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사전을 읽어보면 환국이라는 단어가 2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자기)나라로 돌아오다'라는 뜻의 환국(還國). 귀국(歸國)과 같은 뜻이다.
두번째, '시국(판국)이 바뀌다'라는 뜻의 환국(換局).
우리가 살펴볼 환국은 2번째 換局이다.
역사학에서 환국(換局)이란 17~18세기 조선시대에 집권세력이 급변하면서 정권을 잡고 있던 붕당이 바뀌는 정치적 변동을 말한다.
왕 | 연도 | 환국 명칭 | 세력 변화 |
숙종(1674~1720) | 1680 | 경신환국 | 남인->서인 |
1689 | 기사환국 | 서인->남인 | |
1694 | 갑술환국 | 남인->서인 | |
영조(1724~1776) | 1725 | 을사환국 | 서인(소론->노론) |
1727 | 정미환국 | 서인(소론->노론) |
1. 경신환국(1680)
1674년 | 2월 | 갑인예송 |
9월 | 숙종 즉위 | |
1676년 | 1월 | 도제찰사부 재설치 |
1677년 | 6월 | 도제찰사부 폐지 |
1678년 | 12월 | 도제찰사부 재설치 |
1680년 |
3월 | 유악남용사건 |
3~4월 | 경신환국 |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이 일어났고, 그 때 시어머니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예송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참고 : https://mspproject2023.tistory.com/276)
갑인예송, 환국 정치의 시작..?
1674년(현종 15) 2월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이 일어났고, 그 때 시어머니였던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예송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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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예송으로 남인이 권력을 얻었고, 그 상황에서 막 즉위한 어린 숙종은 서인을 요직에 등재시켜 남인을 견제한다.
1676년 윤휴 등의 남인 세력은 북벌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도제찰사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려 했고, 이를 알아챈 숙종은 즉시 해당 기구의 요직에 서인을 세운다. 몇해가 지난 1680년 3월, 효종은 남인 허적의 할아버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려주며 연시연(시호를 내려주는 행사)을 개최하도록 했다.
신학(申㶅)·이인빈(李寅賓)을 장령으로 삼고, 참찬(參贊) 윤승길(尹承吉)에게 숙간(肅簡)이란 시호를, 지사 허잠(許潛)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고 상신 정태화(鄭泰和)에게 익헌(翼憲)이란 시호를, 고 상신 이성구(李聖求)에게 정숙(貞肅)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
- <조선왕조실록> 1680년 3월 18일
그런데 하필 연시연 행사가 열리던 날 비가 오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온 것을 알게된 숙종은 허적에게 궁중에서 쓰는 비를 피하기 위해 기름을 바른 천막인 유악(帷幄)을 빌려주려고 했지만 이미 허적은 그것을 들고 가버린 것이다.. 숙종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허적이 이미 천막 가져간 사실을 확인하고 분노한다. 빅찐빠...
(연시연 행사 때 있었던 일은 <숙종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연려실기술>에서 기록된 내용인 점 참고하길 바란다.)
이 일로 숙종은 도제찰사부에서 군권을 휘두르던 남인을 대거 몰아내고 서인을 그 빈자리에 앉히는데, 이 사건을 경신년에 일어난 환국, 즉 '경신환국'이라고 부른다.
2. 기사환국(1689)
1616년~1683년 |
명청 전쟁 | |
1644년~1662년 |
남명 | |
1662년~1683년 | 동녕국(정씨왕국) | |
1680년 | 12월 | 인경왕후 사망 |
1681년 |
인현왕후 왕비 등극 | |
1686년 |
희빈 장씨 숙원 등극 | |
1688년 | 11월 | 이윤 탄생(희빈 장씨의 아들이자 훗날 경종) |
1689년 | 기사환국 |
숙종의 부인 인경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사망해버린다. 1년 뒤 인현왕후가 왕비로 간택되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1688년 11월, 숙종이 친애했던 희빈 장씨가 아이를 낳게 된다. 이 때부터 조정에는 서인과 인현왕후 vs 남인과 희빈 장씨의 대결 구도가 펼쳐졌다.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계기는 인현왕후는 서인계 집안의 딸이었으며, 역관이던 희빈 장씨의 아버지는 남인계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서인측에서는 절대 이윤은 장자로 등극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다른 아들이 아직 없으니 당연히 이윤이 적자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때 숙종은 국내외 정세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며 희빈 장씨와 남인 계열의 손을 들어주고, 서인 세력들을 몰아냈다. 이 사건으로 이윤은 후에 경종이 된다. 지금까지 기사년(1689)에 일어났던 기사환국이었다.
