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조선왕조실록부터 조선통신사까지, 부산박물관 특별기획전 <만세에 전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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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부산] 조선왕조실록부터 조선통신사까지, 부산박물관 특별기획전 <만세에 전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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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63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통치의 모든 과정을 치밀하게 문자로 남긴 위대한 기록의 나라였습니다. 사관(史官)의 엄격하고 바른 직필(直筆, 사실을 그대로 씀)로 완성된 <조선왕조실록>과 전란 속에서도 역사를 지켜 낸 외사고(外史庫, 한양의 춘추관 외의 지방에 둔 역사 사고) 체제는 후대에 정직한 역사를 전하려 하였던 철저한 기록 정신을 보여 줍니다. 나아가 국가와 왕실의 중요한 의례를 글과 그림으로 정밀하게 담아낸 <의궤>는 지난 행사의 기록을 거울삼아 시행착오를 줄이고, 국가의 법도를 확립하려 했던 조선만의 체계적인 기록 문화를 증명하죠. 이 엄격한 질서 속에서 탄생한 국왕의 어보와 어진은 왕실의 지엄한 상징이며, 화려함과 절제가 공존하는 궁중의 기물들은 조선이 추구한 예술적 품격과 예법의 본질을 대변합니다. 조선 왕실의 통치 질서와 문화적 역량은 남쪽 끝 외교의 거점인 동래부((현) 부산)로 이어집니다. 전란의 상처를 딛고 일본과 성신(誠信, 성실과 신의)으로 교류했던 평화의 여정은 조선통신사 기록물에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습니다. 이제 부산박물관과 국립고궁박물관이 공동으로 개최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개최 기념 특별기획전 <조선의 기록과 문화, 만세에 전하노니(2026.07.07.-2026.08.30.)>에서 조선의 이야기들을 살펴봅니다.

 

[부산] 부산의 모든 역사 기록을 담다, 부산박물관

1. 부산박물관부산 남구 대연동의 부산박물관입니다. 1977년 9월 30일에 부산시립박물관이 세워지고, 두 차례 이름이 바뀌어 1999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그 명맥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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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3년, 조선 태조(1335-1408)가 <팔만대장경>을 다시 찍어낼 때 발문(跋文,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히 쓴 글)을 써 목판에 새겼는데요. 조선이 만세가 되도록 영원히 공덕에 힘입을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간 <태조 이성계 발문 목판(인출본, 1393)>이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포함한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이 2007년 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죠.

프랑스 출신의 비디오 아트 작가이자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장 줄리앙 푸스(Jean Julien Pous)의 <잔상(afterimage)>이라는 작품이 펼쳐집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UNESCO 세계유산 창덕궁과 종묘를 담아낸 미디어 아트로, 작가는 두 공간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을 흑백 화면에 담아, 오랜 세월을 지나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화유산의 잔상을 보여줍니다.

역사는 한 시대의 제도와 문물을 모두 담고 있으며, 만세의 귀감으로서 민심과 사론(士論)에 관계된 것이니, 나라가 있어도 역사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요 역사가 있어도 공정치 못하면 역사가 아닙니다.

-<선조수정실록> 권42에 실린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 1584-1647)의 상소(上疏)>(1641.02.)

이제 종묘 복도를 모티브로 딴 길을 따라 조선의 진짜 역사를 읽으러 갑니다.

가장 먼저 조선의 국정 운영과 관련된 기록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222책과 1377책, <일성록> 34책과 52책, 그리고 정조실록 권1(정족산사고본)도 볼 수 있습니다.

성종실록 권138(정족산사고본, 1499)과 성종실록 권105(오대산사고본, 1606), 성종실록 권3(적상산사고본, 1606), 성종실록 권297(태백산사고본, 1606)이 가운데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떄 불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진 전주사고본(정족산사고본)으로 조선 전기 실록 편찬과 인쇄 양상을 잘 보여주는 조선 왕조 최초의 실록의 첫 번째 책, <태조실록> 권1(정족산사고본, 1413)도 볼 수 있고요. 그 외 <춘추관일기> 2책, <비변사등록> 4책, <인조실록> 권17(적상산사고본), 광해군일기 권58(중초본, 태백산사고본, 적상산사고본), <중종실록> 권1(정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의궤, 가례, 연향, 종묘제례와 관련된 기록들을 보러 갑니다.

