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산박물관 <울산결혼백서>, 조선시대 전통 혼례부터 울산 사원합동결혼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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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산박물관 <울산결혼백서>, 조선시대 전통 혼례부터 울산 사원합동결혼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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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박물관 울산 남구 두왕로 277

1. 울산결혼백서

울산박물관에서는 2026년 5월 5일부터 8월 30일까지 <울산결혼백서>라는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시회는 결혼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하나의 공동체로서 사회적으로 결합하는 특별한 순간이라고 소개하며, 한국의 전통 결혼 문화를 소개한 다음, 전통적인 방식과 다른 현대의 결혼식 모습을 조명하며 울산만의 독특한 결혼 문화인 사원합동결혼식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엿볼 수 있게 됩니다.

 

1-1. 예로 허락된 인연

농경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가족은 생산과 노동을 함께하는 공동체였기에 새로운 가문과의 만남은 유교 질서에 따른 '예'를 통해 진행되며 그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부가 되었던 옛날 조선 시대의 결혼 문화를 살펴봅니다.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사대부가에서 시행할 관혼상제에 대한 예를 저술한 <가례(家禮)>라는 예서를 편찬합니다. 이 책은 고려 말 한반도에 도입되어 조선시대에 폭넓게 활용되고 연구되었죠.

시간이 지나 조선 후기, 이재(李縡, 1680~1746)는 관혼상제의 실천에 활용하기 위해 <가례(家禮)>를 수정하고 보완하여 <사례편람(四禮便覽, 1746)>이 완성됩니다. 이후 그 제자들이 <사례편람>을 교정하다가 문집 간행이 중지되었는데, 시간이 지내 이재의 손자인 이채(李采, 1745~1820)가 <사례편람>을 교정하여 정본(定本)으로 만들었고, 그의 두 아들이 184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이 책은 일제강점기 이후까지도 한반도의 집안 예식 지침서로 활용되었습니다.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청혼서와 신랑의 사주를 붉은 보자기에 싸서 보내는 납채(納采, 신랑의 사주 보내기)가 우선 진행되는데, 신붓집에서는 이를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신붓집에서 결혼을 승낙했다면, 신랑이나 신부의 부모가 혼인한 달, 양가에 불길한 일이 있던 날, 양가 조상의 기일은 피해서 고르는 연길(涓吉, 날받이)이 진행되고, 그 결과는 곧 신랑집으로 혼인을 허락하는 편지와 함께 보내집니다. 이와 관련된 청실홍실, 사성편지, 목안(木雁, 나무 기러기), 연길편지도 살펴볼 수 있죠.

결혼과 결혼식 일정이 정해졌다면 혼례 전날이나 며칠 전 밤에 신랑집에서 혼인을 허락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글과 함꼐 물목(物目, 물품의 목록)을 함에 넣어 함진아비가 신붓집으로 가져갑니다. 이 과정을 납폐(納幣)라고 하죠. 이때 혼서(婚書)는 당시 혼인의 유일한 증거였으므로, 신부가 평생 간직하였다가 늦게 가는 사람의 관 안에 넣었다고 하는데, 이는 저승에서 먼저 간 한쪽을 찾을 수 있는 징표로 삼기 위함이라고 하네요. 여기선 혼서(婚書), 금침(衾枕, 이불과 베개), 혼수함(婚需函), 유기(鍮器, 놋그릇, brassware), 자수방석(刺繡方席, embroidered cushion), 반닫이(櫃)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짚불넘기, 신부가 혼례를 마친 후 정식으로 시댁에 들어가는 신행(新行) 혹은 우귀(于歸) 혹은 우례(于禮), 며느리 맞이와 같은 전통 혼례 풍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번째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반도에서는 신랑이 신붓집에서 혼인 생활을 시작하는 오랜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유교가 널리 퍼진 이후에도 신붓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일정 기간 머문 뒤 신랑 집으로 이동하는 독자적인 문화로 이어졌다고 하네요. 이런 문화들은 현대인으로서 꽤 신기한 문화로 여겨지지만, 아마 할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익숙한 문화였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1-2. 혼례, 공동체의 기쁨

