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역 앞 윤흥신장군 동상에서 임진 영웅과 두모포왜관터 이야기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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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역 앞 윤흥신장군 동상에서 임진 영웅과 두모포왜관터 이야기를 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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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초량동의 부산진역 1번출구로 나와 조금만 내려가면 '윤흥신장군 동상 쌈지공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1981년에 7m 높이의 석상으로 설치되었던 윤흥신 장군상 (출처 : 부산일보)

부산일보에 따르면, 1981년, 동구 초량동 고관입구교차로에 7m 높이 석상으로 윤흥신 장군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리석 타일이 깨지거나 녹물이 흐르는 등 석상 관리가 어려움을 호소한 파평윤씨 종친회와 역사성을 근거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윤공단으로 석상을 옮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쭉 이어져왔습니다.

그러나 결국 여러 이해관계가 겹쳐 2020년대 초에 석상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동상이 세워지는 것으로 합의되었습니다. 그렇게 2024년 1월에 재건립되어 1월 26일 제막식이 열린 뒤 시민들에게도 새로운 윤흥신 장군 동상이 정식으로 공개되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nE1NP1Ysblw)

기존 동상보다 약 4.4m 높은 11.4m 높이로 지어지고, 좀 더 슬림한 형태로, 또 장군 혼자 서서 부산항 북항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때 그가 입은 갑옷은 2000년대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공사시 발굴된 찰갑의 모습으로 기존보다 더 당시의 군인의 의복과 비슷한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상의 뒤에는 윤흥신의 생애와 그를 현대에 기념하고 있는 상황을 포함한 5가지의 그림과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1545년(명종 즉위)에 발생한 을사사화 때 부형이 사형당하고 어린 윤흥신은 노비로 전락하다 1577년(선조 10)에 을사사화와 관련된 선대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다시 양반 신분을 회복하다 1592년 4월 14일, 다대진성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을 거두다

이튿날(4월 15일) 다시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동생(서제 윤흥제)과 함께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전사하다 1981년 장군의 석상을 설치하였고, 약 42년 동안 자리를 지키며 장군의 업적을 기리다

 

동상의 오른편 수풀엔 윤흥신 장군의 생애를 정리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안내판 아래에는 새로 지어진 동상의 갑옷을 찰갑으로 하게 된 수안역에서 발굴된 동래성 해자유적(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451)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밖에 이전 석상에 붙어 있던 '명패와 사적기, 건립문' 등이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수안역 대합실 속 작은 고고학 박물관, 동래읍성 해자

수안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곳에 표를 끊고 앞을 바라보면, '동래읍성 해자 단면'이 보입니다. 동래읍성 해자 축조 단면 동래읍성(東萊邑城) 해자(垓子)는 체성(體城)에서 약 3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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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신 장군의 생애(1540~1592)
윤흥신 첨사의 본관은 파평이며 아버지 윤임과 어머니 현풍 곽씨 사이의 명망 있는 가문 자제로 태어났으나 을사사화(1545년)에 휘말리어 아버지와 형은 처형되고 가문은 몰락하였다. 윤흥신은 당시 6세 가량의 어린 나이라서 동생들과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러나 노비 신분으로 전락하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32년 후인 1577년(선조 10)에,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의 신분이 회복되었다. 이때 윤흥신도 양반 신분을 되찾았다. 그 후 부친의 관작이 회복되면서 음직(蔭職)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진천현감, 진도군수 등을 역임한 후 1591년(선조 24) 다대진첨사로 부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음력) 4월 13일 오후 부산포에 도착한 일본군은 다음날 14일 아침 부산진성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4일 일본군이 다대진성을 공격하자 윤흥신은 부하들과 힘써 싸워 물리쳤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음날 15일 일본군이 병력을 늘여 다시 공격해 왔다. 다대진성이 함락되면서 윤흥신은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 부산지역에서 순절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진첨사 정발, 다대진첨사 윤흥신을 들 수 있다. 윤흥신의 전공은 선조 때 선무원종공신의 일등공신이 되는 등 일찍부터 조정의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효종 때 충렬사 제사에 포함되고 윤공단도 건립되면서, 송상현·정발과 더불어 현창(顯彰, 밝게 나타나거나 나타냄)의 균형을 이루었다. 윤흥신에 대한 현창은 동래부사를 역임한 조엄(趙曮, 1719~1777)의 10년 품은 뜻과 아들 조진관(趙鎭寬, 1739~1808)·손자 조인영(趙寅永, 1782~1850)까지 삼대로 이어진 노력 및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 다대진첨사 이해문(李海文, 1712~1772), 동래부사 홍종응(洪鍾應, 1783~) 등 많은 분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동래성 해자유적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해자유적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조선군의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으며 찰갑(札甲)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이 찰갑은 국내에서 출토된 최초의 찰갑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실제 발굴된 유물을 근거로 새롭게 세워지는 윤흥신 장군의 갑옷을 찰갑으로 표현했다.

