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도로 침입하는 외적을 지켜라! 수영사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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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로 침입하는 외적을 지켜라! 수영사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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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영사적공원 주차비와 지도

수영사적공원에 차를 타고 왔다면, 주간(09:00~18:00)에 최초 30분 300원, 30분 초과후 10분마다 100원(30분마다 300원)을 내야한다는 것을 알고 가자.

수영사적공원의 지도다. 25의용단을 시작해서 여러 문화유산을 볼 수 있다.

 

2. 25의용단

가장 먼저 25의용단에 가봤다. 아래는 그 앞에 있는 안내문과 건립문의 내용이다.

25의용단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1972)

이 단은 임진왜란시 수영성에서 일본군에 저항하다 죽은 성인의 의용을 기리는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경상좌수사는 수영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은 7년 동안 약탈과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때 수영성의 수군과 성민 25명은 성문 밖에 모여 '싸우면 이겨서 살 것이오, 싸우지 않으면 망하리로다. 나라의 존망이 경각(頃刻)에 있거늘 어찌 삶을 구하여 산야로 달아날 것인가. 단 한번의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리라'하고 피로써 맹세한 후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다 죽었다고 한다. 지금 비문에 새겨진 이름에서 전사한 이들이 일반민들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25인의 의용이 드러난 것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이 지방민들의 청원에 따라 25인의 사적을 모아 <정방록(旌傍錄)>에 싣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2자를 써붙인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순조대(1800~1834)에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은 이들의 후손들에게 부역(賦役, 노동적 징용)의 의무를 면제시켜 주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1853년(철종 4년)에는 경상좌수사 장인식(張寅植)이 수영공원에 비를 세워 의용단이라 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일 말정일(末丁日, 마지막 정일) 두 차례에 걸쳐 제향을 봉행하였다. 그 때 제주(祭主)는 경상좌수사가 맡았다.
1894년 군제개혁으로 경상좌수영이 폐지되자, 수영면의 면장이 제사를 주관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 면장이 부임한 이후에 수영기로회(水營耆老會)에서 주관하였으며, 1977년부터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와 수영향우회에서 주제(主祭)한다. 현재는 음력 9월 말정일에만 제향을 봉행한다.
25의용사 건립문

이곳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7년간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울 때 우리고장 수영을 지키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쳐 향토[비문에는 '항토'라고 적혀 있음]를 수호한 25의사의 충혼을 모신 곳입니다.
1853년(철종 4년) 경상좌수사 장인식에 의해 처음 이곳(수영공원)에 의용단비를 세운 후 해마다 봄, 가을 2회 길일을 정하여 제향을 모셔왔습니다.
1955년 수영구 개청과 더불어 수영구민들은 25의사의 행적에 비하여 의용단의 규모와 시설이 너무나 왜소한 점을 안타까이 여겨 수영역사 찾기 일환으로 의사의 충절을 드높이는 정화사업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새천년을 맞아 정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25의사의 위패를 새로이 제작하고 이를 모시는 사당(義勇祠 - 의용사)과 내삼문(永懷門 - 영회문), 외삼문(存誠門 - 존성문), 관리사(典祀堂 - 전사당)를 건립하는 등 의사 사후 400여년만에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전개하여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앞으로 이곳은 수영구민의 표상으로서 부산 시민의 역사 도장으로서 의사들의 업적이 만대에 길이 남아 나라사랑 정신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제단(祭壇)으로 들어가는 첫번째 3개의 문인 외삼문(外三門)인 존성문(存誠門)이다. 희생하신 그들의 정성()을 알고(存) 치하하고 위로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외삼문으로 들어가면, 저 안쪽에 직접 모신 본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內三門)이 보이며, 그 좌측에는 관리사인 전사당(典祀堂)이 있다.

여기는 25의용단을 관리하는 전사당(典祀堂)이다.

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내삼문(內三門) 영회문(永懷門)이다. 영회(永懷)는 오래오래 생각함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수영지역에서 목숨 걸고 희생했던 25명을 영원히 마음 속에 품겠다는 다짐을 나타낸다.

본전에 들어서면 양쪽에 25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고, 가운데는 의용사(義勇祠)라는 사당이 있다.

사당 의용사(義勇祠)도 한 컷 찍어봤다.

의용사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12인의 이름을 새긴 비석과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가 세워져 있다.