3. 갑술환국(1694)
1693년 | 4월 | 숙원 최씨 숙빈 등극 |
1694년 |
3월 | 함이완 고변사건 |
4월 | 인현왕후 복위 | |
1701년 | 8월 | 인현왕후 사망 |
1694년 3월 남인 우의정 민암(閔黯)은 서인 세력이 환국을 도모한다는 이야기를 함이완(咸以完)에게서 듣게 되고, 이를 즉시 왕에게 보고한다.
지난해 봄에 신이 한 종류의 사람들이 재물을 거두어 무리를 모집한다는 일로써 탑전에서 대략 진술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이 바야흐로 금영 제조(禁營提調)로 봉직하고 있는데, 금영(禁營)의 군관 최산해(崔山海)가 와서 그 매부인 함이완(咸以完)에게 알려서 ‘어떤 일로 뵈려고 문밖에 있습니다.’고 하므로, 신이 들어와 보게 했더니, 함이완이 들어와서 말하기를, ‘제가 마침 최격(崔格)이란 자와 이웃이 되었는데, 최격의 말에 ‘전(前)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김경함(金慶咸)과 내외종 형제가 되는데, 김경함이 귀양간 후로부터 이내 그 일을 주장하여, 김진귀(金鎭龜)의 아들 김춘택(金春澤)과 유명일(兪命一)의 아들 유복기(兪復基)와 유태기(兪泰基) 등과 모여서 의논하고, 또 강만태(康晩泰), 변진영(邊震英), 홍만익(洪萬翼), 변이보(卞爾輔)의 아들 변학령(卞鶴齡), 이돌(李突), 김기문(金起門)의 아들 김보명(金寶命), 김도명(金道明), 이동번(李東蕃), 박세건(朴世建), 이기정(李起貞), 이후성(李後成), 채이장(蔡以章), 이진명(李震明), 이시도(李時棹), 이시재(李時材 혹은 이시회(李時檜)) 등으로써 도당(徒黨)을 삼아, 각기 금전과 포백을 내었으며, 홍이도(洪以度)가 전라 병사(全羅兵使)가 되었을 때, 군포를 많이 내어 이를 도왔는데, 이에 모두 그 재물을 한중혁과 강만태에게 맡겨서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서 그 남는 비용은 쓴 데를 묻지 않았으니, 술과 음식으로 따뜻하게 먹여서 당여(黨與)를 많이 기르고는, 이내 환관, 폐인(嬖人)과 척가(戚家)인 장희재(張希載)에게 뇌물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개 이 무리들의 이러한 일은 나라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마는, 다만 그들의 발자취가 매우 숨겨진 까닭으로 그들이 아무아무인 것을 자세히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제 함이완이 이미 이름을 가리켜 고발하였으니, 명백히 조사하여 죄를 논정하여 그들의 음모와 사계(邪計)를 깨뜨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여 사실을 알아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1694년 3월 23일, 남인 우의정 민암
이에 대해 숙종은 바로 처벌령을 내린다. 조사자들이 국문 과정에서 완강히 혐의를 부인을 하던 중 김인, 박귀근, 박의길은 오히려 남인이 고변을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다.
먼저 때를 잃은 무리들이 자못 원망을 품고서 바야흐로 은화를 모아서 계의한 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또 장희재(張希載)가 돈으로 김해성(金海成)에게 뇌물을 주어 꾀어 내어 그 처모(妻母, 최숙원(崔淑媛)의 숙모)로 하여금 최숙원을 독살하려고 한다는 것을 말하고, 또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와 훈국 별장(訓局別將) 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데도, 대장(이의징)이 참여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또 (남인) 민암(閔黯), 오시복(吳始復), 목창명(睦昌明)이 서로 연결된 형상을 들었으며, 또 윤희가 여러 조신(朝紳)들과 더불어 사사로이 서로 묻고 주는 서신으로써 고변서 안에 동봉하여 증거로 삼게 했는데도, 윤희의 서신에는 모두 다만 근복 문안(謹伏問安)이란 4글자만 썼으며, 김원섭(金元燮)과 민장도(閔章道)에게 보낸 서신에는 앞에 모의한 일이 있었다는 말은 있지 않았습니다.
1694년 3월 29일, 유학(幼學) 김인(金寅), 유조서리(留曹書吏) 박귀근(朴貴根), 보인(保人) 박의길(朴義吉)의 고변서(告變書)
숙종은 3일 뒤 비망기를 하달한다.
