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각 알파벳의 유래는 이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1)을 참고하세요~ |
1. 라스찌슬라프가 대모라바 왕국을 이끌다.
현대 한국에서 로스티슬라브 혹은 로스티슬라프, 라스티슬라프 등으로 알려진 라스찌슬라프(Ростислав, Ростиславъ, Rastislav, 820'~870)는 모이미리드 왕조(Mojmírovci)의 대모라바 왕국(대모라비아 왕국, Velká Morava, 833~907')의 2대 크냐지(князь, 공작, 공후)로 846년부터 870년까지 재위했다. 그의 재위 시절 키릴(Кирилл, 826~869)과 메포지(Мефодий, 815~885)가 선교를 위해 대모라바 왕국을 방문한 일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지금도 쓰이는 러시아어의 모태가 되는 글라골 문자의 발명으로 이어진다. 먼 훗날인 1994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된다.
846년, 동프랑크 왕국(Francia orientalis, 843~962)의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Ludovicus II Germanicus, 802'~876)는 원래 자신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가려던 모라비아인, 슬라브족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는데, 당시 이러한 움직임의 배후로 여겨졌던 모이미르 1세를 폐위시켜 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모이미르 1세의 조카 라스찌슬라프를 대모라바 왕국의 2대 대공으로 임명했다. 루도비쿠스 2세는 라스찌슬라프를 그의 봉신(vassal, вассал)으로 여겼고, 중유럽에 있는 동프랑크 왕국의 이익을 대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루도비쿠스 2세는 그의 사촌과의 신성로마제국의 경영권 다툼으로 대모라바 왕국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틈을 타 라스찌슬라프는 왕국을 확장하고 국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도 하에 요새가 건설되었고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과 동로마 제국(395~1453)과 동맹을 맺기까지 했다.
850년부터 라스찌슬라프는 동프랑크 왕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끊고, 루도비쿠스 2세의 적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왕의 고위 관리들도 많았고, 특히 잠깐이었지만 루도비쿠스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족 중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Karlomannus Bavariae, 820'~880), 루도비쿠스 3세 이우니오르(Ludwig III der Jüngere, 835'~882)를 데리고 있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대모라바 왕국에서 바이에른 사제를 추방하고, 다뉴브강과 타이아강 사이에 있는 그들의 땅을 합병했다(일설에 따르면 791년경에 발생).
855년, 루도비쿠스 2세가 이 사실에 분노해 대모라바 왕국을 침공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격하는 모라비아 인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히려 다뉴브강까지 쫓기는 신세를 면치 못했으며, 바이에른의 국경 지역까지 파괴되는 치욕을 맞이한다. 이후 그래도 힘이 건실했던 루도비쿠스 2세에 의해 856년에 라스찌슬라프는 왕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 자리는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에게 돌아가게 된다.
결국 858년, 라스찌슬라프는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에게 많은 금과 보물을 뇌물로 바치면서 동맹을 맺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오늘날의 헝가리의 일부 지역을 얻고 곧 합병해 버렸다.
2. 라스찌슬라프가 동로마 제국에 선교사를 요청하다. (글라골 문자의 탄생)
이렇게 확장해 나가는 와중에도 바로 옆의 동프랑크 왕국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루도비쿠스 2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과 동맹을 맺으며, 대모라바 왕국을 계속해서 위협한 것이다. 이에 라스찌슬라프는 로마로 사절단을 보내 로마 교황에게 대모라바 왕국의 사제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렇게 요청함으로써 라스찌슬라프는 대모라바 왕국에서의 동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길 바랐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그 사절단을 맞이하진 못했다.
이후 861년과 862년에 라스찌슬라프는 새로운 사절을 동로마 제국의 미하일 3세(Michael III, 840~867)에게 보내 그 나라에서 교회 통치의 기초를 놓을 선교사나 성직자 또는 주교를 요청했다. 이에 미하일 3세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라바 지역에 키릴(Кирилл, 826~869)과 메포지(Мефодий, 815~885)를 보냈다.
그들 형제의 선교 활동은 대모라바 왕국뿐 아니라 동유럽 전체의 문화 발전을 위한 근본적인 것이었는데, 특히 대모라바 왕국에서 키릴과 메포지는 지역 사람들이 문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글라골 문자(Глаголица)를 발명했다. 그들은 그 문자를 만든 후에 그리스어 성서를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슬라브인들이 읽고 쓰고, 또 슬라브어로 예배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런 상황에서 864년, 루도비쿠스 2세는 불가리아 제1제국과 함께 다시 대모라바 왕국에 침입해 데빈(Devín) 요새에서 라스찌슬라프를 포위했다.
라스찌슬라프는 억지로 동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고, 동프랑크 왕국의 사제들의 대모라바 왕국으로의 귀환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년 뒤인 865년, 라스찌슬라프는 다시 루도비쿠스 2세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키릴과 메포지의 임무는 계속되었다. 이 형제는 3년 이상 대모라바 왕국에 머물렀지만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야만이의 언어로 된 예배를 신성 모독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로마로 소환되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오히려 그 형제의 업적을 칭송해 그런 인식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867년, 동프랑크 왕국이 또 다시 공격한 이후, 라스찌슬라프는 강대국들에 대한 방어 능력을 향상시키기를 바라며 조카 스뱌토폴크 1세(Святополк I)가 다스리던 니트라 공국(Nitrianske kniežatstvo, 825'~1108)에 대한 소유권을 완전히 넘겨줬다. 이는 사실상 대모라바 왕국을 양분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라스찌슬라프의 실책이었다...
868년, 메포지와 그의 3명의 제자인 오흐리드의 고라즈드(Горазд Охридский), 오흐리드의 클리멘트(Климент Охридский), 오흐리드의 나움(Наум Охридский)은 교황에 의해 사제로 임명되었다. 869년에 로마에서 키릴은 사망했고, 이후 메포지는 대모라바 아카데미에서 교육 하기 위해 다시 대모라바 왕국으로 돌아갔다.
870년, 권력에 눈이 먼 스뱌토폴크 1세는 라스찌슬라프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고 동프랑크가 니트라 공국을 보호해주겠다는 것에 동의해버린다. 이에 분개한 라스찌슬라프가 그를 죽이고 니트라 공국을 자신에게 소속시키려 했는데, 스바토폴크 1세는 라스찌슬라프를 포로로 잡아 그를 동프랑크 왕국으로 보내버렸다. 결국 그는 재판을 받고 눈이 멀어버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고 바이에른의 어느 작고 한적한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라스찌슬라브 사망 이후, 대모라바 왕국에서는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지만 결국 스바토폴크 1세가 왕위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며 이 싸움은 끝나게 된다. 승리한 스바토폴크 1세는 동프랑크 왕국과 친했기 때문에 당연히 슬라브인 성직자들은 대부분 대모라바 왕국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결과 모라바 지역을 비롯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역에서 사용되던 글라골 문자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언셜체(uncialis, Унциа́л)를 바탕으로 새로운 키릴 문자가 885년에서 893년 사이에 창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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