다대포진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 사적기
공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 되시는 좌찬성(左贊成) 윤임(尹任)의 아들로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때 아버지와 두 형이 죽음을 당하고 가족과 자산도 몰수되었다가 1570년(선조 3년)과 1577년(선조 10년) 두 차례에 걸쳐 관작을 복구하고 재산을 찾고 남은 아들을 등용하도록 하니 공은 그 형제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이 다대첨사가 되기까지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을사사화만 없었드라면 공은 왕실의 외척으로 권세를 누릴 사람이었다. 윤공의 전망사적은 <충렬사지(忠烈祠志)>에 대강 나타나 있다. 즉 임진(1952년) 4월 14일에 적의 일부 병력이 침투해와서 성을 포위하였으나 역전하여 이를 물리쳤다. 이튿날 적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덮어 공격해왔다. 부하들은 피신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를 물리치고 성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하였다. 성문을 굳게 닫고 남은 부하들과 같이 물밀듯 닥치는 적 앞에서 지주(砥柱)처럼 우뚝하게 성을 지키다가 시진도절(矢盡刀折)하여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가문의 불행을 딛고 풍운이 급한 때를 당해 죽음의 땅으로 부임하여 충척(充斥)한 적 앞에서 외로운 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의연히 죽음을 택하니 그 슬픔 비록 크다 하여도 그 절의 어둠 속에 한 가닥 빛을 남기니 거룩한 일이다. 비록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이 되었으나 변방의 일이라 그 사적이 오래 들어나지 않았다. 영조 때에 와서 원임부제학(原任副提學, (구)부제학) 조엄(趙曮, 1719~1777)이 <전망사적서(戰亡事蹟叙)>를 써서 충렬사에 합사할 것을 건의하고 동래부사 강필리(姜必履, 1713~1767)는 <사절기(死節記)>를 적어 또한 합사를 강조하니 1772년(영조 48년) 예조의 품의를 거쳐 합사하였다. 그 뒤로는 충렬사와 윤공단에서 해마다 제사를 모셨는데 근자에 부산시는 다시 관내의 선열유적을 정화하고 송공 정공 윤공의 동상과 석상을 세우게 되니 이에 공의 사적을 석상에 부쳐 추모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1981년 9월 10일

다대포진 첨절제사 윤흥신 장군상 건립문
임진년(1952년) 그 해 4월 바다 건너에서 밀물같이 닥쳐 온 왜적의 무리와 대치하여 다대진성을 지키다가 마침내 죽음으로써 호국의 별이 되었던 윤흥신 장군! 장군이 순사하신지 3백89년(389년)이 흐른 지금 나라 위에 의롭게 바치신 고귀한 넋을 기리려는 후손들이 여기 뜨거운 추념의 마음을 모아 장군의 모습을 돌에 옮겨 세긴다.