의궤(儀軌)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치른 후 그 전체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을 말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를 치른 후 그 전체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인 의궤들을 볼 수 있습니다. 1726년에 종묘 정전 동쪽 4칸을 증축한 과정을 기록한 <종묘개수도감의궤(1726)>, 1890년에 사망한 익종(효명세자, 1809-1830)의 부인 신정왕후(1809-1890)를 수릉에 합장한 과정을 기록한 <신정왕후수릉산릉도감의궤(1892)>, 1794년 1월부터 1796년 8월까지 진행된 화성 성곽 축조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1796)>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1795년 정조(1752-1800)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6)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과정을 기록한 <정리의궤(整理儀軌, 1797)>입니다. 1796년에 만들어진 정리자(整理字)라는 금속활자로 인쇄되었기에 <정리의궤>라고 불리며, 조선 후기 최고의 천재 화가 김홍도(1745-1806?)의 화풍이 잘 녹아있습니다.

가례(嘉禮)는 왕가의 결혼, 즉위, 책봉 등의 예식을 치루는 방법과 과정을 말하는데, 좁은 의미에서는 '왕비나 왕세자빈을 맞이하는 혼례 과정'을 뜻하죠. 이 가례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이 바로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입니다.

이 전시에서는 고종(1852-1919)과 명성황후(1851-1895)의 혼례 과정을 묘사한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1866)>와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제작된 교명으로 민 씨 가문을 기리고, 그의 덕성을 칭송하면서 왕비로서의 역할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승강룡(昇降龍, 하늘을 오르내리는 용)이 자수로 새겨진 <고종비명성왕후봉왕비교명(高宗妃明成王后封王妃敎命, 1866)>도 볼 수 있습니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 중 동뢰연(同牢宴, 신랑과 신부가 마주보고 절을 한 뒤, 음식을 나누어 먹고 부부의 인연을 맺는 결혼 의식 및 잔치)에서 쓰인 1866년에 제작된 항아리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가례를 위해 200개의 항아리가 준비되었다고 하네요.

연향(宴享)은 조선 왕실에서 국가적 경사를 맞았거나 국빈을 대접했을 때 열린 대규모 궁중 잔치입니다.

이렇게 연향의 과정과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책을 연향의궤(宴享儀軌)라는 학술적 용어로 부릅니다.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 당시 주요 행사를 여덟 폭에 나누어 그린 화성능행도 병풍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옆에는 야간 연회에서 어두운 공간을 밝히기 위해 사용된 나무로 만든 용무늬 초, 촛대, 향좌아(香座兒, 향을 올려놓던 탁자)도 볼 수 있고, 용이 그려진 궁중 의례용 항아리 중 하나로 술을 담아두거나 채화(綵花, 비단으로 만든 꽃)를 꽂아 장식하는데 쓰인 백자청화운룡문호(白磁靑畵雲龍文壺)도 볼 수 있죠. 이 용준(龍樽)은 용의 문양을 장식한 술항아리로, 어좌 주변에 놓여 왕실의 위엄과 궁중 잔치의 격식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 옆에는 왕,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의 주정(酒亭, 술상)에 놓는 은을 도금한 일월병과 잔, 잔 받침, 그리고 장수를 기원하는 대상에게 올릴 술병과 술잔을 놓아두던 수주정(壽酒亭)도 볼 수 있습니다.

1901년, 대한제국의 경운궁에서 제국의 첫번째 연회가 열렸습니다. 이 연회는 당시 황실 최고 어른이었던 명헌태후(明憲太后, 1831-1904)의 71세 생신을 기념해 열린 진찬행사이죠. 이 행사를 묘사한 그림이 바로 <신축진찬도(辛丑進饌圖)>입니다. 오른쪽에서부터 경운중 중화전에서 1월 1일에 열린 진하례(陳賀禮)부터 경운궁 경운당에서 열린 내진찬(內進饌)-야진찬(夜進饌)-회작(會酌)-재익일회작(再翌日會酌)의 행사를 그렸으며, 마지막에는 진찬을 준비하고 운영한 진찬소 관리들의 명단도 적혀 있습니다.