의용제인비(義勇諸人碑)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이 잘 다스려지면 공(公)도 되고, 경(卿)도 되지만 세상이 어지러우면 뱀이나 돼지, 경(獍)이나 올빼미처럼 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다."라고 하였다. 임진년(1592년) 섬나라 오랑캐의 난리에 동래부가 처음 적의 예봉(銳鋒, 날카로운 칼날)을 받아 부(府)와 진(鎭)이 차례로 함락되었으니 절의(節義)로 순절(殉節)한 사람들은 역사책에 실려져 있어 해나 별처럼 뚜렷하다. 오직 이곳 수영(水營)의 장수는 싸움터에서 죽지 않았으니 적병의 협박에 따라 그 명령을 듣도 오랑캐 옷을 입고 오랑캐 말을 하게 된 것도 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 중에 충성을 떨쳐서 죽었더라도 잊혀져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난리가 끝난 지 17년 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공이 부사로 와서 백성들의 탄원서에 따라 25인의 행적과 7년 동안 육지와 바다에서의 전투 행적을 탐문하고 의용 두 글자를 여러 집의 대문에 걸게 하며 <정방록(旌傍錄)>에 먼저 기록하였다. 이 때는 살아남은 사람이 몇 사람 있었으니 반드시 상세하게 조사했을 것이다. 그 뒤 오한원(吳翰源)공이 부역을 면제 해줌으로서 포상하고 글을 지어 표창하였다. 무릇 충의라는 것은 사람이 천지로부터 다 함께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25명은 먼 변방의 군교(軍校)로서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서하였고, 장수가 퇴진하여 버린 것을 분개하면서도 몸을 돌보지 않고 비분강개하여 종군하고, 금석과 같이 굳센 한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적과 싸워 적의 칼날 아래 죽기도 하고 길에서 새 장수를 맞아 들이기도 하였으니, 그 공로는 쌓이고 드러났으며 의기와 충렬(忠烈)은 늠름하였다. 거센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이것을 일컫는 말이다. 지난 해 봄에 능력도 없는 내가 이 진영을 맡게 되자 먼저 충신과 효자를 방문하다 처음으로 <정방록>을 보고 의용(義勇) 여러 사람이 있었음을 알고 마음속으로 놀라며 "두 분이 충의와 용맹을 포상한 것에는 더 이상의 유감이 없지만, 두 분이 남긴 뜻에는 오늘을 기다린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맡을 자는 내가 아닐까?"라고 했다. 이에 땅을 골라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이름을 새기고 재실(齋室)을 만들어 봄가을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아! 수영은 나라의 목에 해당되는 남쪽 요새이고 경상좌도의 요충지이다. 단을 쌓아 제사 지내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는 것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어 뒷사람에게 권장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다만 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 경비는 돕는 사람이 많아서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지 않았으며 제사에도 관가에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제단의 돌에 글을 새겨 교화시키는 비석을 세우고 여기에 시를 덧붙인다.

의용(義勇)의단을 쌓고, 스물 다섯 개의 비석을 세운다.
동악(東岳) 이공(李公, 이안눌)을 사모하고, 부사(府使) 오공(吳公, 오한원)에게 감사드리네.
장산(萇山)의 양지이고, 영해(英海)의 물가로다. 
비로소 제수를 올리니, 굳굳한 혼백 의지하리라.
<충렬지(忠烈志, 충렬사지)>를 본받아, <정방록(旌傍錄)>을 지었으니.
높은 산 깊은 물처럼,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숭정(崇禎, 1628~1644) 기원 후 4번째 계축년(1853년) 4월 일
통정대부 전승지 완산 이형하 전
감동관 첨정 백채현

1853년(철종 4년), 경상좌수사 장인식(張寅植)이 수영공원에 비를 세워 의용단이라 하고, 매년 음력 3월과 9일 말정일(末丁日, 마지막 정일) 두 차례에 걸쳐 제향을 봉행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이 제단을 세우면서 의용제인비라는 비석을 같이 세워 이 제단이 세워지게 된 경위와 제단을 세우며 느낀 것, 헌시를 돌에 새겨 세웠다.

우측부터 정인강(鄭仁疆), 최송업(崔松嶪), 최수만(崔守萬),&nbsp;박지수(朴枝樹)
우측부터 김팽량(金彭良), 박응복(朴應福), 심남(沈男), 이은춘(李銀春)
우측부터&nbsp;정수원(鄭壽元), 박림(朴林), 이수(李壽), 신복(辛福)

의용사를 기준으로 우측에는 13인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좌측부터 출신(出身) 김옥계(金玉戒), 이희복(李希福), 최한련(崔汗連), 최한손(崔汗孫)
좌측부터&nbsp;최막내(崔莫乃), 최말량(崔唜良), 김달망(金達亡), 김덕봉(金德奉)
좌측부터&nbsp;이실정(李實貞), 김허롱(金許弄), 주난금(朱難金), 김종수(金從守), 김진옥(金進玉)

