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 천년의 숨결, 돌과 금빛으로 피어난 신라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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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 천년의 숨결, 돌과 금빛으로 피어난 신라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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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신라의 찬란한 미술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미술관(2002.05.-)입니다. 

경주 석굴암에 새겨져 있는 십일면관음보살, 보현보살, 제석천의 탑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1. 불교조각실

신라 헌덕왕이 재위하던 817년에 이차돈을 기리기 위해 백률사에 건립되었던 추모비인 이차돈 순교비입니다.

불교를 공인시키기 위해 자신을 죽여 대업을 이뤄달라는 이차돈의 전언을 수락한 법흥왕은 그의 계획대로 흥륜사를 짓고 있었던 이차돈의 목을 베라고 시킵니다. 그렇게 그의 목을 베자 흰 젖이 약 3m 정도 치솟았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목 위에 길게 그려진 선이 그 젖(혹은 피)입니다!

경주읍성에서 발견된 8세기에 만들어진 사천왕상입니다.

다양한 곳에서 발굴된 금강역사상와 사자상도 볼 수 있죠.

석굴암에 있었던 금강역사상입니다. 안타깝게도 벽에 붙인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수리할 때 해체되었습니다.

작은 여러 종류의 불상들과 부처의 발 조각과 나발(부처의 머리) 조각도 볼 수 있죠.

이차돈 순교비가 있었던 백률사에 봉안되어 있던 경주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위엄이 잘 느껴집니다.

경주 낭산 중생사터 부근에 있던 얼굴이 모두 열한 개인 십일면관음보살을 새긴 십일면관음보살상입니다. 투박한 일반인 같은 느낌이 드는 보살상입니다.

얇은 돌 위에 돋을새김한 머리 부분만 남은 보살상입니다.

7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慶州 南山 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입니다. 특히 가운데의 큰 불상은 의자에 앉은 듯한 모습인 의자좌(倚子座) 형태를 띠는데, 이는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중 엄청 드문 형태의 불상이라고 하네요.

 

1-2. 1층과 2층 사이

높이 125cm의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松花山 石造半跏思惟像)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은 인도에서 창안된 형태로 중국에서 5-6세기에, 한국에서는 6-7세기에, 일본에서는 7-8세기에 크게 유행합니다. 이 불상도 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견 당시 머리와 양팔이 잘려나간 상태였습니다.

경주 남산 용장계 석조약사여래좌상입니다. 남산 용장계(茸長溪) 법당골에서 만들어진 높이 305.5cm의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입니다. 원래 머리와 몸체가 분리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당시 접합해서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7세기 황룡사 금당의 지붕에 있었던 치미(鴟尾, 망새)입니다. 망새 혹은 치미(鴟尾)는 전각, 문루 등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를 말하는데요. 186cm 높이에 105cm의 너비를 가진 이 황룡사 금당의 치미가 이 정도 크기라면... 황룡사 금당은 얼마나 거대했을까요?

 