혼례는 두 집안의 경사였을 뿐 아니라, 그 마을 전체의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신분 사회의 엄격한 선이 잠시 지워지면서 궁중 예복인 활옷과 원삼을 입고 문무백관의 상징인 사모관대를 갖춘 신부와 신랑은 혼례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런 예복은 비쌌기에 마을 공동체가 정성을 모아 혼례복을 마련하고 이를 보관하여 혼례가 있을 때마다 빌려 입게 했다고 하네요.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증자 김문열(1898-1958)이 썼던 울주 천전리 마을에서 혼례를 치를 때 입었던 마을 공동 혼례복도 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니 옷이 낡고 찢어지자 마을 공동조직인 일심계(一心契)에서 돈을 모아 혼례복을 고쳐 입었다고 하며, 당시 옆 마을에도 빌려갈 정도로 귀중한 옷이라고 하네요.

그 옆에는 홀기(笏記)라는 가례가 진행되는 순서와 절차를 쓴 문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울사에서는 이 홀기를 읽는 혼례 진행자인 집례자를 '홀기를 잡는 사람'이라는 뜻의 '홀잽이'라고 불렀고, 이 사람은 학덕과 인품을 갖추고 부인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했다고 합니다. 이 홀기에 따라 전통적인 결혼은 전안례(奠雁禮, 나무기러기를 바치는 의식)-교배례(交拜禮, 서로 맞절을 주고받는 의식)-합근례(合卺禮, 표주박 잔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의식)의 순서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온 마을의 축하 속에서 진행된 전통 혼례는 혼계(婚契, 혼례을 치르기 위해 조직한 계), 모대계(帽帶契, 관복을 입을 때 갖추는 모자와 띠 등 예복과 관련된 계)를 꾸려 많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울산의 결혼 잔칫집에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소고기국을 끓여 나누어 먹으며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고 하네요. 이곳에서는 <혼계안>, <모대계안>, <축사>를 볼 수 있습니다.

혼례를 올릴 때 신부가 입는 옷인 원삼(圓衫)과 혼례 때 신랑이 입는 옷인 단령(團領)도 볼 수 있었습니다.

원삼은 붉은색과 푸른색을 사용하였으며, 큰 소매에 여러 색의 색동으로 화려하게 꾸며 신부의 일생의 가장 특별한 날을 축하했구요. 조선시대 관리 복장으로 옷깃이 둥글다고 단령이라고 부르는 이 옷은 계급에 따라 쌍학이나 단학 흉배를 가슴과 등에 부착해달았다고 합니다. 이 단령은 쌍학 흉배가 붙어 있네요.

이곳에서는 <김삼관·변순년 부부의 혼례이야기(1960년대)>와 김영특이 기증한 <또 다른 혼례 이야기>를 살펴보며 근현대에 들어선 한국의 전통 결혼 문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는 신행길에 신부가타고 가는 가마인 승교(乘轎)입니다. 이곳에 전시된 고하새마을회가 기증하고 울산대곡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승교는 언양 반곡리 마을에서 1960년대까지 혼례 때 쓰였다고 합니다. 그 옆에는 신부가 가마를 타고 가면서 사용하는 요강(溺缸)입니다. 경상도에서는 신부가 신랑집에 갈 때 요강에 찹쌀을 가득 담아 가서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하는데, 이는 찰밥을 먹으며 찰지고 인정있게 시집살이를 잘 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찹쌀을 담은 요강말고 다른 예비용 요강도 있었겠죠..?