 

3. 독신묘와 수영산신당

독신묘(纛神廟)와 수영산신당(水營山神堂)

위치 : 수영동 363
건축년월 : 2017. 9월(착공), 2018.2월(준공)
구성 : 독신묘(우측 건축물), 수영산신당(좌측 건축물)
사당의 유래
 : 이곳은 1922년 3월에 건립된 '조씨할배당' 이라는 산신당이 있던 부지였다. 그런데 "조씨할배당이 수영동 233번지에 있던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과 성격이 흡사하여 같은 신당에 산신을 모심이 적합하고, 종래 독신묘(경상좌수영이라는 병영의 군기(軍旗)를 모시는 신당)는 독립하여 또 다른 신당에 모심이 적합하다."라는 문화재전문위원의 의견에 따라 독립된 두 개의 사당 신축을 2017년 9월에 착공하여 2018년 2월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지역주민의 의견에 따라 두개의 건축물을 각각 '독신묘와 수영산신당'이라 정하였다.

2018. 2. 8.
수영구

좌측엔 수영산신당(水營山神堂)이, 우측엔 독신묘(纛神廟)가 서있다. 크기는 우측의 독신묘가 조금 더 크다.

조씨할배당(주산할배당) 시절 모습 (출처 :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원래는 이렇게 조씨할배(주산할배)만 모시는 조씨할배당(주산할배당)이었으나, 송씨할매당의 송씨할배와 합사하여 수영산신당을 만들었고, 그 오른편엔 독신(纛神)을 모신 독신묘(纛神廟)를 세웠다.

좌측의 수영산신당(水營山神堂)에는 조씨할배와 송씨할매가 모셔져 있다.

우측의 독신묘(纛神廟)에는 군대의 의장용 독기(纛旗)에 모신 전쟁신 독신(纛神)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 두 곳은 지금은 당산신이 되어 마을과 가정, 지역 국방의 안녕을 기리는 사당으로 변하게 되었다.

 

4. 일제(一濟) 최한복 선생 수영팔경 가사비

일제 최한복 선생 수영팔경 가사비 앞면 일제 최한복 선생 수영팔경 가사비 뒷면
수영팔공 서사
(水營八景 序詞)

기구(崎嶇)한 세상사는 부운에 부쳐두고
호수서풍(晧首西風) 남래객(南來客)이
수북산남(水北山南) 지진두(地盡頭)에
일준주(一樽酒) 일표자(一瓢子)로
첨이대상(覘夷臺上) 높이 앉아
현해탄(玄海灘)을 바라보니
불편한 강성(江聲)이요 호호(浩浩)한 창해로다
경개(景槪)도 좋거니와 수영팔경 기관(寄觀)이다.


<수영유사에서>
일제 최한복 선생 수영팔경 가사비

최한복은 수영출신으로 1895년에 나서 1968년에 세상을 뜨셨다.
선생은 서울 보성학교를 졸업하도 평생토록 고향 수영을 사랑하며 한결같이 교육자로서 애국지사의 길을 걸어왔다. 그 동안 공민학교를 만들어 불우한 학생들을 모아 주경야독하면서 그들에게 민족정신과 고향사랑하기 교육을 시켜왔다.
선생은 평생토록 두루마기를 입고 생활하면서 겉으로는 낭인같이 행세를 했으나 정작 안으로는 불같은 애국심이 끓어 왜경의 눈을 피해가면서 민족의 2세들에게는 나라와 겨레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때로는 '요 주의인물'로 낙인 찍혀 행동이 제한되어 있었으나 더욱 태연하게 생활하면서 언제나 두루마기 자락에는 '수영유사', '수영팔경' 등의 원고가 감추어져 있었다.
수영유사 가운데는 수영야유와 수영팔경도 들어있는데 이것은 선생의 필생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마당놀이로 행해지고 있는 중요무형문화제 제43호 수영야유대본이 선생의 손길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수영팔경가사는 부산같은 문화의 볼모지에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수영 팔경은 1. 운대귀범, 2. 봉대월출, 3. 진두어화  4. 남양낙안, 5. 장산낙조, 6. 백산만취, 7. 재송직화, 8. 연산모종 인데 서사가 하나 앞에 붙어 아홉 개로 되어 있다.
한 인간의 발자취가 아무리 위대했다 할지라도 흐르는 세월에 묻혀 발굴하고 가꾸지 않으면 쉬이 사라지는 법이다. 그래서 최한복의 사적을 <부산을 빛낸 인물 - 20세기편>에 실으면서 그 자취를 돌에 새겨 영원히 기리고자 한다.
2004년 11월 20일

