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7 - 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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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연표] 삼국유사에 기록된 한국사 연표 7 - 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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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한지가 어연 5~6년, 수능 공부를 하면서 재밌게 봤던 이 책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던 내용들, 교과서를 만들때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았던 내용들도 있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 '연도, 기록 (인용도서 이름)' 순으로 기재함
* '-xxx년'은 '기원전 xxx년'이라는 표기임
* 연도가 같은 두 개 이상의 사건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인지 모를 경우, 연호의 ㄱㄴㄷ 순서대로 기록 혹은 삼국사기, 고려사 등 타사서를 참고함

개요 원년(681), (신라) 문무왕이 장차 승하하려고 하여 (신라) 신문(왕)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짐의 명을 잊지 말아라”라고 했다. 신문(왕)이 즉위하자 (경흥법사를) 국로로 책봉하고 삼랑사에 살게 했다.

 

장수 원년 임진(692) (신라) 효소왕이 즉위하여 망덕사를 처음 세워 당 황실의 덕을 받들게 했다.

 

(장수) 8년(699) 정유(697) (???) , 낙성회를 베풀었는데 왕이 친히 가마를 타고 와서 공양했다. 한 비구가 있었는데 외양이 남루하였다.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빈도 또한 재를 보겠습니다”라고 청했다. 왕이 평상의 끝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장차 재가 끝나려 하니 왕이 그를 희롱하여 말했다. “어느 곳에 주석하는가?” 중이 비파암이라고 했다. 왕이 “이제 가면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라고 말하니 중이 웃으면서 “폐하도 역시 사람들에게 진신 석가를 공양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는 몸을 솟구쳐 하늘에 떠서 남쪽을 향해 갔다. 왕이 놀라고 부끄럽게 여겨 동쪽 산으로 달려 올라가 그 방향을 향해 멀리서 예를 취하고 사람들에게 가서 그를 찾게 했다. 남산 삼성곡, 혹은 대적천원이라는 곳에 이르니 바위 위에 지팡이와 바리를 두고 사라졌다. 사자가 와서 결과를 보고하니 드디어 비파암 밑에 석가사를 세우고, 모습을 감춘 곳에 불무사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를 나누어 두었다. 두 절은 지금(=고려)도 있으나 지팡이와 바리는 사라졌다.

(어떤 연호 혹은 어떤 왕의 8년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흐름상 장수 8년이 아닌가 싶어 그 연호를 기록하고 비슷한 시기의 정유년을 적었다.)

 

(신라) 경덕왕 14년(755), 망덕사 탑이 흔들리니 이 해에 안사의 난이 있었다. 신라인들이 말하기를 “당 황실을 위해 이 절을 세웠으니 마땅히 그에 응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하기를 9년, 을미(755 혹은 815) 정월 21일, (신라 욱면이) 예불하다가 집 대들보를 뚫고 나가 소백산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곳에 보리사를 짓고, 산 아래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곧 그 자리에 (제)2보리사를 짓고 그 불전에 '욱면등천지전'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지붕 용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아름 가량 되었으나 비록 폭우와 폭설이 와도 젖지 않았다. (승전)

(현재 학자들에 따라서 위의 일화가 755년 혹은 815년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보며 연도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일연은 '향중고전'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대의 일이라고 하여 755년에 일어났을 것으로 비정하고 쓴다.)

 

경덕왕 19년 경자(760) 4월 삭, 두 해가 함께 나타나 10일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인연이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행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왕의 가마는 청양루에 행차하여 인연이 있는 중을 기다렸다. 이때에 월명사가 밭두둑의 남쪽 길을 가고 있으니 왕이 사람을 보내 그를 불러오게 하여 단을 열고 계문을 짓게 했다. 월명사가 아뢰었다. “신승은 단지 국선의 무리에만 속하여 향가만 풀 뿐이고 범성은 익숙하지 않습니다.” 왕이 “이미 인연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비록 향가를 쓰더라도 좋다”라고 했다. 월명사가 이에 도솔가(兜率歌)註 169를 지어서 읊었다.

 

정원 9년(793), (중국의) 신도징이 황관에서 한주 십방현위로 임명되어, 진부현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에 이르렀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는데 길 가에 초가집이 있어 그 안에 불을 피워 매우 따뜻했다. 등불을 비춰 나아가 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는데 그 처녀는 나이가 바야흐로 14~(1)5세쯤 되어 보였다. 비록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처럼 흰 살결과 꽃 같은 얼굴이며 동작이 아름다웠다. 그 부모는 신도징이 온 것을 보고 황급히 일어나서 말했다. “손님은 심한 한설을 만났으니 청컨대 앞으로 나와 불을 쪼이십시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었는데 하늘색은 이미 어둑어둑해졌으나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이 말하기를 “서쪽으로 현에 가려면 아직 멀었으니 여기에서 자게 해주기를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부모가 말했다. “진실로 누추한 집안이라도 미천하게 여기지 않으시다면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 신도징이 마침내 말안장을 풀고 침구를 폈다. 그 처녀는 손님이 바야흐로 머무는 것을 보고 얼굴을 닦고 곱게 단장을 하고는 장막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한아한 자태는 처음보다 오히려 뛰어났다. 신도징이 말했다. “소낭자는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남보다 뛰어납니다. 다행히 아직 혼인하지 않았으면 감히 혼인하기를 청하니 어떠합니까?” 아버지는 말하기를 “기약하지 않은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어찌 연분이 아니겠습니까.” 신도징은 마침내 사위의 예를 행하였고 곧 타고 온 말에 그를 태우고 갔다.

 

원화 3년 무자(신라 애장왕대, 808). 욱면의 일이 있었다. (본전)

 

정화 연간(1111~1118), 사신이 말하길, (고려) 김부식이 일찍이 사신으로 송에 들어갔는데 우신관에 가니 한 당(=집)에 여선상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고려)의 신인데 공은 아는가?”라고 하였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에 닿아 아들을 낳았는데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딸은 지선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있었으니 이것이 그 상이다”라고 했다.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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