"지난번 빈청(賓廳)의 일차(日次)는 국기(國忌)이었는데도 서둘러 와서 모이기에, 변방의 정상이 아니면 시끄러운 꼬투리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더니, 입시하였을 때에 우의정 민암(閔黯)이 과연 함이완(咸以完)의 일을 아뢰고, 이어서 금부를 시켜 가두고서 추핵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본디 윤허하였으나, 민암이 홀로 함이완을 만나 수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심스러워하였다. 겨우 하루가 지나니 금부의 당상이 방자하게 청대하여 옥사(獄事)를 확대하여, 예전에 갇혀서 추고받던 자가 이제는 도리어 옥사를 국문하게 되고, 예전에 죄를 정하던 자가 이제는 도리어 극형을 받게 되었다. 하루 이틀에 차꼬, 칼, 용수를 쓴 수인(囚人)이 금오에 차게 하고, 서로 고하고 끌어대면 문득 면질을 청하고, 면질이 겨우 끝나면 거의 죄다 처형을 청하니, 이렇게 하여 마지않으면 그 전후에 끌어댄 자도 장차 차례로 죄로 얽어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주의 집과 한편 사람은 고문과 귀양가는 죄를 면할 자가 드물 것이다.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참국한 대신(大臣) 이하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하라.
1694년 4월 1일, 숙종의 비망기
숙종은 이번 사건을 함이완의 밀고를이용한 민암의 서인 축출 시도라고 보았고, 이를 통해 정계에 있던 남인 세력을 서인 세력으로 교체하게 된다..!
4. 을사환국(1725)
1721년~1722년 |
신임옥사 | |
1724년 | 8월 | 경종 사망 영조 즉위 |
1725년 | 을사환국 |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즉위 직후 삼정승 자리에 소론을 앉히면서 노론의 민진원(閔鎭遠)을 석방시킨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했던 소론을 안심시키면서도 노론에게 조금이라도 보답을 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노론은 완전한 권력을 얻고 싶어했고, 영조는 자신이 노론에 의해 등재된 왕이면서도 노론을 위해 존재하는 왕이 되고 싶어하지 않다는 이미지를 서인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또 노론과 소론의 권력을 잘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했다.
영조는 이를 위해 나름 애를 썼는데, 소론을 요직에 앉혔다가도 금방 노론으로 자리를 바꾸거나, 반란을 꾸몄다는 명목으로 노론의 고위 인사 목호룡을 참살하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삼사(三司) 제신의 직을 특파(特罷)하였다. 전교하기를, "김일경에게 율(律)을 가하자는 말이 혹 대신에게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중신(重臣)에게서 나오기도 했으나, 삼사는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이 위패(違牌)가 서로 잇따라 관망하는 것처럼 했었으니,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하겠는가? 전후의 삼사는 아울러 파직하라." 하고, 이어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능(陵)에 행행(幸行)할 때 위패한 것으로써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원명(趙遠命)을 파직하여 윤봉조(尹鳳朝)로 대신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진검(李眞儉)을 파직하였는데, 사람을 가릴 때까지 낭관(郞官)을 시켜 번갈아 행하게 하였다. 또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세최(李世最)를 체직하라고 명하고, 또 전 참판 황일하(黃一夏)의 서용을 명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신임(申銋)은 대신(臺臣)이 비록 출륙(出陸)을 다시 정지하기를 청했으나, 이번 방송(放送)은 이와는 다름이 있으며 잇따라 아뢰는 것으로 미루는 것은 옳지 않으니, 특별히 방송하라." 하고, 또 김흥경(金興慶)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유명홍(兪命弘)을 대사간(大司諫)으로, 허윤(許玧)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김상옥(金相玉)·박성로(朴聖輅)를 승지(承旨)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영조실록>(1725년 1월 11일)
1725년 1월, 영조는 당시 삼사의 신하들이 예(禮)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보고 파직시키고, 노론 윤봉조 등을 그 자리에 앉히면서 정국은 노론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많은 서론이 관직에서 쫓겨나고 노론이 대거 등용되는데, 이를 을사년(1725)년에 일어한 환국, 을사환국이라고 부른다.
5. 정미환국(1727)
을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노론은 임인옥사의 주역인 소론 김일경 일파들을 처벌하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영조는 노론의 이런 요구까지 들어주게 되면 모든 국정 운영을 노론에게 넘겨지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국정을 이끌어 나갔다. 또한 정미환국 이후 2년 동안 영조는 더 이상의 급변하는 정치변동이 일어나면 안되겠다고 더욱 결심하게 되었고, 왕권 강화를 할 필요성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영조는 소론 조문명(趙文命), 노론 민진원(閔鎭遠) 등과 함께 탕평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궐에는 이미 많은 노론들이 있던 상황...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1727년 7월 영조는 일주일도 안되어서 요직에서 노론 강경파를 내쫓고 에서 소론 온건파를 등용한다. 이후 노론, 소론의 온건파들과 영조는 탕평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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