8일 입영통지서 받고 8월 10일 입영
(1988년) 10월 10일 부산대학교 재료관 5층에서 투신
               100여 편의 유고시를 남김

당시 21세의 양영진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7년 3월,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에서 아버지 양태옥과 어머니 정봉순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양영진(梁永進, 1967~1988)은 초등학교 졸업 후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1983년 2월에 해운대중학교를, 1986년 2월에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6년 3월,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학생 운동에 참여했고, 시짓기를 하면서 문학 운동에도 집중했다. 그렇게 1988년 3월, 부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술부장으로 선출된 이후 <부대 문학>이라는 학생 문예지 활동을 통해 학생 운동과 문학 운동을 결합하려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88년 3월, 양영진은 군사 정부의 대학생 군사 훈련의 일환인 전방 입소를 거부하고, 4월에는 훈련소에서 퇴소당한 44명 중의 한 사람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항의로 부산대학교 총장실을 점거하며 농성을 벌였다. 6월에는 남북 학생회담을 추진하는 학생 운동의 열기 속에서<부대 문학>이 주관하는 '통일 시 공동 창작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88년 8월, 양영진은 8·15 남북 청년 학생 회담의 성사를 위해 선전대 활동에 참여했는데, 그러던 중 8월 9일에 갑작스런 입영 통지서를 받고 8월 10일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는데, 이 갑작스런 입영은 전방 입소 거부에 대한 보복의 성격이 짙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영진은 방위병으로 근무하던 중 분단 현실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군대와 미국을 비판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긴 후 1988년 10월 10일 부산대학교 재료관 5층에서 투신 자결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3-4. 고 신용길 선생 추모비

추모비 앞면 연혁비 앞면
참교육을 위해 살다 간 신용길을 기리며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많이 있소

당신이 아니더라도
그런 글을 쓸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요

내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많아요

그렇다면
침묵과 위선, 비겁함과 굴종은
누구의 할 일이란 말인가


「브레히트를 생각하며」 전문
시 신용길
글씨 박재동
故 신용길 선생

1957 서울 출생
1979 부마민주항쟁 참여
1982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87 “현대문학”으로 등단(시)
1989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관련 구덕고에서 파면
         옥중에서 단식투쟁 중 병 보석
1990 부마민주항쟁 공동수업자료집 발간
         전교조 부산지부 교과위원장으로 왕성한 활동
1991 3월 9일 35세의 나이로 영면 
1991 참교사상 수상. 유고시집 “홀로된 사랑” 출간
2004 민주화운동 인정

당시 34세의 신용길 교수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난 신용길(愼鏞吉, 1957~1991)은 1973년 부산 경남중학교, 1976년 동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국 부산대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부대문학회에 가입해 시를 쓰기도 하면서 결국 1982년 부산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그렇게 그는 선생의 길로 들어서면서도 문학 활동을 멈추지 않고 '부산경남젊은시인회의'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동인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후 1987년에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의 여파로 부산교사협의회가 결성되자 신용길도 그곳에 가입해 민족 교육, 민주 교육, 인간화 교육에 대한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1989년 8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파면되었으며, 그로 인한 부당 해고에 맞서 출근 투쟁을 벌이다 경찰에게 잡혔다. 경찰서에선 단식투쟁을 하다 위궤양으로 쓰러져 병 보석으로 출옥해 다시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위암 투쟁 끝에 1991년 3월 안구를 기증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3-5. 최종철 열사 추모비

추모비 앞면 추모비 뒷면
5.18 민주유공자 최종철 열사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021.10.9

부산대 민주동문회, 조선공학과 동문회, 충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최종철 열사 발자취(1958~1981)

1958. 청주 상당구 석교동에서 아버지 최재홍의 3남으로 출생
   77. 청주고 50회 졸, 부산대학교 기계공학계열 입학
   78. 간디사상연구회 동아리 활동
   79. 10월 16일~23일 부마항쟁 참가, 구류 3일
   80. 5월 7일~15일 충북 청주 5월 민주화 시위 앞장
   80. 5.18 계엄 포고령으로 계엄군 청주합동수사본부 연행
   80. 11월 5.18국가반란죄로 징역 3년, 항소 영등포교도소로 이감
   80. 12월 2심 항소심 징역 2년
   81. 5월 11일 석가탄신일 특별사면 석방
   81. 9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
   84. 11월 일 청주 용박골 제일교회 공원묘역에 추모비 건립
   99. 5월 5.18광주민중항쟁 민주유공자로 국가유공자 추서
2000. 5월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안장
   11. 9월 1일 30주기 추모제 거행. 추모문집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발간
   20. 4월 24일 부산대학교 조선공학과 명예졸업장 수여, 5월 27일 5.18묘역 명예졸업장 헌정
   21. 9월 1일 40주기 추모제, 첫 주모비 제일교회 민주정원에 이전 설치
   21. 10월 9일 부산대 민주동산에 40주기 추모비 건립