순조(1790-1834)의 왕비 순원왕후(1789-1857)의 육순 축하 잔치를 기록한 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 1848)>, 고종의 41세 생신 축하 잔치를 기록한 <임진진찬의궤(壬辰進饌儀軌,1892)>, 명헌태후의 71세 생신 축하 잔치를 기록한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 1901)>도 볼 수 있죠

종묘(宗廟)는 한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대한민국에서 '종묘'라고 하면 조선 종묘를 말합니다.

이 조선 종묘에서 행해진 조선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조선 종묘에서 거행하던 국가 최고의 유교 제향 의식으로, 조선 국왕은 종묘에서 제사를 올리며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대내외에 드러내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이 조선 종묘제례의 절차와 준비물 및 공간 구성 등을 세부적으로 정리한 책이 <종묘의궤(宗廟儀軌)>이며, 그 외에 다양한 예서(禮書, 예법에 관하여 쓴 책)에 상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그중 조선 시대 국왕이 종묘에서 직접 제사를 지낼 때의 절차, 건물 배치, 상차림, 참석자 위치 등을 그림과 글로 설명한 8폭의 병풍인 <종묘친제규제도설(廟親祭規制圖說)>과 조선 건국부터 숙종 대까지의 종묘의 연역화 제도 변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운영과 의례 절차를 정리한 <종묘의궤(宗廟儀軌, 1706)>를 볼 수 있습니다.

종묘제례에서 음식을 담아 서쪽에 올리는 대나무로 만든 제기 변(籩)과 동쪽에 올리는 나무로 만든 제기 두(豆), 제사상 가운데에 올리는 곡식을 담은 사각형의 제기 보(簠)와 원형의 제기 궤(簋), 제사상에 올리는 술잔 작(爵)과 술잔을 받치는 작점(爵坫)도 볼 수 있습니다.

춘하(春夏)의 제사에서 쓰이는 준소상(樽所床)의 배치도 볼 수 있습니다.

맨 뒤쪽 가운데에 촛대가 있고, 그 왼쪽에 계이(鷄彝, 닭이 새겨진 술항아리)가 오른쪽에는 조이(鳥彝, 봉황이 새겨진 술항아리)가 있고, 그 아래로 희준(犧尊, 소 모양의 술항아리), 상준(象尊, 코끼리 모양의 술항아리), 산뢰(山罍, 산이 새겨진 술항아리)가 있죠. 산뢰 위에 멱(冪)이라는 제기를 덮는 덮개가 있고, 그 위에 용작(龍勺, 용머리가 장식된 국자)가 올려져 있습니다.

이제는 조선 왕실의 상징과 품격을 보여주는 다양한 물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처음에는 모란도 병풍과 배안상, 그리고 배안상 위에 올려진 어보함과 옥책함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제 조선 왕실의 어보(御寶)와 어책(御冊)을 살펴봅시다.

어보(御寶)는 왕비나 왕세자 등의 책봉명이나 업적을 칭송하고 행적을 기리는 이름(존호, 시호 등)을 새긴 의례용 도장이며, 어책(御冊)은 의례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기록한 책을 말합니다. 보통 조선시대에서 책봉식을 할 때, 오색 비단에 책임을 다하도록 훈계하고 깨우쳐주는 글을 적은 교명(敎命)과 함께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제작한 어보와 어책이 함께 내려졌습니다. 그렇게 교명, 어보, 어책은 왕과 왕비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었으며, 사후에는 종묘에 봉안되어 조선 왕실의 역사와 정통성을 증명하였다고 합니다.

1872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지 480년이 된 기념으로 고종은 조선 건국을 기념하고 태조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그에게 '응천조통광훈영명(應天肇統廣勳永命, 하늘에 부응해 (조선의) 정통을 창시하고, 넓은 공로를 세워 영원히 명맥을 이음)'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 그리고 태조 추상존호 금보(太祖 追上尊號 金寶, 1872)를 제작하여 조선 왕조의 시작을 창시한 태조의 대업을 기렸습니다. 이 어보에는 '강헌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의 어보(康獻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之寶)'라고 쓰여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 태조는 1899년에 고황제(高皇帝)라는 시호를 받고, 태조고황제보(太祖高皇帝寶)라고 쓰인 어보와 어책이 올려졌다고 하네요.

