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에 정착한 근대 일본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구룡포 근대역사관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구룡포에 정착한 근대 일본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구룡포 근대역사관

728x90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중 동쪽 길에 구룡포 근대역사관이 위치해 있습니다!

구룡포 근대역사관
이 건물은 1920년대 일본 가가와현(香川県)에서 이주해 온 하시모토 젠기치[(橋本善吉]가 살림집으로 지은 2층 일본식 목조가옥이다. 해방 후 개인주택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포항시가 매입·수리하여 '구룡포 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100여 년 전 모습들이 잘 남아 있으며 당시 생활모습을 다양한 전시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일본식 건물의 구조적·의장적(意匠的)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일본 저택 입구로 들어가면 됩니다.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3시까지라고 합니다!

일본식 정원이 있고, 그 가운데 돌길이 나 있어 집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정원의 나무도 잘 정리되어 있구요. 일본식 석탑도 눈에 띕니다. 정원을 지나 집에 들어갑니다.

신발은 꼭 벗고 준비된 실내화를 갈아 신고 와야 합니다.

객실
하시모토가 살던 당시 이곳은 하시모토의 집무실로 사용 되던 곳이며, 현재 부엌 자리까지 넓게 집무실로 사용하여싿. 이곳은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공간과 동시에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복원되었다.

이 객실에서 티비 아래의 작은 문을 통해 부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구룡포의 전설
용이 승천한 구룡포
신라 진흥왕 때 장기현감(長鬐縣監)이 각 마을을 순찰하던 중 사라리(沙羅里, (현)용주리)를 지날 때 별안간 천둥과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그 비바람을 뚫고 (병포리 해안에서)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가 한 마리가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용이 아홉 마리만 승천했다고 하여 구룡포라고 불렀다.

티비 오른편을 보면 방의 경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미닫이 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시모토의 딸들이 사용하던 방이며 미닫이 문(쇼지(障子)와 후스마(襖))으로 방이 구분되어 있다. 다다미를 깔아 놓아 낮에는 거실, 밤에는 침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부엌
이곳은 하시모토 가옥의 집무실로 이용되던 곳이었으나 철거되고 부엌으로 복원되었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 열기로 난방을 하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궁이가 바깥 벽 쪽으로 나 있다. 외부에서 들어가는 문과 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방'의 왼편 구역에서도 부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에선 1929년 포항시 지도도 볼 수 있었구요.

1930년대 구룡포항 축소모형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살계된 계기도 살펴볼 수 있었죠.

구룡포 엘도라도
(일본) 가가와현(香川県)의 가난한 어부들의 조선 출어(朝鮮出漁)는 1880년~1884년경에 시작되었다.
당시 세토 내해(瀬戸内海)에는 좁은 어장에 많은 어부들이 몰려들어 크고 작은 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힘없고 가난한 일본의 어부들은 더 넓은 어장을 찾기 위해 세토 내해를 벗어나 먼 곳의 바다로 향했다.
이들은 더 넓고 좋은 어장에서 만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해를 했다.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되면서 일본 어민들은 본격적으로 조선해(朝鮮海, (현) 동해)에서 고기를 잡았다.
1908년경 가가와현의 가난한 마을 오다(小田) 어촌 어부들과 오카야마현(岡山県)의 어부들이 중심이 되어 구룡포로 이주했다.
구룡포에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은 대표적인 일본 어부로는 구룡포 공원 내 공덕비의 주인공인 도가와 야스브로(十河彌三郞)와 하시모토 젠키치(橋本善吉)가 있다. 오카야마현에서 이주한 도가와 야스브로와 가가와현에서 이주한 하시모토 젠기치는 구룡포 일본인 이주 어촌의 두 기둥이 되었다.
구룡포의 풍부한 어자원은 일본 어부들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황금빛 엘도라도 구룡포는 가난한 일본인 어부들에게 새 시대, 새 삶을 열어 주었다.

키누타(砧, 다듬잇돌), 다리미, 차반, 주전자, 저울추, 도르래, 술통, 부표, 포획용 항아리, 후시나 친시와 같은 어업용 돌과 같은 어업용 및 생활용 도구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에서 보는 바깥 풍경은 잔잔한 풀들과 나무, 석등이 잘 어울려진 일본식 정원이 눈에 잘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이 안방에는 선풍기, 물레, 차가마와, 술병, 찻잔, 도자기, 전화기와 같은 일반 가정 용품 뿐 아니라 부츠단(仏壇), 고다츠(炬燵), 일본 농가에서 주로 썼던 난방기구 이로리(囲炉裏) 같은 일본을 잘 

안방
집에서 가장 중요한 안방으로 하시모토 가족들이 모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어린 시절 하시모토 막내딸이 부모님과 함께 안방을 사용하였다. 조상들을 모시는 부츠단(仏壇, 불단)을 두었으며, 붙박이 벽장(오시이레(押入れ))과 장을 두고 사용했다. 겨울철에는 고다츠(炬燵)를 두고 온 가족이 모이는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화장실
하시모토 가족이 살던 당시, 이곳에 부엌과 식당이 있던 곳이다. 복원 당시, 외부에 있어서 철거되어버린 화장실을 이곳에 복원하였다. 전통 재래식 화장실을 재현한 것으로, 대변기와 소변기로 나누어져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을 타고 올라갑니다.

후쿠야마중앙라이온스클럽(福山中央ライオンスクラブ)에서 기증한 당시 일본에서 쓰이던 재봉틀을 지나면,

창고가 보입니다. 이 창고는 실제로 청소용품 등 물품을 정리하는 창고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시모토 딸들의 방
하시모토 가옥의 2층은 주로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더운 여름철에는 가족들이 2층을 침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방을 하시모토 딸들이 사용하던 방으로 복원하여 당시의 생활 모습과 유물들을 재현해놓았다. 벽에는 오시이레(붙박이 벽장)가 있으며 방과 방, 방과 복도 사이에 나무로 된 창살(란마(欄間))을 넣어 통풍과 환기가 잘 되고 빛이 잘 들어오도록 하였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의 나무 창살을 통해 당시 하시모토의 부와 하시모토 가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곳 역시 주로 손님을 맞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더운 여름철에는 가족들이 2층을 침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곳에도 도코노마가 설치되어 있으며 장식을 해 놓았다. 손님을 맞거나 행사를 할 때, 미닫이문(쇼지와 후스마)을 모두 열어 2층 전체를 커다란 한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에도 방과 방, 방과 복도 사이에 나무로 된 창살(란마(欄間))을 넣어 통풍과 환기가 잘 되고 빛이 잘 들어오도록 하였다.

그 옆의 방에서도 구룡포회 명부, 구룡포 공립심상고등소학교 이시마루 교장의 편지, 중학교 수학교과서 등 다양한 기록물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식 장식품과 도기, 또 객실의 바닥을 한 층 높여 벽에 족자를 걸고 바닥에 도자기나 꽃병 등으로 장식한 도코노마(床の間)도 볼 수 있습니다.

10마리 중 9마리의 용만 승천한 조선의 구룡포에 시코쿠의 가가와현에서 풍어(豐漁)를 기원해 세토 내해를 빠져나와 동해를 건너 하시모토 젠기치와 그의 가족이 정착하며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고, 일본인 어부들도 하나 둘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흔적을 지금 근대역사관으로 지정해 관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외국인의 정착과 개척의 역사를 기록한 일본인들의 밝은 2층 집 속의 기록 뒤에는 수탈당한 조선인 어부들의 이야기가 어둡게 그늘져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