** 이 추모비는 부산대 민주동문회, 조선공학과 동문회, 재청부산대 동문, 청구조 50회, 충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가 힘을 모아 건립하였다. **

당시 24세의 최종철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최종철(1958~1981)은 청주에서 태어나 이후 1977년, 부산대 기계공학계열로 진학해 곧바로 학생 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학 재학 중 1979년 10월에 일어난 부마항쟁에 앞장섰다가 수배를 받게 되어 고향 청주로 돌아가 청주에서 민주화 시위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받게 되고, 여러 교도소를 다니며 고문당하고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다행히 1981년 5월 출감했으나, 그 과정 속에서 얻은 신경통으로 같은 해 9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6. 고 장재완 열사 추모비

추모비 앞면 추모비 뒷면
故 장재완 열사 추모비

적들의 야수 같은 손길이 나를 찾고 있습니다.
나의 죽음이 우리 혁명과 통일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면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요.
  동지들의 미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우리 조국 한반도의
통일을 향한 가열찬 투쟁을 기대하면서

-유서 중에서-.
열사 약력
1965년 7월 17일 경남 진양 출생
1983년 2월 동인고 졸업
             3월 부산대 사회복지학과 입학
1986년 1월 방위병 입대
1987년 3월 27일. 23일 귀가 중 버스
             에서 문건이 든 가방을 잃어
             버린 후 조직 보위에 대한 유서
             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

장재완 열사의 뜻을 받들어
부산대 민주 학우와 부산의
애국 시민이 세우다.
1994. 10. 10.

장재완(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5년, 경상남도 진양군 대곡면에서 아버지 장용환과 어머니 남종임의 4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장재완(張在玩, 1965~1987)은 1970년 자식교육을 위한 아버지의 선택으로 부산광역시 동래로 이사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는 동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부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학생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3학년 2학기가 끝난 1985년 12월에 휴학해 이듬해 1월 방위병에 입대했는데, 그 와중에도 여러 학생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날 1987년 3월 23일, 부대에서 집으로 귀가하던 중 버스에서 학생 운동과 관련한 문건이 들어 있었고, 이는 보안대에 넘겨졌다. 이에 장재완은 곧 보안대가 자신을 조사하고, 그로 인해 학생 운동권의 피해가 심각할 것을 우려해 부산대학교로 유서를 보내곤 1987년 3월 27일 야산에서 자결했다.

장재완군이 부산대학생들에게 남긴 유서 (출처 : https://archives.kdemo.or.kr/main)

유서 앞면 유서 뒷면
부산대 애국청년학생동지들께.
또다시 계절의 봄은 왔건만,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이 땅의 민중들에겐 진정한 해방의 그날은 오지 않았읍니다.
한반도 민중을 암살하는 침략자 미제국주의자와 미제의
괴뢰인 전두환 깡패집단은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을
갈망하면서 일떠선(일어선) 민중들의 가열찬 투쟁들을
온갖 잔혹한 고문과 살인적 폭력으로 억누르고
있읍니다.
동지들!
저는 부산대학교 사회복지학회 83학번으로 86년 1월
방위병으로 입소하여 군복무를 하던 중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코저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 우리의 혁명과 투쟁이 너무나
순결하고 숭고한 것이기에 나의 희생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나의 생명이 다할지라도 혁명을 향한 민중들의
투쟁은 더욱더 가열차고 견결해 질 것입니다.
애국청년학생들이여.
이제 우리는 민족해방과 조국통일의 위대한 과업을 달성코자
강고한 지도중앙의 기치아래 결집하여 자신의 온갖
정렬과 투쟁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동지들!
이제 저는 가야할 때가 왔읍니다.
적들의 야수 같은 손길이 나를 찾고 있읍니다.
나의 죽음이 우리 혁명과 통일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는 계기가 된다면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요.
동지들의 미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우리 조국 한국의 통일을 향한 가열찬
투쟁을 기대하면서

민주학우가.
1987.3.27.

一. 민족 생존권 압살하는 핵무기를 철폐하라.
一.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제는 물러가라.
一. 학살 정권 지원하는 미제를 축출하자.
一. 조국 분단 영구화하는 주한미군 철수하라.
一. 조국 통일 가로막는 미제를 쳐부수자.
一. 살인,고문 자행하는 파쇼정권 타도하자.
一. 민족 해방 민중민주주의 만세.
一. 조국통일 만세.

 

새벽벌도서관쪽에서 바라본 저녁의 민주동산
사거리쪽 입구에서 바라본 저녁의 민주동산

새벽벌도서관 정문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풀이 조금 있는 돌로 된 작은 민주동산이 있다. 여기엔 이렇게 자신의 민족적 뜻과 시민들, 그리고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던 사람들을 기리고 추모하고 있다. 여기서 조국 통일 방식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이 있지만, 여기 모셔져 있는 분들 대부분은 민주적 평화 통일을 외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일 수 있겠다. 정치색과 무관하게 몇몇의 행동으로 지금의 어느정도 정리되어 가는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우뚝 서게 된 것은 사실이니 그 부분만은 기억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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