1-3. 불교사원실

<삼국유사>에서 '절이 별처럼 많고 탑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신라 왕경 경주에는 엄청 많은 절과 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수많은 발굴조사에서 사실로 드러났죠. 544년에 천경림(天鏡林) 자리에 흥륜사라는 절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불교 종교 건축물이 완공된 이후 6세기 중엽에는 월성 주변에, 7세기 후반에는 남산과 낭산 등에, 8세기 이후에는 토함산과 경주 지역 외곽까지 곳곳에 불교 사원이 들어섭니다. 그렇게 현재까지 300곳이 알려져 있고, 그 중 문헌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곳은 100곳 정도라고 합니다. 탑과 불상이나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곳은 약 5곳이고, 발굴하여 위치를 알 수 있는 곳은 약 30곳 정도라고 하네요. 그 중에서도 유명한 약 39곳의 절과 절터들의 목록을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에서 발견된 심초석(심주를 바치는 초석) 사리공 덮개돌입니다. 사리공(舍利孔, 사리 구멍) 안에 사리외함을 넣고 사리외함 안에 다시 사리내함(찰주본기)을 봉안하고 덮개돌을 놓았다고 합니다. 원래 덮개돌 가운데를 뚫어 둥근 금속 손잡이를 끼워 넣은 다음 돌 아랫면에 붙인 금동판과 연결하였는데, 1964년 사리공 안의 사리장엄구가 도굴될 때 덮개돌이 크게 깨지면서 손잡이도 부서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1966년에 사리장엄구를 되찾았다고 하네요.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터 심초석 사리공 안에 있던 사리내함으로 쓰인 황룡사찰주본기입니다. 여기에는 '신라의 자장(慈藏)의 건의로 황룡사 구층목탑을 짓기 시작해 645년에 완공했으나 195년이 지난 840년쯤에 탑이 기울어진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렇게 박거물(朴居勿) 등이 871년에 보수공사를 시작해 872년에 완공하고 찰주 및 사리공 점검 후 찰주본기를 써서 세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사리공 안 사리함에 담겨 있던 진신사리, 의례용기, 꾸미개, 낫, 도끼, 가위, 가락바퀴, 금실, 운모(雲母, mica), 은판, 청동판, 아연판, 청동 허리띠 꾸미개, 합(盒, 음식을 담는 그릇), 사리기, 구슬, 금은제 연꽃모양 받침, 금동철제장식구 등의 사리장엄구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리함을 지키기 위에 세워졌던 약 약 66.70m 높이로 추정되는 황룡사 구층 목탑의 복원 미니어처를 볼 수 있습니다.

흥륜사, 황룡사, 사천왕사 등 칠불시대(전불시대)에 부처가 있었다는 일곱곳에 세워진 신라 왕성의 7곳의 유명 사찰 칠처가람(七處伽藍)에 있었던 기와들도 볼 수 있죠.

시간이 지나서 화려했던 사리장엄구는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8세기 이후부터 모두 간소화되는 형태를 보입니다. 다중사리기는 외함, 사리병판 등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공양품 종류와 수량도 줄었습니다. 한편 8세기 초에 중국에서 전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향력은 더욱 커집니다. 이를 따르는 사리장엄과 탑을 만드는 활동은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활발히 이루어졌고, 통일신라 후기에 보편화됩니다.

679년 경주 낭산에 사천왕사가 지어집니다. 고대 토속신앙에서 신성하게 여겼던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가 들어서며 호국불교의 성지가 되었죠. 성전사원 중 위계가 가장 높은 곳으로 최초의 쌍탑1급당식절이며, 이후에 세운 감은사(682-), 망덕사(685-)를 포함하여 8세기 불국사, 천군동 절터,인왕동 절터 등의 가람배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곳에 세워진 동탑과 성탑의 기단부 네 면을 장식한 녹유신장상 벽전(綠釉神將像甓塼)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승려 양지(良志)가 만들었다고 전하죠. 정말 인간형의 모습을 잘 묘사했습니다.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경합(經盒, 경전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곳에는 산스크리트어 수구다라니와 한자 수구다라니가 같이 들어 있었는데,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수구다라니라고 합니다. 이 옆면에는 보상화무늬와 신장상(神將像)을 새기고 여백에 어자문(魚子文, 어자무늬)를 배치했다고 합니다.

경주 감은사 터 내 서쪽에 위치한 7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도 볼 수 있습니다. 수정 사리병이 사리 내함에 있었고, 그 사리 내함은 사리 외함을 덮고 있는 형태입니다. 

특히 이 수정사리병은 구슬과 연꽃잎으로 장식된 그릇 모양의 뚜껑이 덮고 있는 모습인데요. 크기가 엄청 작아서 어떻게 이런걸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갑산사 터에서 발견된 전불(塼佛, 벽돌에 새긴 불상)도 볼 수 있습니다. 건물 장식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데요. 가운데 부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과 화불을 대칭으로 두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찰예술을 볼 수 있는 작품을 볼 수 있었죠. 정말 신라의 불교미술은 엄청 아름답고 경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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