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장씨대동보 권1 기축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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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대동보 권1 기축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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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대동보(仁同張氏大同譜)> 권1(卷之一) <기축보서(己丑譜序)>의 <옥산장씨족보서(玉山張氏族譜序)>의 내용을 정리해 올린다. 인동 장씨의 한 사람으로써 지금 혹은 후에 이 족보의 서문을 읽고 조상이 누군지, 족보를 쓴 이유가 뭔지,인동 장씨가 어떤 성씨인지 궁금하거나 조사해야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 해당 서문을 정리해 올린다.

<옥산장씨족보서(玉山張氏族譜序)>

 

 우리 장씨가 이 나라에서 성족 (盛族, 세력이 왕성한 족속) 이 된 것은 몇 백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세대가 이미 멀어지고 문헌도 징거(徵據 , 증거로 삼음)할 수 없어서 원초의 근원을 상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수기에 이르기를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우리 장씨가 본래 중국사람으로서 옛날에 한 장수가 있었는데 제명(帝命)을 받들고 우리나라를 정벌하러 왔다가 아들 한 분을 남겨두게 되어서 드디어 우리나라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다만 전해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지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처의 기록에는 "중국의 대광공주(大光公主)가 나올 때에 팔학사(八學士)가 모시고 왔는데 그 가운데 장학사(張學士)가 있어서 우리나라의 장씨(張氏)는 여기서 비롯되었다."

라고 하였으나 역시 확실한 기록이 아니어서 꼭 믿을 수가 없다. 그 밖에도 선배들의 전설을 수집하여 수문수록(随聞随錄, 수소문하거나 들은 것을 기록함)한 것이 세대의 차서(次序)와 자(字), 휘(諱), 관작(官爵)(字諱官爵)에 대해서 상세하고 분명하지 아ꈰ함은 아니나 그 역시 억지로 틀림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음으로 다만 마음에 의심을 갖게 되어 빙신(憑信, 믿을만한 것)할 곳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던 중 근래에 또 국승(國乘, 나라의 역사)를 열어보니,

"포음공(圃蔭公, 장길(張吉))의 휘는 길(吉)인데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인동부원군(仁同府院君)에 봉해졌고 또 노전(蘆田)에 사당을 세웠다"

고 하였는데, 노전(蘆田)은 곧 인동부(仁同府)의 남쪽 10여 리가 되는 곳이다. 이미 인동에 봉해졌고 또 인동에서 철향(腏享,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냄)을 하였으니 포음공(장길)이 인동인(仁同人)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 장씨가 옥산(玉山)으로 관향(貫鄕, 시조의 고향)을 삼게 된 것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그 신중한 도리에 있어서는 감히 꼭 그렇다고 단정(斷定)할 수 없으므로 마땅히 후일의 고정(考訂)을 기다려야 하겠다.

 우리 상장군(上將軍, 장금용(張金用)) 선조에 이르러서는 수십 세 이하로 세대와 소목(昭穆,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이 정연하게 차례가 있고 사적(事蹟)과 훈업(勳業)이 찬연(燦然)하여 전할 만하며 달관(達官, 높은 관직)과 숭품(崇品, 종1품)(관고)도 대대로 끊기지 않았고 대현과 명유가 전후에 줄을 이었는가 하면 계속되는 훤혁(煊赫, 혹은 세위(勢位))이 일세에 떨치고 빛났다. 그리고 심지어는 문장이 굉걸(宏傑, 굉장하고 웅장함)한 재사(才士)와 대소과갑(大小科甲, 대과와 소과의 과거(에서의 1등급))의 영광까지도 대대로 끊기지 아니하였으니 비록 오늘날 후손들이 선조의 위업을 실추시켜 진작하지 못함이 이 같으나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명문갑족(名門甲族)이다"라고 하니 진실로 조선(祖先)들이 쌓은 인덕을 후손에게 물려준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었겠는가. 아! 선대에서 선행에 힘쓰고 미덕을 숭상하면 후손이 경사를 누리고 복록을 받을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로서 그러함에 있었을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각자가 삶을 도모하다가 보니 바람 따라 씰리고 물결 따라 흐르게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세월이 여러 번 바뀜에 따라 봉래산(蓬萊山)과 약수(弱水)가 서로 막혀서 면목(面目)을 서로 알지 못하고 성식(聲息, 소문)은 서로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이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꽃이 어느 곳에 흩어져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되었으나 오늘날에 와서 그 세대와 항서(行序)를 어떻게 확실히 알겠는가? 다행히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께서 임진왜란 후에 기록한 것을 근거로 하여 겨우 누구의 아들이 누구인가를 알았을 뿐이다.

 이번에 족보를 만드는 날에 원근의 보단(譜單, 족보에 실을 명단)이 선후하여 옴으로서 참고하고 교정(校訂)하여 보책(譜冊, 족보책)한 질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본지(本支, 종손과 자손)의 차례가 있고 세대가 분명하여 져서 옛날에 밝히지 못하였던 것이 이제야 비로소 밝아졌고 지난날 알지 못하던 것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 어찌 우리 종족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그 가운데는 대계(代系)가 중절(中絕, 중간에 끊겨)되어 상속(相屬, 서로 속함)이 못되고 거주가 절원(絕遠, 매우 멂)해서 미처 오지 못한 이는 마침내 동보(同譜)를 할 수 없었으니 이는 사실 다행 중에 불행이다. 그러나 일후(日後, 뒷날)에 만일 믿을 만한 문적(文蹟)과 추후하여 원입자(願入者)가 있다면 어찌 변통하는 방법이 없겠는가!

 아! 제종(諸宗)은 계분(系分)에 있어서는 비록 원근의 차이가 있으나 각파의 조선(祖先)이 모두 일질(一帙)의 보책 가운데에 실려 있으니 비록 각처에 흩어져서 거처는 서로 같지 못하고 희경(喜慶)과 우조(憂吊)의 일에 대해서 혹 미치지 못하였더라도 모두가 한 할어버지의 자손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감창(感愴, 감모하는 마음이 움직여 슬픔)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뿌리로 말미암아 가지를 찾고 원천으로부터 줄기를 찾아 원근을 따지지 말고 돈후한 풍속을 더욱 돈독히 하며 존비를 헤아리지 말고 힘써 화락한 뜻을 다하여 혹 미첩(眉睫)의 실수와 서류(黍絫, 극히 적은 양)의 혐의가 있더라도 서로가 그것을 계교(計較, 서로 견주어 살핌)하지 말고 억만년에 이르도록 대대로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를 준수하여 해이(解弛)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우리 집안을 가리켜서 "인목(婣睦, 인연깊고 화목함)한 문중이다"라고 할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한 "종족을 수습하면 풍속이 후하게 된다"고 할 것이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족보를 완성한 것은 기축년(1769년)이었는데, 대개 선배의 유의(遺意, 남긴 뜻)를 따라 기왕에 못한 것을 추술(追述)한 것이다.

 

후손 첨지중추부사 지학(趾學) 85세에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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