장군의 굳은 결의에 따라 더불어 싸우다가 순절한 군관과 백성들의 모습도 함께 모신다. 이는 나라를 지킴에 있어 한결같았던 애국정성을 드 높이 받들고자 함이다. 난을 전후 나라 안은 당쟁으로 어지러운데다 국방 또한 소홀했던 시기여서 이 때를 틈 탄 왜적들은 유구한 역사의 땅 그 남단 부산을 발판으로 산아 대군을 거느리고 기습 상륙을 감행했다. 왜적들은 불시에 다대포성에도 밀어 닥쳐 성을 함락시키고자 갖은 살상과 파괴를 서슴치 않았다.

적의 침략 내습에 대비하여 응전의 태세마저 갖추기 전이어서 우세한 병기를 쓰는 적의 공격을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노릇이었다. 다만 황급한 때를 당하여 죽음을 앞세운 처절한 접전이 요구될 뿐이었다. 우리 역사상 국력과 국방의 힘이 이다지도 절실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한 무인으로서 윤흥신 첨사의 가슴에 교차된 만감의 회환을 우리는 익히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겠다. 군관은 흩어지고 쓰러져가는데 고립무원 홀로 버티던 장군은 마지막 피를 뿌리면서 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장군의 비장한 전사는 7년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어두워가능 사직의 하늘을 불 밝혀 수 많은 의병의 봉기와 항전의 말없는 길잡이가 되었으리라.

장군이여 오늘 그대 단성의 넋을 석상으로 다듬어 모든 후대인에게 나라 사랑하는 크나큰 거울로 삼고자 한다.
1981년 9월 10일

쌈지공원의 동상 뒤쪽으로 돌아나오면 두모포왜관터와 관련된 안내문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모포진성터라고 전하는 지역의 일부

사실 '두모포'라는 지명은 현재 기장에 있던 포구와 그 일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기장 두모포진성(https://mspproject2023.tistory.com/2091)이 무너진 후, 그곳에 있던 두모포영이 이름을 바꾸지 않고 이곳 인근으로 옮겼습니다.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으나 왜적에게 무너진 기장 두모포진성

기장 두모포진성에 "두모포진은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는데 부산포진의 종3품 수군첨사(水軍僉使)의 지휘를 받았고 병선 16척과 군사 843명을 두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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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두모포왜관)과 신관(초량왜관)이 나타난 <동래부지도>(지도 출처 : 동래부지도)

그리고 왜관을 설치했는데, 그 두모포영의 이름을 따 '두모포왜관'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모포왜관(豆毛浦倭館) 터
이곳은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곳이다. 왜관은 일본사절과 상인이 외교와 무역을 하였던 곳으로, 조선은 포구를 지정하여 일본인들의 거주와 상행위를 허용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제포(薺浦, 현 진해), 부산포(釜山浦, 현 부산), 염포(鹽浦, 현 울산) 3곳에 왜관을 두고 허가 없이 일본인과 조서인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에는 부산포 한 곳에만 왜관을 지어 외교와 무역을 허락하였는데 이때 만들어진 것이 두모포왜관이다. 두모포왜관은 현재 동구 수정시장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왜관의 동쪽은 바다에 접해있고, 서·남·북쪽은 담을 쌓았으며, 왜관 동문 밖에는 좌천(佐川)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두모포왜관이 있었던 주변을 고관(古館) 또는 구관(舊館)이라고 부르는데 이 이름은 1678년에 신축한 초량왜관을 신관(新館)이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두모포왜관은 일본측이 대형 무역선이 정박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이전을 요구함으로써 70여년간 존속하다가 1678년에 초량왜관(현 용두산공원 주변)이 개관하면서 폐쇄되었다.

부산진역 앞 이 작은 공원에서 일본과 싸우고 교류하던 조선 후기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대포에서 왜적을 막아 싸우던 윤흥신 장군의 인생 전반과 임진왜란이 끝나고 잠시 이곳 인근에 있었다는 두모포왜관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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