세운이 : 토향회
글지은이 : 일제최한복수영가사비건립추진위원장 문학박사 김무조
글쓴이 : 일제최한복수영가사비건립추진위원회 자문위원 허경두

1940년대 초 초량 산리학원 재직 당시의 최한복 선생(좌측). 우측의 인물은 누군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처 : 부산일보)

수영에서 태어나 일제의 감시 속에도 불구하고 수영야류(水營野遊)를 정리하거나 <수영유사(水營遺史)>와 <선생안(先生案)> 등을 집필하는 등 수영의 역사와 민속자료를 수집, 발굴하는데 힘썼으며, 한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냈던 부산 출신의 향토 사학자였다.

 

5. 야외놀이마당과 수영사적원

야외놀이마당

야외놀이마당에선 수영야류와 같은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수영사적원(수영역사문화전시관)

그 앞에 있는 수영역사문화전시관에서는 수영구의 역사와 문화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6. 수영민속예능전승비와 정대윤 공덕비

수영역사문화전시관 바로 남쪽에는 2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수영민속예능전승비 뒷면
비음기(碑陰記, 비의 뒷면에 새긴 기록)

유서깊은 내고향 수영의 후예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선인들의 슬기와 노력으로 이룩한 전통문화를 이어왔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일시 중단되었던 민속예능을 광복 후 주민들과 사계 학자의 노력으로 복원하여  다시 후손들에게 물려줄 기틀을 마련하였다. 중요문화재 수영야류가 서기 1971년 2월 26일 제43호로, 좌수영어방놀이는 1978년 5월 7일 제62호로, 또 수영능청놀이는 1972년 10월 20일 부산지방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현재의 예능보유자인 야류의 윤수만(尹守萬), 김달봉(金達鳳),  조복준(趙福俊),  김용태(金容泰), 태덕수(太德守), 조덕칠(趙德七), 이도석(李道錫), 어방놀이의 박등무(朴藤茂), 이성기(李聖基), 김우근(金又根), 농청놀이의 도태일(都泰一), 윤문순(尹文順), 손기주(孫基柱), 김기태(金基泰), 이성옥(李成玉)과 함께 내고장 전통예능의 발굴과 연희로써 이 땅을 빛내고 타계하신 선배 최한복(崔漢福), 조두영(趙斗榮),  정시덕(鄭時德), 조재준(趙在俊),  태명준(太命俊),  김귀수(金貴秀), 노영규(盧泳奎), 조덕주(趙德周), 한만식(韓萬植), 김봉태(金奉泰), 박남수(朴南水), 태말준(太末俊), 이야분(李也粉), 제씨(여러분)의 명복을 빌면서 수영의 후진들은 이 빛나는 향토예능을 자손만대에 전승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전승비를 세우는 바이다.


서기 1991년 9월 일

글은 강용권(康龍權)이 짓고 류필현(柳弼鉉)이 쓰고 이병익(李柄翼)이 새기고 이사장 김종철(金鍾喆)이 추진하였음

1991년 9월,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제9대 이사장이었던 김종철(金鍾喆)이 수영민속예능을 재발굴하고 이어온 문화적 선배들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 

정대윤 공덕비 뒷면
우리 고장의 전통민속예술을 헌신적인 노력으로 발굴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 수영선인(水營先人)들의 삶의 역사를 전통예술로 보존 옛얼과 슬기를 계승하고 있기에 이곳에 고(故) 정대윤(鄭大允, 1924~1978)의 공덕비를 세웠다.
서기 2000년 10월 1일
이 글은 태덕수(太德守)가 짓고 쓰다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이사장 태덕수(太德守) 외 회원 일동

정대윤(鄭大允, 1924~1978)은 좌수영어방놀이의 기능 보유자였다. 그는 그 업적을 인정받아 1972년 2월부터 1974년 10월까지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제2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는 등 많은 수영의 전통문화 보급에 힘썼다. 2000년 10월 1일,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예능보유자이자 제11대 이사장이었던 태덕수와 당시 회원 일동이 이 비를 세웠다.

 

7. 경상좌수영성 남문

길을 따라 둘러오면 경상좌수영성 남문이 보인다.

경상좌수영성 남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7호 (1972. 6. 26. 지정)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조선시대에 동남해안을 방어했던 수군을 지휘하는 본부인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성(慶尙左道 水軍節道使營城)'의 남문으로 아치형 석문(石門)이다.