 

1-3. 도시가 바꾼 결혼 풍경

시대가 변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며 신붓집 앞마당에서 진행된 마을 잔치 중심이었던 결혼식은 공공예식장과 예배당으로 그 공간이 이동되며 절차와 모습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쯤 현대 젊은이들에게 익숙한 결혼식의 모습이 등장해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죠. 특히 결혼 시작 문화도 중매인이 소개하고 부모가 배우자를 결정하던 관습이 줄어들고 1960년대 이후로 '연애'가 필수적인 과정으로 자리 잡았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자유연애가 보편화되며 지금은 일상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고 결혼할 동반자를 찾는 일이 우리 삶의 당연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대형 결혼중개업자(결정사)가 짝을 찾아주는 등 중매도 사라지지 않은 모습도 남아 있죠.

현대 대한민국의 독특한 결혼 풍습 중 하나는 울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중공업이 발전한 현대에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왔고, 1970-80년대를 중심으로 울산의 기업들은 경제적 사정으로 결혼을 하지 못한 사원들을 위해 사내 체육관이나 공공시설을 빌려 기업의 돈으로 축하 전보를 보내며 합동결혼식을 열어주고, 신혼여행이나 가전제품 거기에 적금통장까지 지원하며 새로운 살림을 시작하는 사원들의 자립을 도왔습니다.

실제로 2000년대 초반에 현대중공업의 조사에 따르면, 회사 내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한 여사원 수는 전체 기혼 여사원의 54%일 정도로 기업의 미혼 사원 만남의 행사와 사내 결혼 문화는 울산을 중심으로 꽃피웠습니다.

개화기에 서구식 문화가 유입되며 일반적인 신식 결혼식에 신랑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신부는 흰색의 한복을 입고 머리에는 베일을 착용해 서양식과 한민족 고유의 전통 양식이 절충된 예복 차림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렇게 흰색 환복에 면사포를 입는 모습은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1970년대 이후 경제 성장과 함께 웨딩 전문숍들이 생겨나며 허리를 강조하고 밑으로 퍼지는 A라인 드레스와 풍성한 볼륨감이 강조된 스타일이 인기를 끌었고, 보석 장식의 티아라와 베일을 착용하여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를 공주님처럼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현대 결혼식 문화의 다양한 흔적들을 볼 수 있었는데요.

인화된 사진을 접착식 앨범에 한 장씩 붙여 기념한 결혼 기념앨범, 결혼 본식에서 신부가 들었던 생화 부케를 건조하여 반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웨딩부케 드라이플라워, 1980년대 이후 신식 혼례-전통 혼례 순의 혼례가 유행했던 만큼 당시의 두번째 결혼식인 전통 혼례에 관한 것들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청첩장(請牒狀)이라는 결혼식 초대 안내장이 쓰이기 시작했는데, 1970년대 과도한 허례허식을 없애고 경제적인 사회 기풍을 세우기 위해 <가정의례준칙(1969-1999)>에 따라 1970년대에는 이 청첩장을 발송이 금지되어 타자기로 직접 입력하고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했다가 80년대에 금지조항이 풀리면서 화려하고 다양한 디자인의 종이 청첩장이 대중화되었죠. 현재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모바일 청첩장이 주류가 되고 있습니다.

 

또 축의금과 답례품들도 볼 수 있었는데요. 관례적으로 홀수나 10만 원 단위로 금액을 맞추어 축의금을 주었는데, 이에 대한 답례품으로는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공중전화카드를 많이 줬다고 합니다. 울산과 부산 등 경남 지역에는 '차비 문화'가 있어, 식사 대신 현금을 봉투에 담아주는 답례금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하네요.

마지막으로 신혼여행과 관련된 것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이전에는 예식 후 인근 호텔에서 1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후 여행 문화가 보급되면서 경주, 속리산, 제주도가 신혼 여행지로 각광받았죠.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와 함께 그 무대가 세계로 확장되며, 신혼여행은 부부만의 특별한 취향과 낭만을 실현하는 시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마지막 포토존에서 부케를 들고 사진을 찍어볼 수도 있네요.

이번 전시는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분들의 도움으로 인해 울산에서 한반도의 조선 이후 결혼 풍습부터 현대의 새로운 결혼 문화까지 살펴볼 수 있었고, 울산만의 독특한 사원합동결혼식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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