1698년에 세조(1417-1468)에 의해 끌어내려졌던 노산대군(단종, 1441-1457) 단종 복위식이 열렸습니다. 이때 그의 묘호 단종을 오리며 제작된 <단종추상시호옥책(端宗追上諡號玉冊, 1698)>과 단종의 부인에게 정순이라는 시호와 단량제경이라는 휘호를 올리며 제작된 <단종비정순왕후상시호옥책(端宗妃定順王后上諡號玉冊, 1698)>가 제작되었죠. 그리고 이들의 신주를 종묘에 모셨는데, 그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 바로 <단종대왕정순왕후복위부묘도감의궤(端宗大王定順王后復位祔廟都監儀軌, 1698)>입니다.

영조(1694-1776)의 양어머니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가 칠순을 맞이한 1756년, 이 해는 1755년에 일어난 나주괴서사건(나주벽서사건, 1755) 이후 나라의 상황을 수습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영의정 이천보 등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체천건극성공신화(體天建極聖功神化, 하늘을 체화하고 (정국을) 세워 다스리며, 성스러운 공과 신묘한 교화를 이룸)'이라는 존호를 받아 <영조가상존호옥보(英祖加上尊號玉寶, 1756)>를 새로 만들어졌고, 나주괘서사건을 안정시켰던 영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영조가상존호옥책(英祖加上尊號玉冊, 1756)>도 새로 만들어졌고, 이는 영조가상존호옥책함에 담깁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그의 덕행과 통치를 공식적으로 기리기 위해 '익문선무 희경현효'라는 시호와 '영종'이라는 묘호를 올리면서 영조상휘호옥책(英祖上諡號玉冊, 1776)>이 만들어졌고, 이는 영조상휘호옥책함에 담깁니다. 그 외에도 이 전시에는 영조상존위옥책함(1740), 영호추상휘호옥책함(1890)도 볼 수 있습니다.

책봉될 왕세손 정조에게 교훈과 경계의 글을 써서 내린 <정조 봉왕세손 죽책(正祖 封王世孫 竹冊, 1759)>과 정조의 왕세손인(王世孫印, 1759) 그리고 <정조 봉왕세손 교명(正祖 封王世孫 敎命, 1759)>를 통해 정조가 왕세자로 책봉된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영조가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 기사의 삭제를 요청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만들어 내린 정조 효손 은인(正祖 孝孫 銀印, 1776)과 인록(印盝, 인장을 담는 함)입니다. 국왕의 친필이 새겨진 매우 드문 왕실 어보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영조가 왕세손 정조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며 내린 홍색 바탕의 문서 두루마리 <유세손서(諭世孫書, 1776)>입니다.

영조는 이 문서에서 정조의 효심을 높이 평가하고, 그가 조선의 종묘사직을 이어 갈 세손임을 밝혔는데요. 정조는 즉위 후 조회나 행차 때마다 유세손서와 은인(銀印)을 가까 이 두고 영조의 뜻을 계승한 정통성을 가진 왕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챕터가 끝나고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이 제공하는 실감 영상으로 만나는 왕실의 혼례, 가례에 대한 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을 지나갑니다.

이제 어진(御眞)을 보러 갑니다.

어진(御眞)은 국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국왕의 생전에는 봉안처에, 사후에는 진전(眞殿,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신 전각)에 봉안하여 관리하였다고 합니다. 이 어진은 실제 국왕과 동일한 위상을 가졌다고 여겨졌기에, 어진을 옮길 때 의장을 갖추었고, 이 어진을 제작 혹은 보수하거나 봉안할 때는 항상 일월오봉도와 함께 모셔졌습니다.

잇따른 전란에 의해 1935년에는 모사본 2점을 합쳐 총 46점이 있었으나, 이후 한국전쟁(1950-1953)과 부산 용두산 대화재(1954)로 45점이 불탔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어진은 2점의 영조 어진(연잉군 시절, 영조 재위 시절)과 1점의 철종 어진이었죠..

어진과 함께 조선 국왕의 신성한 권위와 영원한 통치를 상징하는 해와 달, 다섯 개의 봉우리, 소나무와 폭포 등이 그려진 궁중 장식화 <일월오봉도>입니다. 조선 왕실의 원칙에 따라 편전 같은 공식 집무 공간을 포함하여 야외 행사나 궁 밖의 임시 거처까지 임금이 머무는 모든 곳에 이 병풍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월오봉도 앞에 왕이 직접 자리하거나 어진이 모셔져야 비로소 '왕의 공간'이라는 신성성이 완성됩니다. 둘 이상이 같이 모여야 하나가 된다는 점에서 뭔가 멋있네요.