 이 남문은 숙종 18년(1692)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 자리에서 약 200m쯤 떨어진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수영동에 있는 옛 수영초등학교 교문으로 이용되었고 1962년 6월에 수영초등학교가 광안동으로 이전한 후 그곳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대 말 현재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경상좌수영성 남문은 현재 앞뒤에 홍예(虹霓, 성문 등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은 것)와 홍예기석홍예기석(虹霓基石, 홍예석을 쌓기 위해 가장자리에 기둥처럼 놓은 돌)이 남아 있다. 또한 좌우 10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으며 전면 홍예기석 앞에는 같은 크기의 사각형 돌기둥 위에 ‘박견(拍犬)’이라는 조선 개 한 쌍이 양쪽에 나란히 서있다.

조선개 '박견'을 성문 앞에 둔 것으로 보아 경상좌수영성은 왜구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의 돌조각상이 성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하다.

이 문 오른쪽 옆에는 '수령(지방관) 이하 모든 자는 말에서 내려 들어가'고 적힌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이 문은 <좌수영지(左水營誌)>에 따르면 경상좌수영성에 있던 4개의 문(북문, 남문, 동문, 서문) 중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으며, 문 바로 앞 기둥 위에 서 있는 2마리의 박견(拍犬)과 무지개 모양으로 쌓은 홍예문도 그 위엄과 조화로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8. (구)수영고당

경상좌수영성 남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아래와 같은 풍경이 펼쳐지며 안내판이 붙어 있다.

(구)수영고당(水營姑堂)의 이전

현재의 사각형 부지는 2017년 9월까지 수영고당이 있었던 부지였다.

수영고당의 창건은 400여년 전(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정되며 일제 때 왜병에게 항거한 송씨할매의 정신을 기리는 '송씨할매당'이라는 산신당(山神堂)과 경상좌수영이라는 병영의 군기를 모신 '독신묘(纛神廟)'가 함께 하나의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건축물의 위치가 관련 문헌상 일치하지 않고 건축물의 건축양식이 한국 전통가옥의 양식에 벗어난다는 문화재전문위원의 의견에 따라, 현재의 위치에서 25의용사 뒤 '수영동 363번지'에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오른쪽의 비석은, 오래된 수영고당을 1981년에 증수하였던 애향인 김기배(金己培)씨의 공덕과 2003년에 개수(改修)하였던 그의 아들 김종수(金鐘秀)씨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현재의 상태로 유지하기로 하였다.

안내문에 적혀진 증수 기념비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수영고당(水營姑堂/水營古堂)의 유래

임진왜란 선조 25년(서기 1592년) 이전이니 창건은 역사상으로 볼 때 400년 정도로 추측되며 당시 수영성민(水營城民)은 성내 수호신으로 토지지신(土地之神)과 둑신(纛神)을 병사(並祀, 나란히 제사지냄)하였다.
장구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약(約) 20년전 애향인 김기배(金己培)씨에 의하여 중수(重修)하였으나 다시 부패되었음로 1981년 4월, 김기배씨 자진 신축에 착수하여 6월 완공을 보게된 것이다.

 

이 (구)수영고당터에는 의숙공 최강 유적비도 남아 있다.

