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를 사랑으로 감쌌던, 샤브단 바티르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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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를 사랑으로 감쌌던, 샤브단 바티르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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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필아르모니야(필하모니아) 아래 젊은이 가로수길(Аллея Молодёжи) 중간에 

베이(대공) 아타케 바티르(Атаке-батыр)의 후손이자 잔타이 카라베코프(Джантай Карабеков)의 아들의 동상, 샤브단 바티르 기념상(Памятник Шабдану Баатыру)이 세워졌죠.

씨족 사리바기쉬(Сарыбагыш)의 후예로 1839년 이식쿨 북쪽변에서 태어난 샤브단 바티르(Шабдан Баатыр, 1839-1912)는 민족에 대한 충성심, 근면, 명예, 군사적 용기, 자연에 대한 존중과 같은 유목민의 정신 속에서 성장합니다.

1900년대의 튀르키스탄 총독부(출처 : Turkestan_1900-es.svg: Wassily)

1862년, 러시아제국(1721-1917)이 악수 요새(крепость Ак-Суу)와 메르케 요새(крепость  Мерке)를 점령하자 그의 아버지 잔타이 카라베코프가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러시아 제국에 복종하게 되었죠. 이를 시작으로 결국 1867년에 튀르키스탄 총독부(Туркестанское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ство, 1867-1917)가 세워지며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의 영토는 러시아에 편입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러시아 제국과 키르기스스탄을 하나로 묶는 업무를 진행했죠.

그러는 한편, 이제 그는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을 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키르기스인들이 농업 양봉, 수공예품 제작 등에 집중하게 하며 정착 생활을 꾀해 현대 키르기스인의 안정된 생활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는 한편, '읽고 쓰는 능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1909년 사비를 들여 마드라사(이슬람교 학교)를 지어 교육하거나 지금 볘르늬 시(Верный, 1867-1921, (현)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러시아 김나지움에 학생들을 보내는 등 교육에도 투자합니다. 또 가난한 자들에게 돈, 가축, 음식을 아낌없이 주는 관대함도 보였죠.

 

그렇게 키르기스의 현대화를 꾀했던 그는 1912년 사망했는데, 8일간 진행된 장례식에는 5만 명의 사람이 참여했으며, 1500개의 유르트가 설치되었고, 양 10000마리, 말 2000마리가 도축되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주요한 키르기스 부족의 대표들이 그의 장례식을 위해 모였을 정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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