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통제가 퇴위함으로 중국의 군주제가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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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통제가 퇴위함으로 중국의 군주제가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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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통제 퇴위 조서와 내용

청실퇴위조서(清室退位詔書)라고도 불리는 선통제퇴위조서(宣統帝退位詔書)는 청나라에서 마지막 수렴청정을 한 황태우 융우(隆裕)가 군주를 대신하여 1912년 2월 12일 반포한 중국 진시황이 창설했던 황제제도의 폐지를 선언한 퇴위조서이다.

 

이 조서는 대청제국 지배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동시에 중국에서의 황제제도 종식을 상징한다.


 旨朕欽奉
隆裕皇太后懿旨前因民軍起事各省響應九夏沸騰
 生靈塗炭特命袁世凱遣員與民軍代表討論大局
 議開國會公決政體兩月以來尚無確當辦法南北
 暌隔彼此相持商輟於途士露於野徒以國體一日
 不決故民生一日不安今全國人民心理多傾向共
 和南中各省既倡議於前北方諸將亦主張於後人
 心所嚮天命可知予亦何忍因一姓之尊榮拂兆民
 之好惡是用外觀大勢内審輿情特率皇帝將統治
 權公諸全國定為共和立憲國體近慰海内厭亂望
 治之心遠協古聖天下為公之義袁世凱前經資政
 院選舉為總理大臣當茲新舊代謝之際宜有南北
 統一之方即由袁世凱以全權組織臨時共和政府
 與民軍協商統一辦法總期人民安堵海宇乂安仍
 合滿漢蒙回藏五族完全領土為一大中華民國予
 與皇帝得以退處寛閑優游歲月長受國民之優禮
親見郅治之吿成豈不懿歟欽此                          


宣統三年十二月二十五日 


内閣總理大臣 臣 袁世凱
署外務大臣 臣 胡惟德
民政大臣 臣 趙秉鈞
署度支大臣 臣 紹英  假
學務大臣 臣 唐景崇  假
陸軍大臣  臣 王士珍  假
署海軍大臣  臣 譚學衡
司法大臣  臣 沈家本 假
署農工商大臣  臣 熙彥
署郵傳大臣  臣 梁士詒
理藩大臣  臣 達壽

 

봉지(奉旨)
짐흠(朕欽)은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의 의지(懿旨)를 받들었다.
전에 민군이 거사하여 각 성이 호응하니 구하(九夏, 중국)가 들끓고, 생령(生靈)이 도탄에 빠지더라. 특명으로 파견된 위안스카이(袁世凱)와 민군대표(民軍代表)에게 대국을 토론하고 국회를 열고, 정체(政體)를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두달이 지나도록 확실한 방법이 없는 채로, 남북이 헤어져 서로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길에는 상업이 중단되고, 들에는 선비가 나다니고 있다. 나랏빛으로 하루하루 버티니 민생은 매일매일 불안하기만 하다.
현재 전 국민의 심리는 공화정에 많이 기울어져 있다. 남중(南中) 각 성과 앞서 (황실을 지키겠다는 뜻을) 발의한 북방의 장수들도 뒤에서 (공화정을) 주창했다. 사람의 마음이 지향하는 바를 천명은 알 수 있으니, 나는 성 한 사람의 영광으로서, 만 백성의 호오심(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어찌 참으랴.
밖으로 대세, 안으로 민심, 특히 황제가 통솔한 통치권이 전국에 공표하여 공화입헌국체(共和立憲國體)로 결정했다. 국란을 다스리는 마음을 위로하고, 옛 성인과 천하(古聖天下)를 공의로 여기며 멀리 협력하리라.
위안스카이는 자정원(資政院)을 거쳐 총리대신으로 선출됐는데, 신구교대(新舊代謝) 때 남북통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며, 그(위안스카이)가 전권으로 임시 공화정부를 조직해 민군과 통일방법을 협의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모든 시기가 지나면 인민과 나라안(海宇)은 안정될 것이고, 여전히 만(滿), 한(漢), 몽(蒙), 회(回), 장(藏) 5족의 모든 영토는 하나의 대중화민국(大中華民國)이 될 것이다. 나와 황제께서는 (정치의) 간섭에서 물러나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고, 국민의 예의를 길이 받을 것이다. 친히 태평성대가 이루어지는데,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
흠모한다.

선통 3년 12월 25일(1912년 2월 12일)

내각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
서리외무대신(署理外務大臣) 후웨이더(胡惟德)
민정대신 자오빙쥔(趙秉鈞)
서리탁지대신(署理度支大臣) 샤오잉(紹英) 假
학무대신 탕징총(唐景崇) 假
육군대신 왕시진(王士珍) 假
서리해군대신(署理海軍大臣) 탄후예헤(譚學衡)
사법대신 선자번(沈家本) 假
서리농공상대신(署理農工商大臣) 히얀(熙彥)
서리우전대신(署理郵傳大臣) 량스이(梁士詒)
이번대신 다쇼우(達壽)

 

2. 어떻게 쓰여지게 되었는가?

1911년 10월 우창봉기를 시작으로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후난성을 포함해 18성 대부분이 혁명의 흐름에 따라 독립을 선언하고 있었다. 만주족 대신 인창(廕昌)은 혁명을 진압하였으나, 북양군은 위안스카이의 지배 아래 있었기에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전투는 무력화되었다.

 

이에 피로감을 느낀 융유태후(隆裕太后)는 인창에게 육군대신을 서리하게 하고, 위안스카이를 할 수 없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삼아 혁명군을 정벌하기 시작했다.

 

황후의 명을 받은 위안스카이는 곧 북양 제1군 대통령관 펑궈장(馮國壯)과 북양 제2군 대통령관인 캉치루이(丹基瑞)를 이끌고 출정했지만, 이해득실을 따지며 계획한 일을 벌리게 된다. 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출병하면서, 한편으로는 혁명당과의 담판을 통해 몰래 결탁한 것이다..

 

1911년 12월 '위안스카이가 황실을 공격한다면(혁명당을 따른다면) 임시대총통 자리를 넘겨줄 것'이라고 합의한 남북의화(南北議和)를 거치며 위안스카이는 공화국에서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러 상황에서도 청의 내부 갈등은 여전했고, 당시 북양군 장수였던 돤치루이(段祺瑞)는 1912년 2월 2일, 위안스카이의 지시로 49명의 문무대원들과 '북양군 50장걸은 공화국을 수립하라고 요구한다'는 내용의 '북양오십장걸공화전(北洋五十將乞共和電)'을 청 정부에 보내게 되었고, 또 연이어(2월 4일) 다른 전보를 보내 황실을 압박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청 정부는 더이상 해답이 없다고 체념한 채로 위에 적힌 조서를 1912년 2월 12일에 공포하게 되었으며, 자금성은 북양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렇게 만주족의 청나라는 한족 군벌 및 임시 정부에 의해 쓰러지게 된다. 만주족 아래에서 무릎꿇고 있던 한족들은 이제 다시 일어서려고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중국 대륙을 향하고 있었다. 이후 중국은 외부로는 일본과 같은 군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았고, 내부로는 힘을 얻으려는 여러 군벌들이 중국을 좀먹게 되며, 여러 정치 체제와 사상이 나타나며 대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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