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동구 좌천동의 좌천역 1번출구로 나와서 약 2~3분 정도 부산성산교회와 거제슈퍼 사이의 공간으로 걸어가면 거대한 돌모형이 있는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좌천동굴이죠~
아니면 부산성산교회쪽에서 오면 '좌천동굴'이라고 쓰인 큰 글자를 보고 더 쉽게 찾을 수도 있죠~
좌천동굴 |
개방시간 : 화~토 10:00~16:00 (공휴일 휴무) |
좌천동굴은 산복도로 르네상스 시범마을인 좌천동의 역사마을 조성 프로젝트 중 하나로, 마을의 역사 문화자원을 활용하여 공동체의 경제자립기반을 형성하는 주민주도형 마을 재생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곳 좌천동굴은, 2009년 도로개설 사업으로 동굴이 폐쇄되기 전까지 영업을 했던 이색주점 '동굴집'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좌천동 주민협의회 등 공동체의 노력으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방공호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되는 좌천동굴은, 한국전쟁 때는 피란민들이 동굴에서 살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민방위교육장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
좌천동굴의 다른 이름은 '좌천동 방공호(Jwacheon-dong air-raid shelter)'로, 부산미래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몇 번을 찾았다가 닫혀서 가지 못했는데, 이번에 찾을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동굴로 들어갑니다. 안에는 이 동굴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어르신 두 분이 앉아 계십니다.
"추억의 주막, 좌천동 동굴집" |
2009년 이전의 좌천동굴은 굴착 후 암반이 노출된 상태였으며, 5개소의 총 출입구 중 봉생병원 일대에 있었던 3개소는 아파트 공사로 인하여 폐쇄되었다. 폐쇄된 3개소를 제외한 나머지 2개소는 내부가 연결된 하나의 동굴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내부의 연결 통로를 차단하여 출입구를 달리 하는 2개의 동굴로 되어 있었으며 좌천동 동굴집으로 사용되었다. 좌천동 동굴집은 2009년 도로개설사업으로 동굴이 폐쇄되기 전까지 아구찜과 파전, 막걸리를 팔던 주점이었다. 동굴 특유의 음습함 때문에 에어컨이 없이도, 동굴 안쪽에서 나오는 서늘한 공기가 시원해 여름에 인기가 많았고 겨울에는 난로를 ㅍ피우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고 한다. |
푸른 빛이 나는 입구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옆에 보니 작은 샘이 있네요! 옛날에 장사할 때 여기 물로 장사하고, 콩나물도 키우고 그랬답니다~
좌천동굴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푸른 불빛도 아름다운데, 간간히 그려지고 붙은 장식도 아기자기해서 이뻤습니다~ 카메라로 다 담지 못해서 아쉽네요ㅠ
그 푸른 길을 따라 돌아나와 오른쪽을 보면 막혀 있는 동굴의 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동굴이 낮아지니 키가 큰 사람이 아니라도 고개를 조금 숙여서 지나가셔야 합니다.
저 끝의 닫힌 문까지도 방공호의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곳에선 한 때 동굴집으로 불리던 주막에서 팔던 '막걸리'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막걸리, 알고 마시면 더 맛있다" |
와인은 포도로 만든 과일주고, 막걸리는 곡식으로 만든 곡물주다. 곡식으로 술을 담가 발효가 되면 맑은 층과 앙금이 분리된다. 위로 맑게 뜨는 술이 청주(淸酒)인데, 막걸리는 청주를 거르기 전의 술로 증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막 걸러서 마신다고 해서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막걸리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삼국사기이다. 고려 때에는 막걸리용 누룩을 배꽃이 필 때에 만든다고 하여 이화주(梨花酒)로 불리었고, 맑지 않고 탁하기 때문에 '탁주(濁酒)'라 부르기도 하고, 식량대용 또는 갈증해소로 농부들이 애용해 왔으므로 농주(農酒)라고도 불려 왔다. 막걸리는 영양소가 매우 풍부하다. 80%를 차지하는 물을 제외한 나머지 20%는 알코올 6~7%, 단백질 2%, 탄수화물 0.8%, 지방 0.1%이며, 나머지 10%는 식이섬유와 비타민B, 비타민C, 유산균, 효모 등이 혼합된 영양의 보고이다. 그리고 막걸리 1ml에는 희석시키지 않은 생막걸리의 경우, 수백만에서 일억 마리 정도의 유산균이 들어 있다. |
다시 돌아 나와 작은 문을 통해 통로로 들어갑니다. 위를 보니 돌이 여기저기 박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방공호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의 임시거주지였으며, 이후 동굴집이라는 주막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역사기념물이 되었습니다.
"좌천동굴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방공호로 추정된다." | "좌천동굴은 6.25전쟁 시기의 피난민 임시거주지였다." |
일제강점기의 방공호는 태평양전쟁(1941~1945) 당시 미군의 공습과 상륙에 대비하여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 구축한 인공 동굴로서, 일제로부터의 억압을 보여 주는 또 다른 흔적이다. 좌천동 일대에 해당 방공호가 조성된 것은, 좌천동이 일본의 군대 물자가 수송되던 부산진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6.25전쟁 직전 약 40만 명이었던 부산의 인구는, 전쟁을 거치며 이북을 포함해 전국에서 부산으로 유입된 수십만의 피난민들로 인해 약 100만 명으로 급증하였다. 유입된 피난민들은 부산의 원도심부 산비탈에까지 거주지를 확보하기 위해 진출하게 되었고, 영주동, 동광동, 대청동, 보수동, 청학동 등지의 고지대까지 판잣집이 즐비한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용두산은 판잣집으로 숲을 이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부산의 피난민들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부족했고, 마실 물이 없어 잠겨 진 수도꼭지 앞에 양동이를 세워놓고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일어나는 화재는 피난민들이 가진 것을 송두리째 태워버렸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밥을 얻어먹으러 다녀 보기도 하고, 장사도 하고, 막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
조금 더 가면 처음 들어갔던 푸른 조명이 있는 입구쪽 길로 연결됩니다. 낮고 좁은 방공호로 쓰였던 이 동굴은 근대사의 아픈 기억부터 현대의 즐거운 맛집의 추억까지 모두 가지고 있는 수많은 세월과 이야기가 머물러 있는 곳으로 좌천동에 남아있습니다.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 > 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진교회 교육관 입구에서 읽는 역사 (2) | 2024.12.19 |
---|---|
순국당 사건의 주역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부산 정오연 생가터 (1) | 2024.12.19 |
초량6동 주거지 주차장 앞에 붙은 초량동 역사 안내판 (2) | 2024.12.18 |
왕실의 친척의 사무를 담당했던 위치 미상의 돈녕부터 (0) | 2024.12.14 |
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김수영 생가터 (0) | 2024.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