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유학문화를 간직해온 동래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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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유학문화를 간직해온 동래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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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교차로에서 동래로로 조금 더 올라오면 명륜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동래향교가 보인다.

이 동래향교는 교육을 하던 강학공간과 의례를 하던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는데, 우선 반화루를 통해 강학공간으로 가 유학을 배운 뒤, 옆으로 돌아 문 두 개를 통과해 제향공간으로 가 제사를 지냈다.

이 향교 앞에는 대소인원(大小人員, 높고 낮은 모든 관원)이라면 모두 말에서 내려서 들어가라는 대소인원하마비(大小人員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유교 성현들과 그 배움을 존중하는 의미가 들어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동래향교(東萊鄕校)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이 향교는 1392년(태조 원년)에 교육진흥책으로 전국에 향교를 세울 때 설립되었다. 첫 건립은 동래읍성 동문 밖(동래고등학교 자리)에 세웠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재건한 뒤, 여러 차례 장소를 옮기면서 중건되었으며, 1813년(순조 13) 동래부사 홍수만(洪秀晩)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다. 지금 이곳의 지명인 명륜동은 향교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유래된 것이다. 향교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시대 말까지 이어져 내려온 지방 교육 기관이다.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생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기능과 함께 지방의 문화 향상을 도모하는 사회화교화기능도 갖고 있었다.
향교의 건물 구조는 유교의 성현을 모신 대성전(大成殿),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교생들이 기거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제사의 기능을 도운 전사청(典祀廳) 등의 부속건물이 건립되어 있다. 이것은 중앙의 성균관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다. 일반 향교의 건물배치가 대성전과 명륜당이 일직선 상에 있는 것과 달리 동래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2열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향교의 정문인 2층 문루를 반화루(攀化樓)라고 한 것은 반룡부봉(攀龍附鳳), 즉 성인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조선 초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동래향교에는 종6품의 교수 1명이 있었고, 학생의 정원은 70명이었다. 또,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학전(學田) 7결(結)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가 시행됨에 따라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지금도 동래향교에서는 음력 2월과 8월의 초정일(初丁日)에 두 차례에 유림에 의해 향사가 받들어지고 있다.

안내판에는 '교생들이 기거하는 동무와 서무'라고 되어 있는데, 원칙적으로는 동재와 서재에 학생들이 기숙했고, 동무와 서무는 다른 성현을 모신 곳이다. 그러나 해설사님의 조선 후기 동래향교에 기거하는 학생들이 많아져서 어쩔 수 없이 동무와 서무에도 학생들이 살게 된 것이다. 아마 이런 일화를 가지고 안내판에 '교생들이 기거하는 동무와 서무'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지만, 조금 더 세세하게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래학교의 정문이자 누문인 반화루다. 여기를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강학공간이 나오며, 이 위쪽의 누각에서 시를 읊거나 잡담을 했다고 한다.

동래향교 반화루(東萊鄕校 攀化樓)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65호)

반화루는 동래향교 정면에 위치하는 남루(南樓)로 동래향교 경내의 문 가운데 건축적으로 가장 위계가 높은 누문(樓門)이다. 1788년 동래부사 이경일이 남루를 중건하여 반화루라 하였고, 그 후 1813년 부사 홍수만이 동래향교를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1815년에 새로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공포는 익공계로서 1출목 이익공식이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며, 지통은 부연을 정기대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4면의 처마는 모두 겹처마이고, 건물 네 귀의 추녀 위에 사래를 겹쳐 놓았다. 이익공 위에 봉두형(鳳頭形)으로 새긴 보머리와 익공쇠서에 연봉(蓮峰, 연꽃 봉우리)과 연꽃을 조각한 것에서 조선후기의 건축 수법을 볼 수 있다. 
또한 익공의 형태와 초각 및 부재의 치목, 결구수법 등에서 조선후기 향교 문루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지방 향교 문루 중에서는 다소 늦은 시기에 건축된 건물이지만 구조와 평면형식, 입면구성 등에서 조선후기 향교 문루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등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축 문화재이다.

반화루로 들어서면 바로 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인 명륜당이 보인다. 그리고 양옆으로는 동재, 서재가 있다.

동래향교 명륜당(東萊鄕校 明倫堂)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동래향교 명륜당은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공간이며, 1813년(순조 13)에 동래부사 홍수만이 현 위치로 동래향교를 옮긴 후 1815년(순조 15)에 건립한 건물임.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가운데 넓은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정면 1칸, 측면 2칸 크기의 온돌방을 둔 형태임.
공포(栱包)는 전면과 후면이 다른데, 전면은 외1출목 이익공식으로 앙서형의 초익공 상단에는 연꽃을 초각했으며, 수서형의 2익공 하단에는 연봉을 초각했음. 배면은 출목이 없는 이익공식으로 외부 익공은 모두 대량 뺄목의 길이에 맞추어 마구리를 직절(直切)한 단조로운 형태임.
동래향교 명륜당은 익공의 형태와 초각 및 부재의 치목, 결구수법 등에서 조선 후기 향교 명륜당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임

이 동래향교 명륜당은 현존하는 향교 명륜당 건물 중에서는 다소 늦은 시기에 건축된 건물이지만 구조와 평면형식, 입면구성 및 세부에서 조선 후기 향교 명륜당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등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축 문화재로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명성을 떨치고 있다.

