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연 생가터는 독립유공자 정오연이 일제의 가혹한 압박 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음에도 오랜 세월 동안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여 그의 가족이 정오연의 행적을 기리며 알리고자 운영하고 있는 쉼터(구멍가게)입니다.
정오연은 일제로부터 모든 소지품을 압수당하여 사진 한 장 조차 남아있지 않았으나, 동생 정성연씨가 형의 행적을 입증하고자 동분서주하여 노력한 끝에 돌아가신 정오연의 독립운동 활동 내역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그의 값진 발자취를 전시해 놓음으로써 독립운동선열을 제대로 모실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가족의 노력으로 독립열사 정오연은 항일학생운동 행적을 인정받아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으며, 같은 해 9월 25일 부산공업대학교((현)부경대학교)에서 명예졸업장 제1호를 받게 됩니다. 2020년 11월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위패가 봉안됩니다.
기념관 내부엔 주기도문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아 이 집안 분들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부산진교회의 장로였던 '병암 여운부' 시인이 쓴 것이라고 합니다.
민족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신 정오연(鄭五然, 1928.04.05.~1945.05.09, 만17세)은 1943년 봄에 독서회(讀書會)에 가입합니다. 1944년 5월엔 이 독서회는 순국당(殉國黨)으로 개편 발전되었는데, 이후 1944년 7월, 중국에 있던 광복군에 참가 결의를 하여 평양에서 일경에게 발각되어 잡혀갑니다. 그렇게 1945년 5월 옥중에서 모진 고문으로 순국했는데,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95년 5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게 됩니다.
그 옆 위쪽에선 당시 순국당을 운영했던 차병곤, 정오연, 박정오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일본 군사시설 폭파 목적으로 부산진교회 기독학생들이 결성한 순국당원들이 거사 직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당수 차병곤, 폭파담당 정오연 등은 극심한 옥중 고문으로 병보석(1944년) 후 곧 세상을 떠나 사회장을 했다고 합니다.
부산진초등학교를 나온 다음(29회 졸업), 부산공립공업학교((현) 부경대학교)를 다닙니다. 당시 초등학교 교장이 일본인이었다고 하셨어요.
독서회(윤독회, 1943~1944)를 하다가 13명이 순국당(1944)을 개설한 뒤, 모여서 독립운동 하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부산 영도다리에서 혈서로 쓴 '대한독립만세' 벽보를 붙이는데 성공했으나, 그로 인해 조사가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복군에 참가하려고 길을 떠났는데, 누군가의 밀고로 평양에서 잡혔다고 하네요.. 그래서 당시 대청공원((현)중앙공원)에 있던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죽고 시체도 거기서 버려서 이날까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옥살이 중에 친구에게 '나는 자신이 없으니 너희들은 광복을 봐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러다 초등학교 같이 다녔던 사람들을 찾아 증인으로 세워 유공자로 추대되었다고 하네요.
순국당가 |
一 동월 동일 동시에 이 내몸 죽자고 용감한 이팔 소년 맹세를 하고 二 자유에 구속받은 우리의 민족 아름다운 강산에 꽃이 피도록 三 우리들은 순국당 단결하여서 끝까지 싸우리라 조국을 위하여 |
광복50주년을 맞아 고 정오연 형님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애국정신을 추모하며... 제(弟)성연 ㅇㅇ1995년 8월 15일 병암 여운부 |
졸업 사진 위에는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독립열사 정오연을 추모하면서 동생 정성연이 짓고, 병암 여운부가 쓴 <순국당가>도 걸려 있습니다. 그 옆에는 예수의 말씀 중 <요한복음>12장 24절의 구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는 문구가 남촌 남영호의 글씨로 쓰여있습니다.
옆에는 안중근의 유묵 중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가 있구요. 그 옆에는 9남 5녀 중 9남이었던 정오연의 동생이자 생가터 관리자인 시인 이영자씨의 남편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엄마를 안아도 손가락은 없다 |
차가운 형무소 안에서 얼마나 얻어 맞아 열병을 토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식 먹이려고 이것 저것 음식을 만들어 내 새끼 먹게 할려고 찾아갔더니 문 앞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형무소 간수 입에만 좋은 일 하다 돌아 온지 며 번인가? 구 남 오 녀 중 제일 사랑스럽던 내 아들 다섯번째 아들 오연아! 나라를 위해 이 큰일을 해 냈었구나 그러나 목숨까지 나라위해 바쳐 이 애미 가슴은 멍이 시커멓구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이 가난한 시절 애미 입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은 끼니마다 물 한 사발 유난히 다섯번째 손가락은 너무 아파 가슴마저 저여 오는구나 내 마음은 아프다가 이제는 엄마란 이름 갈 곳 없어 타다 남은 숯덩어리가 숯가루가 되어 훨 훨 날아 어느 나무 가지에 앉아 내 아들의 혼이 엄마 찾아 오려므나 |
9남 5녀 중 5남이었던 정오연이 형무소에 갇힌 이후 남편을 일찍 여읜 정오연의 어머니가 음식을 만들어서 가져다 주곤 했는데요. 그럴 때면 문앞에서 간수들이 다 뺏어먹어버리고 잘 있다고 거짓말쳤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었던 지금의 관리자 겸 시인이 그 일화를 듣고 시를 쓴 것도 걸려 있습니다.
입구쪽 마지막 사진입니다. 동래 온천천에서 친구들하고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라고 하네요.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시대가 시대인만큼 여기서도 일본옷을 입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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