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년에 한반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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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에 한반도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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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뜬금없이 이 글을 적느냐에 대해 의아할지도 모른다. 내 동기가 '63년에 폼페이에 화산 터졌대. 근데 그 때 우리나라에선 뭐했음?'이라고 물어보길래 나도 궁금해져서 정리한 글이다.

 

2020년까지 발견된 사서들을 보면 63년 한반도에는 최소 3명의 국가와 왕이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신라의 탈해 이사금, 고구려의 태조대왕, 백제의 다루왕이다.

탈해 이사금 7년(63년) 겨울 10월 (음력)


백제 (다루)왕이 영토를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 탈해)왕이 가지 않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다루왕 36년(63년) 겨울 10월 (음력)


(백제 다루왕) 36년 겨울 10월에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렀다. 곧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 탈해왕이)  듣지 않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사기>에서는 63년에 일어난 동일한 사건을 주어와 목적어를 바꾸어 2가지 버전으로 소개하고 있다. 위 내용을 객관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동10월 백제왕이 낭자성(娘子城)에 가서 사로에게 회맹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백제왕이 땅을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 [지금 청주부(淸州府)]에 이르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회맹을 요청하였으나, 신라 왕이 좇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두 나라는 화의를 잃었다.


- <동사강목 제1하 계해년>

 

우선 낭자곡이라는 곳의 위치부터 알아보자.

청주목(淸州牧)

본래 백제의 상당현(上黨縣)이다. [일명 낭비성(娘臂城)이라고 하고, 일명 낭자곡(娘子谷)이라고 한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였고,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청주(淸州)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설치하고, 이윽고 주(州)에 전절군(全節軍)을 설치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군(軍)을 폐지하고 다시 청주목으로 삼았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르다가 혜장왕(惠莊王) 때에 진(鎭)을 설치하고, 광해군(光海君) 때에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시켰다가 이윽고 다시 청주로 삼았다. 


- <동국여지지 충청도(忠淸道) 좌도(左道) 청주진(淸州鎭)>

백제 상당현(낭비성, 낭자곡)->신라 서원소경->신라 서원경->고려 청주목->조선 청주

충주목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명종(明宗) 5년(1550)에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시켰다. [이홍윤(李洪胤)의 난 때문이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정묘년(1567)에 다시 복귀시켰다 [무옥(誣獄)으로 하옥되었기 때문이다.] 광해주 5년(1613)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유인발(柳仁發)이 반역하다가 주륙당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1623)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6년에 다시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되었다. [안집중(安執中)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2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채문형(蔡門亨)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효종 3년(1652)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숙종 6년(1680)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영종 5년(1729)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조겸(李祖謙)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4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1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지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24년에 복귀되었다가 31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유수원(柳壽垣)이 반역죄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복귀되었다.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충청도 충주목>

임나국->백제 낭자곡성(낭자성, 미을성)->조선 충주군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하고,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목(牧)을 설치하고,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전절군(全節軍)이라 불렀고, 중원도(中原道)에 소속되었다. 현종(顯宗) 3년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가 9년에 8목(牧)을 설치하여 다시 목으로 되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르던 중,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써 목의 일을 겸하여 맡아 보게 하다가 이내 폐지하였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충청도 청주목>

백제 상당현(낭비성, 낭자곡)->신라 서원소경->신라 서원경->고려 청주목

청주목(淸州牧)은 충청도(忠淸道)에서 따왔다. 삼한(三韓) 때 마한(馬韓)의 땅이었다. 삼국(三國) 때 백제(百濟) 상당현(上黨縣)이다. 혹은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 하였다. 후신라(後新羅) 신문왕(神文王) 때 서원소경(西原小京)이라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때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으며,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백곡선생집 권1 청주정씨가승서>

마한->백제 상당현(낭비성, 낭자곡)->신라 서원소경->신라 서원경->고려 청주

 

 

마한     임나국
백제 상당현(낭비성, 낭자곡) 백제 상당현(낭비성, 낭자곡) 백제 상당현(낭비성, 낭자곡) 백제 낭자곡성(낭자성, 미을성)
신라 서원소경  
신라 서원경  
고려 청주목  
조선 청주목 조선 충주군

위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낭자곡성이 현재의 청주나 충주라고 주장하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요약하면, 서기 63년 백제와 신라는 한반도 중부의 충청북도 부근에서 만날 뻔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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