이제 왕실의 담백함과 엄격한 격식이 공존하는 격조 높은 일상을 보여주는 조선왕실 문화를 살펴봅니다. 

궁궐 전각의 벽장문에 그려 넣은 창호 그림 중 <군록장생도 벽장문(群鹿長生圖壁欌門)>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름처럼 매우 많은 사슴들이 그려져 있으며, 붉은 해와 둥근달, 소나무, 복숭아나무, 학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순조 재위 기간 중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동궐도>입니다. 동궐은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창덕궁과 창경궁에 해당합니다. 현대 이 동궐도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한 본씩 전한다고 하네요.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가 썼던 두루주머니, 향주머니, 삼작노리개, 장신구 상자, 영친왕비가 입었던 붉은 원삼, 영친왕비가 썼던 비녀, 머리꽃이, 뒤꽂이 등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쪽에는 명성황후가 쓴 한글 편지와 봉투들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한자 초서체를 보는 듯합니다.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작동에 위치했다가 도로 건설로 1991년에 여월동으로 이장이 시작된 화유옹주묘에서 출토된 병, 합, 등잔대, 잔, 담배합 등의 생활용품들도 눈에 띄고, 직물 위에 봉황 무늬를 그려 넣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왕실 보자기도 아름답습니다.

18세기 후반 관요(官窯, 관이 관리하던 가마)에서 왕실 의례용으로 제작된 산수와 꽃, 새 무늬가 그려진 백자 청화 항아리와 17-18세기 초에 관요에서 제작된 왕실용 백자 큰 항아리도 볼 수 있습니다.

달과 함께 바라보는 백자 달항아리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동래부와 조선통신사를 축으로 전개된 일본과의 성신교린(誠信交隣, 성실과 믿음으로 이웃과 사귐) 외교를 통해 조선 후기 200년간 지속된 조일 평화 관계가 이어집니다. 그 흔적을 살펴봅니다.

조선 시대 사역원(司譯院, 외교 업무와 역관 양성을 담당한 관청)의 역관(譯官) 김지남(金指南, 1654-?)과 그의 아들 김경문(金慶門, ?-?)을 중심으로 사역원의 연혁과 관직, 중국과 일본 등 이웃나라와의 외교 절차를 정리한 <통문관지(通文館志, 1720/1874)>를 통해 대외 외교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봉래(동래)에서 동래부사 조석명(趙錫命, 1674-1753)이 동래에서 지인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그림과 함께 엮은 서화집인 <봉래주창록(蓬萊酬唱錄, 18C)>, 조선 후기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의 손자 정황(鄭榥, 1735-?)의 <동래태종대도(東萊太宗臺圖, 18C)>을 통해 당시 부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죠.

이덕성(李德成, 1655-1704)이 동래부사로 부임할 당시 지인들에게 받은 송별 시첩들을 모아 엮은 <봉래별장첩(蓬萊別章帖, 1688)>도 볼 수 있고, 그의 나이 42세에 그려진 초상화도 볼 수 있습니다. 이덕성은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687년 동래부사로 임명되었고, 그는 부임 후 일본인의 불법 행위와 왜관을 통한 밀무역을 엄격히 단속하고 징계 하는 데 힘썼다고 합니다.

1609년,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1609)>를 맺고 국교를 재개하였습니다. 이때 외교와 무역의 창구는 동래부((현) 부산)로 엄격히 제한하면서 동래부는 대일 외교권을 독점하는 국가적 요충지로 거듭났습니다. 이곳의 책임자이자 관리자인 동래부사는 정 3품 이상의 고위 관원으로, 남방 정세를 총괄하며 일본의 긴박한 정세를 조선 국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당시 동래부는 초량왜관을 관할하며 왜관 출입과 무역을 통제하였으며, 조선통신사의 출발과 귀국을 총괄하고 지원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동래부사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를 보게 됩니다.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을 맞이하고 접대하는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그린 10폭 병풍은 동래부와 초량왜관 일대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그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림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동래읍성->부산진성->초량왜관 설문->초량객사->성신당과 빈일헌->연향대청의 순서로 이어집니다.