앞면
선무원종일등공신가선대부행경상좌도수군절도사겸오위도총부부총관
(宣武原從一等功臣嘉善大夫行慶尙左道水軍節度使兼五衛都摠府副摠管)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訓練院事)
의숙공최강유적비
(諡義肅公崔堈遺蹟碑)
비의 정면 기준 좌측면
공(公, 의숙공)의 휘(諱)는 강(堈), 자(字)는 여견(汝堅), 호(號)는 소계(蘇溪), 성(姓)은 최씨(崔氏), 관(貫, 관향)은 전주(全州)이다. 고려(高麗) 문하시중(門下侍中) 시(諡) 문성공(文成公) 휘(諱) 아지(阿之)의 후손이오, 그리고 명묘(明廟) 14년 기미생(1559년)이시다. 하늘에서 영준(英俊)함을 타고났고, 집안에는 충료(忠孝)가 전해졌더라. 뛰어난 용략(勇略)이요 호협(豪爽)한 형모(形貌, 외형)라 어려서 비로소 배움을 알아서 예(藝)에서 놀며 경(經)에 밝았더라. 자라서는 병가(兵)를 봤어서 공명에 뜻을 두었느니라 붓은 반고(班, 班固)처럼 던지고 활솜씨는 양유기(養, 養由基)처럼 과녁을 꿰뚫었다. 이어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기절(氣節)이 더욱 굳건해졌다. 뜻밖에 오랑캐(蠻夷)들이 침략을 하여(匪茹孔棘), 형과 아우가 동심동력(同心同力)으로 충성심을 떨쳐 적에게 대항하여 의병을 모집했다. 그러자 호랑이를 누를만한 인사들()이 그림자처럼 붙어 향응(響應)하니, 앞장서서 칼날을 물어(군대를 일으켜) 한 번 움직여 크게 이겼다. 진양(晋陽, 진주)성이 함락되는 것을 구하고
비의 뒷면
웅천(熊川)의 포위를 궤멸시켰으며, 저들의 두목을 다 죽이고 세 성(城)을 수복했다. 조정의 논의가 "가상하다()"고 하니 그 공을 다툴만한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오위도총부(摠, 五衛都摠府)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가 가리포진첨절제사(加里浦鎭僉節制使)로 옮겨갔고, 왕명이 계속 이어져 단계를 뛰어 넘어 승진하였다. "절도사를 두 번 거쳐 부총관(副摠管)에 올랐는데, 충성을 다 바치니 당시에 명망 이 자자하였고, 순조(純祖)께서 공로를 기려 높은 관직을 추증하고 지금 우리 임 금께서도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주셨으니, 한 때의 영광이요 백 대(代)를 권면함 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문헌공(文憲公)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지은 것이다. "칠 년 동안의 전쟁 속에서도 마침내 중흥을 이룬 공렬(功烈)은 또한 오로지 여러 도(道)에서 의병을 창의(倡義)했던 힘 덕택이다. 이러한 때에 소계(蘇溪) 최공이 바 로 그 중의 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의정부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이 지은 것이다. 대개 공의 위대한 공훈과 커다란 공렬은 <국조기사(國朝記事)>와 <명장록(名將錄)> <중흥지(中興誌)>와 여러 선현들의 추앙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 을 것이다. 이 곳 부산시 남구 수영동은 바로 선무(宣武) 39년에 수군절도사로 소개공이 임 명받았던 곳이다. 비록 백 대가 지나더라도, 뒤에 태어난 후손들은 아직도 지난 새 벽일인 듯 서글픈 감회가 있을 것이다. 근자에 불초(不肖) 정온(正蘊)이 집안의 여 러 사람과 여러 해 동안 상의하여 선생의 유적을 기릴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사 업은 크고 힘은 모자라서 거의 인멸되어 전해지지 않으려다가, 다행히도 집안의 의 론이 하나로 모아져서 정성을 다하여 모금하여 돌을 캐어 비석을 세운다. 아! 이러 한 일이란 기다리는 때가 있고 시기도 기약함이 있다. 하물며 또 멀고 가까운 선비 들이 서로 불러모아서 이렇게 정중하게 추모하니, 정렬(貞烈)과 충성, 대의(大義)가 사람들에게 깊이 파고드는 것이 있도다. 후세 사람들이 보고 느끼며 흥기(興起)함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비의 정면 기준 우측면
단기 4318년(서기 1984년) 세을축(歲乙丑) 정월 일

주손(冑孫) 연웅(然雄)
후손(後孫) 감역(監役) 상호(尙鎬)
종후손(從後孫) 원호(元鎬)
유림(儒林) 양명환(梁命煥) 이흥준(李興俊) 박재숙(朴載淑)

1585년 무과에 급제한 최강 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崔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1605년,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56세로 죽었다.

사망 후 몇 백 년 뒤, 1816년 형 최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현재도 그의 전투적 업적을 기리는 비석이 진주에 있다.

이 모든 비석과 터를 둘러보고 위로 올라오면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8.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

천연기념물 제270호 (1982. 11. 9. 지정)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은 높이 23.6m, 둘레 4.50m로 소나뭇과에 해당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던 당시 나이 400년 정도로 추정되었다. 소나무의 겨울눈(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생겨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에 자라는 싹)은 대개 붉은 색을 띠는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닌 곰솔은 바닷가를 따라 자기 때문에 '해송(海松)'으로도 부르며,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黑松, 곰솔)'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곳 수영구에는 경상좌도(慶尙左道, 조선시대에 경상도 지방을 동서로 나누었을 때 동부지역에 속하는 행정구역) 수군절도사영성(水軍節道使營城, 수군(조선시대에 바다에서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던 군대)절도사가 관리,감독하던 군영)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 당시 이곳의 군사들은, 이 나무를 군영을 보호해주는 신성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나무에게 자신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부산 좌수영성지 곰솔은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로 민속적, 문화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높이 23.6m의 큰 곰솔(흑송)의 모습이다. 1.0배율로 찍을 때 그 모습을 전부 담지 못해 0.6배율로 겨우겨우 가지 끝부분을 제외한 모습을 다 담을 수 있었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크기도 엄청 컸으며, 그 만큼 더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9.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잎이 무성한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출처 : (사)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

천연기념물 제311호 (1982. 11. 9. 지정)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던 당시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었다. 높이 18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8.5m, 가지퍼짐은 동서로 23m로, 마치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띈다. 이 나무는 팽나무와 비슷하여 곳에 따라서는 개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나무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신성한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이 나무를, 마을을 보호해주는 신으로 여긴다.

