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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수원지를 건넌 100살 먹은 풍금이야기 |
부산이 근대 국제무역항으로 개항항 1876년 이후 개화기의 서양근대문물이 부산을 통하여 맨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문화전파에서 상이한 두 문화를 쉽게 융화시킬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이런 점을 잘 아는 서양 선교사들은 100여 년 전 부산항을 통해 기장 철마교회에 부산 최초로 풍금(風琴, organ)을 들여왔다. 부엉산 아래 오륜대 내를 건너 추파 오기영 선생이 <장전구곡가>를 노래하며 유람했던 아홉구비 길을 따라 1908년에 철마교회에 풍금이 도착하였다. 이 풍금은 호주 선교사 왕길지(겔슨 엔겔(Gelson Engel, 1868-1954))가 동래에서 철마까지 오륜대를 지나는 30리 길을 따라 마차에 싣고와 신설된 철마교회(1908년 1월 창립)에 기증한 것이다. 2012년 부산직할시 승격 50주년 기념행사인 '부산의 보물을 찾아라'는 부산기네스시민공모에서 부산 최고(最古)의 풍금으로 선정되어, 부산을 읽는 100개의 키워드 중에서 8위로 선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큰 것이다. 지금은 동래중앙교회 3층에 위치한 부산 한국기독교선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철마에서 동래장터까지 |
철마사람들은 30리 길을 걸어 동래장에 가서 생산한 농산물을 내다 팔고 다시 생필품을 구입해서 돌아왔는데, 철마와 동래장 사이의 연결 통로가 회동수원지였다. 회동수원지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철마에서 봇짐을 지고 철마 구곡천을 돌고 돌아 아홉산 아래 산길까지 와서 냇가를 건너 오륜대 허리를 돌아서 여우가 나온다는 야시고개(지금의 부산카톨릭대 윗자락)을 넘어서 기찰을 거쳐 동래온천장 입구를 지나 동래장(2일, 7일)을 보러 다니던 길이었다. 1942년 회동수원지 댐공사가 준공되면서는 철마와 오륜대 사이 냇가 길이 끊어져 육로가 막히게 되자, 철마사람들은 줄배(매어놓은 줄을 당겨서 강을 건너는 배)를 타고 이곳을 건너 동래장으로 갔다. 가끔 밤늦게 돌아올 때는 울바위 근처에서 살쾡이를 만나는 일이 빈번하여 철마로 가는 입구의 기찰탁주도가에서 다른 일행을 기다리는 사이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함께 귀가하였다. 많을 때는 50여 대의 소달구지가 모였으며, 한 줄로 늘어서서 요령소리를 울리면서 돌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기찰탁주도가가 한 때 번성했던 것은 동래장을 오가는 철마사람들 때문은 아닌지 추측해 본다. |
개좌고개(개제고개)의 전설 |
회동수원지를 끼고 있는 동편 아흡산 뒤의 개좌고개는 옛날 철마에서 부산 동래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고재에서 가까운 연구리에는 서홍인이리는 효자가 살았는데,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성(釜山鎭城)에 입방군(入防軍, 변진(邊鎭)에 들어가 방어하는 군대)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서홍인은 노부모를 모셔야 하는 입장이라 날이 밝기 전에 조반을 챙겨 놓고 험한 개좌고개를 넘어 부산진성까지가서 입번(入番, 당직)을 마치고 매일 60리가 넘는 먼 길을 왕래하였다. 그 길이 외롭고 위험하여 집에서 기르던 개 한마리와 길동무 삼아 함께 다녔다. 그러던 어느 해 이른 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피곤하여 잠시 쉬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사이 바위 너설에 걸어둔 횃불이 풀숲으로 번져 불이 났다. 이를 본 개는 짖으며 주인을 깨웠지만 잠에 끓아 떨어진 주인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충성스러운 개는 산 밀에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 온몸에물을 적셔 와서 주인이 잠든 자리 주변을 딩굴었다. 이러기를 여러 번 되풀이 하던 개는 지칠대로 지쳐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불에 타 죽고 말았다. 한참뒤 잠에서 깬 서홍인은 개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자리에 누렁개를 묻어주고 통곡하였다. 이 충성스러운 개의 희생을 마을 사람들이 전해 듣고 이 고개를 개가 주인의 생명을 보살펴 준 고개라하여 개좌(한실, 大谷) 고개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
상현마을 유래 |
상현마을(上賢마을)은 선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지금의 선동 9통 일대에 있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리, 소산리의 2개 리동으로 분동 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선리라 불러오다가, 1962년 동래군 선리가 되었다. 1966년 부산직할시 동래구 선동, 1988년 부산직할시 금정구 선동, 1995년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동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선동은 선돌[立石]이 있어, 이를 한자의 음으로 표기하면서 선동이라 불렀다. 오륜대가 인접하여 신선이 머물며 노닐었다는 데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선동이라 지칭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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