동재의 모습. 이 동재에는 양반 유생들이 주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비슷한 모습으로 서편에 서재도 있는데, 이 서재는 서얼과 같은 양반 유생보다 조금 낮은 취급을 받았던 서류(庶流) 유생들이 썼던 곳이다. 유교에서는 동쪽에 서쪽보다 위계상 더 높기 때문에 그렇게 지은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에서 입구인 반화루 쪽을 바라본 모습. 여기서 살며 공부하던 유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여기 들어왔을까? 여기서 저쪽을 바라보며 다양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던 것 같다.

뒤로 돌아오면 대성전(大成殿)이 보인다. 공자를 존경할 때,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 불렀는데, 이렇게 공자와 그 이하의 많은 중국과 한국의 유학자들을 모신 곳이 대성전(大成殿)이다. 

오늘 해설사님께서 특별히 대성전의 내부를 찍을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원래도 1년에 제사일 때 하루나 이틀 정도만 열린다고 하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이런 기회를 주셔서 열심히 찍었다! 대성전을 직접 열진 않았고, 그 옆의 작은 창문으로 사진을 찍었다. 저 가운데에 공자의 위폐와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주변에 중국과 한국의 유학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여긴 대성전의 가장 오른쪽에 모셔져 있는 위패들이다. 이들 또한 유학 성현들이다.

동래향교 대성전 (東萊鄕校 大成殿)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1972.6.26)

이 건물은 유교의 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1392년(태조 원년)에 교육진흥책으로 전국에 향교를 세울 때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05년에 다시 세워진 후 여러 차례 옮겨졌으며, 1813년(순조 13년)에 부사 홍수만(洪秀晩)이 현 위치에 동래향교를 이건할 때 가장 먼저 지어졌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익공식이며, 겹처마 맞배집(맞배지붕)이고, 부속건물로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건물 내부에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동래향교 대성전은 19세기 초 익공식 건축의 세부 특징을 자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동래향교 내의 여러 건물 중 위계가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축 문화재이다.

이 대성전에 배향하지 못한 유학의 성인들을 모신 곳이 바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다. 사진은 동무(東廡)

여긴 서무(西廡).

대성전의 바로 좌측에 이런 풀밭과 돌 구조물이 있는데, 이는 제사를 끝내고 지방(紙榜)과 같은 것들을 태울 때 쓰는 곳이라고 하셨다.

출처 : 햔국향토문화전자대전

반화루와 동재의 사이에는 이렇게 기의 부사들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좌측부터 부사 황일하 영세불망비, 부사 정현덕 흥학비, 부사 현명운 흥학비, 부사 이탁원 흥학비가 있다.

공자 탄강(孔子誕降) 2533년(서기 1984년)
임술(壬戌) 중추(仲秋)
월성 박씨(月城朴氏) 동래문중(東萊門中) 개축(改築)

이 비석군의 좌측 벽면에는 공자 탄강 2533년(서기 1984년)에 동래에 모여 살던 월성 박씨 집안에서 이 동래향교를 다시 고쳐지었다는 기록도 새겨져 있다.

출처 : http://dh.aks.ac.kr/

 그 옆에도 이렇게 여러 비석들이 있다. 왼쪽부터 빠르게 소개하겠다.

부사 김선 흥학비가 가장 왼쪽에 있으며, 

부사 조규년 흥학비,

부사 서당보 흥학비,

부사 홍수만 흥학비,

부사 황정연 흥학비,

부사 정언섭 흥학문화거사비가 쭉 서 있으며

마지막으로 그 옆에 부사 이규현 흥학비가 있다.

동래향교 안내판과 비문에 기록된 동래부사의 대략적인 부임기간과 인명

* 확실하지 않은 것은 ? 표시를 덧붙임
부임기간 인명
1604~ 홍준(洪遵)
1705~ 황일하(黃一夏)
1730~1733 정언섭(鄭彦燮)
1788?? 이경일(李敬一)
1813~1816 홍수만(洪秀晩)
1822~? 이규현(李奎鉉)
1827~1829 김선(金䥧)
1834~1835 이탁원(李鐸遠)
1856~ 서당보(徐堂輔)
1861~1862 조규년(趙奎年)
1867~1874 정현덕(鄭顯德)
1874~1875 황정연(黃正淵)
1900~1902 현명운(玄明運)

이렇게 동래향교를 쭉 둘러보고 나왔다.
조선시대에 많은 유생들과 학자들이 드나들었을 유교를 교육하던 학교를 거닐며 가는 곳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생각해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유학의 딱딱한 이미지와 달리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장난도 치고, 힘들 때 돕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는 그런 요즘과 같은 분위기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땐 근엄하고 엄숙하게 예를 갖추었을 것이다. 그들의 유학에 대한 믿음은 현재는 많이 사라졌지만, 이렇게 이 자리에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놓여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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