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3681. 동래읍성 인생문
유락여자중학교에서 동래중학교와 명륜초등학교를 지나 동래고등학교까지 이어져 충렬대로의 복잡함을 조금 덜어주는 동래로. 동래로에서 동래고까지 가지 않고 동래복천동 고분군쪽으로 빠지면 인생문고개 옆의 동래읍성 인생문이 보인다.
동래읍성도서관 동쪽에 위치한 인생문.
저 멀리 인생문(人生門)이라고 적힌 글귀가 보인다. 이 인생문 위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있으나 너무 위험하고 경사가 급해 현재는 막아두었다.
인생문 인생문은 1735년(영조 11)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지금의 칠산동에서 명장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운 동래읍성 인화문(人和門)의 이름이 19세기쯤에 바뀌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읍성(東萊邑城)은 동래의 관청 건물을 에워싸던 성으로 지금의 동래에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쌓아졌고, 임진왜란 때 많이 허물어졌다. 1731년(영조 7)에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알고 이전보다 훨씬 크게 쌓았는데, 둘레가 약 3.8km, 높이가 약 5.1m였다. 동래읍성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허물어진 후 1979년부터 다시 쌓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생문은 동래읍성 성문 6개 중의 하나로써 문위에는 누각 1칸이, 문 앞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甕城)이, 문 안쪽에는 6칸의 수직소(守直所, 건물을 맡아서 지키는 곳), 성문을 지키는 군인들이 쉬며, 자는 등의 건물 등이 가각 있었으나, 2015년 9월 비가 내리던 날 주변 성벽 일부가 무너져 뜯고 쌓아질 때 뜯겨서 2018년 7월 다시 세워졌다. 인생문에 얽힌 전설 중 하나는 임진왜란 때 이 문은 없었으나, 지금의 인생문 쪽으로 피난을 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져 '사람을 살린 문'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임진왜란 때 사람을 살렸다는 전설이 내려오곤 있지만, 아마 이는 민간 어원일 가능성이 높다. 이 문 자체도 조선 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 문은 꽤 크고, 조선 후기 많은 사람들이 성 안팎을 나다닐 수 있게 도와줬을 것이다.
인생문의 오른쪽 문을 지나면 바로 우측에 문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올라가면 이렇게 인생문 위를 지나면 마안산 등산로로 바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동래읍성지 인생문 동래읍성지(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는 조선시대 동래부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전 읍성의 터 1387년(고려 우왕 13) 박위가 왜구를 막기 위해 현재의 동래시장 일원에 동래읍성을 쌓은 후 임진왜란 때 많이 허물어졌으나,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이전보다 성을 훨씬 크게 쌓아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 문에 대한 전설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이 문을 통해 피난 간 사람은 모두 목숨을 건져 '사람을 살린 문'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있다. |
여기서 동장대방면으로 걸어가보면 이런 안내판도 볼 수 있다.
그 올라간 곳에서 찍은 인생문. 경치를 찍진 못했지만, 볼만한 경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긴 동래사적공원에 산책을 오거나, 복천박물관을 관람하러 온 경우 잠깐 시간을 내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
2. 박춘흥 처 월성 박씨 정려비
현재의 복천동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복천로. 오래전에 이 지역에 복천(福泉)이라는 우물이 있었던 데에서 그 지명이 유래했다. 이 복천동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등산로 겸 동래사적공원 입구가 나온다.
바로 동래읍성도서관, 명장초등학교쪽의 복천로에서 올라가는 동래사적공원 입구쪽에 인생문과 열녀 월성 박씨의 려 비석이 있다.
우측에 '동래사적공원'이라고 적힌 비석이 보인다. 이곳은 원래 마안산이라는 산인데, 지금은 동래사적공원 혹은 동래읍성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공원 혹은 등산로 입구의 우측에 1m 정도 되는 작은 비석이 하나 있다.
비문 앞면 |
한량(閑良) 밀성(密城) 박춘식처(朴春興妻) 월성 박씨(月城朴氏)의 여(閭) |
이 정려비는 비문 앞면에만 기록이 있다. 월성 박씨의 남편 밀성 박씨 박춘식은 한량(무과 합격자)였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왜 월성 박씨가 정려비를 하사받게 되었는지 확인할 순 없었다. 한편 월성 박씨라는 성씨 자체는 조선 후기 동래 지역에 세거하던 향반 가문으로 꽤 평판 높은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가문의 여자와 결혼했던 박춘식은 분명 꽤 명문가 집안일 가능성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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