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최초 만세운동을 했던 그녀들을 기리는 부산일신여학교만세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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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최초 만세운동을 했던 그녀들을 기리는 부산일신여학교만세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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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초등학교, 동래여자중학교, 부산예술중학교, 동래여자고등학교, 부산예술고등학교 등을 운영하는 학교 법인 내에 부산일신여학교 만세 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우선 경비실의 허락을 맡고, 역사의식이 바르다는 칭찬을 받으며 안내받은 위치로 향했다. 부산일신여학교 만세 운동 기념비의 정확한 위치는 이쪽이다.

여기서 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이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위치로 설명하면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올라가는 길목과 현 동래학원 사무국인 일신관(日新館)의 접촉로의 동북쪽에 풀과 나무들이 자라는 곳에 세워져 있다.

부산일신여학교 만세 운동 기념비는 총 3개의 비석으로 이뤄져 있다. 가장 가운데 핵심적인 큰 비석과 그 앞 양쪽에 지면에 붙어 있는 2개의 석판이 있다. 가장 중앙에 있는 이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비 앞면 비 뒷면
부산(진)일신여학교 만세 운동 기념비

일본이 우리의 주권일 빼았아 총칼을 앞세우고 무단정치를 강행한 지 10년에 접어드는 1919년 3월 1일 이 날을 기하여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딛고 온 겨레의 성충과 민족자긍의 의지를 독립선언문에 담아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을 찾고 자유를 회복하려는 우리의 결의를 일본 당국에 통보하고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다. 누가 조국을 사랑하지 않으며 자유를 원치않으랴. 독립의 외침은 요원의 횃불처럼 삼천리 강토에 메아리쳐 나갔다. 이곳 일신여학교에서는 이러한 서울 소식을 알고 거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후 꽃같은 젊은 여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손에 손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하늘 높이 외치니 아아 하느님 이 소녀들의 외침을 굽어 살피소서. 자유 그것 아니면 죽음도 사양치 않겠다는 이 겨레의 꽃들을 어여삐 여기소서! 남자는 그래도 의리를 배웠지만 여자의 가는 길은 부도인데도 어찌하여 위국충절에 앞장섬인고 더우기 님들의 독립만세는 부산 경남지역의 선구가 되니 국사에 어찌 남녀의 구별이 있으랴. 당시 학생인 김응수(金應守)님이 경찰 심문에서 "세살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았으면 달라고 우는데 우리들은 우리나라를 돌려달라고 하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한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며 님들의 장한 뜻을 후세에 전하고자 사연의 대강을 돌로 새겨 당시의 일신여학교 자리에 세우는 바이다.
근기 : 정충환
근서 : 고동주
조각 : 장상만
건립 : 부산직할시
건립일자 : 1984년 11월 일

현재 부산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부산진일신여학교 건물

현대의 부산진 지역에서 1919년 3월 11일과 4월 8일에 현 동래여자고등학교와 동래여자중학교 등의 전신인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는 조선-대한제국이라는 민족의 나라를 무참히 밟아버린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을 했다. 이들 학생들의 만세 운동은 부산의 3.1운동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 이후 부산의 많은 지역에서 3.1운동이 널리 퍼지며 이 일본에서 가장 가깝다는 땅에서도 한국어로 만세 소리가 널리 퍼지게 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비를 옮긴 기록을 쓴 2개의 석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위 사진에 보이는 (전)부산진일신여학교 인근에 이 학교에서 부산에서의 처음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84년 11월 처음 비석을 세웠다가, 1987년 동래여자고등학교가 금정구로 이전했고, 이후 1992년에 원래 (전)부산진일신여학교에 있던 만세 운동 기념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좌측 석판 우측 석판
이건기(移建記, 옮겨 세운 기록)

우리는 그날의 고귀한 얼과 정통적 맥을 이어받고자 부산직할시 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전 부산진일신여학교 소재지 동구 좌천동 768번지로부터 이곳에 옮겨 세우다.

1992년 5월 14일

동래여자고등학교장 오재용(吳載瑢)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40-1-16
관리자 : 동래여자고등학교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부산, 경남 지역에서는 3월 11일에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 11명과 교사 2명이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의거는 당시 부산,경남 지역의 3.1운동의 첫 횃불이 된 사건으로서 그 후 부산, 경남 각지에서 만세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났다. 이 의거를 주동한 여학생들과 교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4년 11월, 부산광역시에서 이를 기념해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를 전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가 자리했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768번지에 건립하였고 이를 1992년 5월 14일에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자리잡은 동래여자고등학교 교정으로 이전하였다.

그러한 것을 증명해주듯 학교에는 이러한 문구가 붙어져 있다. 동래초등학교 쪽에도 몇 개 붙어 있는 것 같으나, 멀진 않지만 남의 학교에 오래 있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워 문구는 이것만 찍고 내려왔다. 

학교 자체도 근대적인 느낌이 물씬 나면서 이쁜 것 같다~

동상에는 '초대 이사장 우창(隅蒼) 오태환(吳泰煥)'이라고 적혀있다. 그는 기장의 대지주의 집안의 아들이었으며, 민족 자본을 융성하기 위한 근대적 금융 기관 중 구포은행(이후 경남은행)과 동래은행, 경상합동은행(경남은행+대구은행) 등의 대주주나 고위급 인사로 참여했으며, 폐교될 위기에 처해있던 당시 동래일신여학교를 인수해 재단법인 구산학원(현 학교법인 동래학원)을 설립해 동래고등여학교(현 동래여자중학교, 동래여자고등학교 등)을 세웠던 인물로, 그렇게 동래학원의 초대 이사장이 되어 민족 교육에도 힘썼다. 이 동상은 그를 기리기 위해 학교법인 동래학원에서 1988년에 세운 것이다.

그 동상을 뒤로 가 계단 몇 걸음을 올라가 일신관이 보이게 또 한 장 찍었다. 하늘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고, 건축도 정말 멋있었다.

그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가운데 나무 한그루가 균형을 잘 맞춰주고 있는 듯 했다.
이렇게 부산에서 최초로 3.1운동을 펼쳤던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으로 부산의 독립운동의 불씨를 일깨운 이들의 뜻은 지금까지도 전해져 많은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 그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으며, 지금의 동래학원 소속 학교들도 부산과 금정구에서 큰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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