<동래부산고지도(東萊釜山古地圖)>와 동래 출신 화가 변박(卞璞, ?-?)이 그린 <왜관도(1783)>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선 후기에 총 12차례 파견된 대일 공식 외교 사절단 조선통신사(1607-1811)에 관한 기록들을 이제 살펴볼 시간입니다. 한양에서 에도성까지 왕복 약 4600km의 대장정을 거치며 양국의 평화 체제를 공고히 했던 조선통신사는 그 200년간의 한일 평화 공존의 가치로 인정받아 2017년 한일 양국의 공동 신청으로 UEN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이때 등재된 총 333점의 기록물 중 한국에 124점, 일본에 209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부산 영도 해련사에 전해 내려오는 동래부 인상(東萊府 印床)입니다. 조선시대 행사나 연회 때 사용하던 연향 가구의 일종으로, 천판(天板) 아래에 목서 명문을 통해 신미년(1811년)에 파견된 마지막 조선통신사 사행 때 썼던 인상임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명문에 등장하는 박수량과 이영준의 이름은 무신 유상필(柳相弼, 1782-?)이 쓴 <동사록(東槎錄, 1811)>에서 확인되어 문헌 자료의 실증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조선통신사행렬도>, <조선통신사전풍(에도성내응접도)>, <통신사선도>와 같은 다양한 작품과 기록도 볼 수 있고요.

일본 에도 시대 중기의 화가 가노 류세쓰(狩野柳雪, 1647-1712)가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의 무장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爲朝, 1139-1170)의 고사를 그린 <진제이 하치로도 병풍(鎭西八郞圖屛風)>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병풍은 에도 막부과 조선 국왕에게 보낸 금병풍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통신사가 조선 국왕의 국서와 예물을 에도 막부 쇼군에게 전달한 뒤, 막부가 이 그림을 포함한 다양한 예물과 답서를 주어 조선에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그림들도 볼 수 있습니다.

제7차 조선통신사(1682) 사행 중 성완(成琬, 1639-1710)과 이담령(李聃齡, ?-?), 홍세태(洪世泰, 1654-1725) 등 조선통신사 일행과 일본 문인 야마다 겐킨(山田復軒, 1666-1693)이 주고받은 시문을 1683년에 두루마리에 필사한 <조선통신사수창시(朝鮮通信使酬唱詩, 1683)>과 제9차 조선통신사(1719) 사행 중 조선통신사 서기인 성몽량(成夢良, 1673-1735)과 일본인 문인 의헌(曦軒, 기켄?)이 함께 행서체로 시를 지어 쓴 <의헌·성몽량 필 행서(義軒成夢良筆行書, 1719)>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 국가의 지식인들의 교류를 살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본 에도 시대 중기의 화가 하나부사 잇초(英一蝶, 1652-1724)가 그린 <조선통신사마상흡연도(朝鮮通信使馬上喫煙図)>입니다. 1711년에 파견된 제8차 조선통신사 일행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중 하나로, 말을 탄 채 긴 담뱃대를 문 인물과 말을 끄는 시종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공식적 행렬이 아닌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한 점이 흥미롭습니다. 

조선통신사와 후지산, 해돋이를 묘사한 색회통신사문대명(色繪通信使文大皿), 후지산을 배경으로 깃발을 든 조선통신사를 그린 백자청화통신사문접시(白磁靑畫通信使文楪匙), 청도(淸道, 길을 맑게 함(길을 치움)) 한글 모양의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든 조선통신사 인물을 묘사한 조선통신사녹유도자기(朝鮮通信使綠釉陶瓷器)도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로시 엠 윤(Dorothy M. Yoon, 윤미연)의 <매직 부산(Magic Busan)>이라는 작품입니다. 역동적인 부산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찬란한 디지털 빛으로 시각화하여 시공간을 초월해 확장되는 부산의 독창적 가치를 전하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그렇게 기록으로 살펴보는 조선과 부산의 역사 전시는 끝납니다. 정말 많은 곳에서 이 전시를 위해 유물 대여와 자료를 제공해 주셨어요!

 

이번 특별전은 단순히 왕실의 보물이나 아름다운 유물을 감상하는 전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이 어떤 원칙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그 과정과 의례, 외교, 문화까지 어떻게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려 했는지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 부산이라는 공간에서 국립고궁박물관과 부산박물관이 함께 조선의 기록문화와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조명했다는 점이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어보와 어진, 그리고 조선통신사 기록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기록이 곧 국가의 기억이자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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