부산 좌수영성지 푸조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으며, 나무로 민속적,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푸조나무의 뒷모습. 노을까지 합쳐져 잎은 없지만 웅장하고 무겁고 풍요로운 느낌을 주는 듯 하다.

 

 

10. 안용복장군 사당(수강사)

안용복 장군 사당

안용복 장군은 조선 숙종때(1675~1720) 동래출신(현 수영구 수영동 부근) 어민으로,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의 수군(水軍)인 능로군(能櫓軍, 양인과 천민이 섞인 군부대)이었다.

당시 왜인들이 우리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를 죽도(竹島, 타케시마)라 부르면서 자주 침범하자, 동료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다.

그는 울릉도와 독도 수호에 큰 업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란 칭호를 받으신 분이다.

장군의 업적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고자 부산 시민의 뜻을 모아 이곳에 사당과 동상을 건립하였으며, 1967년 건립된 수영공원 정상의 충혼탑을 이전하여 새로이 단장하였다.

2001.3.26.
부산광역시장

안용복장군 사당이라고도 알려진 수강사(守疆祠)의 입구다.

한 층 올라가면 본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정면으로 수강사(守疆祠)가 그 양 옆으로 안용복장군 동상과 안용복장군 충혼탑이 있다.

안용복 장군을 모신 변방(疆)을 지킨(守) 분을 모신 사당(祠)이라는 뜻의 수강사(守疆祠)

안용복 장군 동상 건립문

여기 우리는 조선시대 국토수호에 앞장선 안용복(安龍福) 장군의 동상을 정중히 모신다.
장군은 조선 숙종시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수군으로 당시 왜인들이 우리의 영토인 울릉도와 독도를 자주 침범하자 수차례에 걸쳐 그들과 맞서 싸웠으며 동료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 우리의 영토를 수호한 분이다.
일본이 아직까지 독도가 그들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망언을 늘어놓는 현실에서 우리는 이 동상 앞에서 장군의 정신과 업적으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주고자 한다.

서기 2001년 3월 1일
발의 부산광역시 수영구
주관 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
글씨 이태길 조각 곽순곤

이 안용복 장군 동상 뒷편에는 이렇게 안용복 장군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과 일본에 도착해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인시키고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뒤로 돌면 안용복 장군 충혼탑이 있다.

안용복 장군 충혼탑 뒷면
슬프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매양 숨겨진 속에 큰 인물이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니, 저 동래 사람 안용복 님이 바로 그 한 분이시다. 그는 본시 수영 군졸로 조선 숙종 19년 계유 1693년 여름 울릉도에 표착하여 국경을 넘어온 왜들과 싸운 끝에 강제로 끌려가 오랑도(五浪島)로 백기주(伯耆州, 호키 주)로 다니면서도 끝까지 항쟁하여 일본이 울릉도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에도(江戶) 관백(関伯)의 서약서를 받아 쥐었으나 대마도에 이르러 도로 빼았기고 50일 동안 구류까지 당한 뒤에 동래왜관(東萊倭館)으로 와서 또 40일을 갇혔다가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던 바, 부사 또한 월경하였다 하여 도리어 형벌을 가하는 것이었다. 비분한 속에 2년이 지난 을해년(1695년) 여름 그는 흥해(興海) 사람 유일부(劉日夫), 낙안(樂安) 사람 김성길(金成吉), 영해(寧海) 사람 유봉석(劉奉石), 연안(延安) 사람 김순립(金順立), 평산포(平山浦) 사람 이인성(李仁成), 순천(順天) 승(僧, 중) 뇌헌(雷憲), 승담(勝淡), 연습(連習), 영률(靈律), 단책(丹責) 등 열사람의 동지를 데리고 다시 울릉도를 찾아가 도적질 하는 왜선을 추격하여 백기주(伯耆州)에 이르러 스스로 울릉도수포장(鬱陵島捜捕將)이라 일컫고 대마도주의 야심과 죄상을 추궁하여 마침내 다시는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 받은 뒤에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든바 감사(監司) 심평(深枰)은 도리어 그들을 묶어 서울로 올려 보냈고 조정에는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려 했는대 윤지완(尹趾完), 남구만(南九萬) 등 원로대신의 변호로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만 갔던 것이다. 여기 그의 행적을 대강 적고 다시 헤아리매 저 섬이 오늘 우리 판도 속에 들어 있음은 오직 그의 은공이다. 남쪽 선비들이 찬양회를 결성하고 겨레의 이름으로 울릉군(鬱陵君)을 봉한다함은 진실로 느꺼운 일이다. 그를 위하여 한 덩이 돌을 세움에 미쳐 내 이제 노래를 붙이오니

