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비하여 무지개 사이를 거닐라, 부산대학교 (구)정문과 수위실, 그리고 웅비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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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하여 무지개 사이를 거닐라, 부산대학교 (구)정문과 수위실, 그리고 웅비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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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산대학교 (구) 정문과 수위실

부산대학교가 1955년 현재의 부지로 이전하면서부터 현재 무지개문이라고도 불리는 (구) 정문에 처음 정문이 1957년에 세워졌다.

1957년(설립년)과 2016년의 무지개문 (출처 : 채널PNU)

이후 1976년 현재의 (현)정문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곳이 정문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무지개문과 구 수위실(虹霓門*, 舊 守衛室)

국가등록문화재 제642호
무지개문 1기/높이 12.3m. 수위실1동/51㎡

무지개문은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1957년 4월 20일 부산대학교 교문으로 준공하였다.
이 문은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인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이 설계하였으며 당시 부산대학교 후원회장이자 대선발효공업주식회사 사장이었던 박선기(朴善琪, 1912~1962)가 건립 비용을 출연하였다.
현재 무지개문은 금정산의 모습과 캠퍼스를 감싸고 있는 녹음과 어우러지면서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크기는 높이 12.3m, 폭 15.8m로, 곡선의 흰색 아치 형태는 일반적인 교문과는 다른 독창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해와 달이 상승하듯 창공을 향해 솟구쳐 있는 모습은 원만(圓滿)과 자비(慈悲)를 상징하는 사랑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며, 재학생들이 인류와 국가의 새 문화를 창조하는 인재가 되기를 바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구 수위실은 무지개문 왼쪽 숲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 앞면의 유리창에서는 건축가 김중업 특유의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땅위에 떠 있는 듯한 구조는 본 건물의 독특한 개성을 잘 살려주고 있다.

* 홍예문. '홍예'는 '아치'와 같은 말.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굴게 만든 문.

무지개문((구)정문)과 (구) 수위실을 같이 찍어봤다. 하늘의 황혼과 함께 잔잔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받았다.

무지개문((구)정문)의 입구쪽에서 찍은 사진(좌측)과 안쪽에서 찍은 사진(우측)

지금은 주로 기계관, 제6공학관, 건설관에서 수업을 들으러 오는 학생들이나 인근에 거주하는 학생들, 온천장 방면 혹은 부산대 남쪽의 먹을거리를 즐기러 가는 학생들이 종종 드나드는 문으로 초기 설립 때보다는 적은 인원이 다니지만, 아직도 차도 다니고, 사람도 거니는 유동량이 어느 정도 있는 하나의 대학 입구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무지개문이나 (구)정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인근 사람들은 인근 정류장들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후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 정문 왼편엔 (구) 수위실이 있다. 안내판의 설명처럼 땅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입체적이고 미래적인 느낌도 느낄 수 있었다. 수위실 특성상 내부를 자세히 확인할 순 없지만, 컴퓨터 화면이 여러 대 켜져 있기 때문에 아직 보안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다.
 

2. 웅비의 탑

원래는 1972년에 지어진 웅비의 탑인데, 이후 태풍으로 무너지며 1987년 새로 지은 탑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당시 캠퍼스 정문(현 (구) 정문)으로 들어오면 효원인(부산대인)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상징을 뽐낸다.

진리의 상과 봉사의 상(좌측), 자유의 상과 진리의 상(우측)

탑의 하단에는 3명의 조각상이 있는데, 각각 진리, 자유, 봉사를 상징한다고 한다.
첫번째 사진의 왼쪽의 책을 들고 있는 남성은 진리를 상징하며, 그 오른쪽에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뭔가를 말하는 듯한 여성은 봉사를 상징한다. 두번째 사진에서 비둘기를 날리는 여성은 자유를 상징한다.

이 탑의 뒷편 하단부에는 효원인의 기개를 노래한 <독수리송>이 적혀 있고, 그 아래 태풍으로 무너진 것을 새롭게 지었다는 안내문구가 적혀 있다.

독수리송(訟)

여기 금정산(金井山) 정기(精氣) 받아 세워진 진리(眞理)의 전당(殿堂)
몇 천(千) 몇 만(萬)의 슬기로운 일꾼들이 이곳을 거쳤느니.
진리 자유 봉사의 정신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창공(蒼空)을 웅비(雄飛)하는 독수리로 기상(氣像)을 삼았네.
바위처럼 꿋꿋한 자세(姿勢)는 사해(四海)를 굽어보고
한 번 날면 하늘의 왕자(王者)로서 기상(氣像)도 늠름(凜々)하다.
천리(千里)를 꿰뚫는 황금(黃金)의 안광(眼光) 천금만조(千禽萬鳥)를
습복(慴伏)시키는 용기(勇氣)를 우리 부대인(釜大人)은 배우리!

1972년 12월 5일
조각가 김세중씨가 제작한 독수리상이 1987년 여름 태풍으로 인하여 파손되어 1988년 5월 15일 다시 제작 건립함.

제작 : 김정명
- 박동수, 정희욱 외 87학년도 조소전공 학생들이 도움.

이렇게 부산대학교 (구)정문과 웅비의 탑을 지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이 시대에 대학의 입구와 상징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금 고민해봤다. 분명 오래전 설립했을 때보다는 대학이라는 것의 의미는 퇴색한 듯 보이지만, 학문 연구의 선구자로서, 그래서 더 그런 공부를 하려고 하고, 공부를 기억하려 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웅비하여 무지개 사이를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둥지같은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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