동해(東海) 구름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 님 혼자 애쓰던가
상이야 못 드릴망정 형벌 귀양 어인 말고
이름이 숨겨지다 공로조차 묻히리까
이제 와 울릉군(鬱陵君) 봉하오니 웃고 받으옵소서

서기 1967년 7월 일
이은상 지음
오제봉 글씀
안재구 시씀

 

충혼탑의 뒤에는 '안용복 장군 수영 충혼탑 및 울릉도 충혼비 건립 위원 조금 방명록'이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안용복 장군 충혼탑과 충혼비를 세우는데 금전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의 명단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11. 수사선정비

수영사적공원에서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올라오면 이렇게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등을 바로 뒤로 돌리면 여러 비석들이 나온다.

좌수영에 복무했던 수사(水使, 수군절도사)와 수상(水相, 수군통제사), 우후(虞候) 중 33명에 대한 기념비가 한 자리에 모여져 있다. 원래 여러 곳에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에 그들이 과거에 복무했던 좌수영지에 한데 모아 이렇게 기념하고 있다. 그 자세한 경위는 아래 <선정비 이전 건립문>에 적혀 있다.

선정비 이전 건립문

소재지 :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동 229-1(수영공원)

여기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옛터입니다.

좌수영의 총사령관인 수군절도사는 정3품 무관으로서 통칭 수사(水使)라 하였으며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에 이르기까지 해안방어를 수행하였습니다.

여기 33기의 비석은 조선시대 인조 17년(1639)부터 고종 27년(1890) 사이에 수군절도사와 부관인 우후(虞候)의 재임 중 공덕을 칭송하는 선정비이며 좌수영성지 정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수영성 남문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에 모아 재임연도 순으로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2002년 2월

 

 

12. 수영사적공원을 나오면서

수영사적공원을 나오면서 조선 수군과 백성들의 이야기와 문화 예능을 이어가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게릴라 전술로 맞서 싸웠던 25명의 백성들, 무지개 모양으로 예술적으로 지어진 좌수영성 남문을 들락거렸을 여러 사람들, 수군통제사, 수군절도사의 위치에서 많은 공덕을 쌓은 정치인들, 수군이지만 평민으로서 독도의 주권을 일본에 톡톡히 확인시킨 사람(안용복), 진주에서 전공을 세워 여기 수영성에까지 오게 된 장군, 마을과 사람들을 지키고 전투에 힘을 실어줬다고 믿어진 큰 나무들과 사당들, 수영의 전통 문화 놀이와 문학을 지키고 계승한 다양한 향토 사학자들과 문학가들의 자취. 그 모든 것이 이 작은 수영사적공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양한 재료들로 전해 듣는 이 것이 바로 역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수영사적공원을 빠져나와 옆에 있는 수영강 동원로얄듀크 아파트쪽을 옆으로 끼고 돌아가는 25의용단길을 거닐다보면  25의용단 멤버들의 모형이 나온다.

 

이렇게 많은 수군과 일반 백성들이 7년간 유격전을 벌인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가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이런 안내판이 나왔다. 이 안내판에서 가장 가까웠던 비콘그라운드 쪽으로 가기로 해 더 앞으로 나아갔다.

지도를 따라 가다보면 이런 곳이 나타난다. 비콘 그라운드(B-Con ground)는 부산광역시에서 수영고가도로 하부 유휴공간을 재생시킨 공간으로, 고가도로로 인하여 양분되어 낙후된 지역을 연결하고 부족한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 복합-생활-문화 공간이다. 여기선 다양한 클래스나 기획 전시에 참가할 수 있으며, 맛있는 음식도 맛볼 수 있다.

비콘그라운드 안내판이다. 바로 이 길을 건너면 수영고가도로 아래의 다양한 복합생활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비콘그라운드가 나온다. 그 외 볼거리도 소개해줬는데, 인근의 이 글에서 소개했던 좌수영수영사적공원(좌수영성), 좌수영 장의 전통을 이어온 수영팔도시장, 타이어로프 폐공장을 활용한 사람문화 중심의 북합문화공간으로 만든 F1963이 있다고 안내해주고 있다.

비콘그라운드의 북쪽길이다.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문화 공간 소개를 하러 방문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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