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장씨족보 권1 갑인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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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덕수장씨족보 권1 갑인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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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보서(甲寅譜序)
(서기1974년)
온 천하만물이 천(千)갈래 만(萬)갈래로 갈라져 있으되, 거슬러 올라가면 그 근본은 단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덕수장문(德水張門)의 겨례도 아직 그 수효를 다 헤아릴 수 없을만치 많지만 우리의 조상은 시조이신공숙공(恭潚公, 휘 순룡(張舜), 1255~1297)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공숙공 할아버님의 똑같은 후손이어늘, 어찌 서로 화목하며 의좋게 살지 않을 수 있으며 서로 도웁고 서로 아껴가며 다 함께 잘 살아 보지 않을까보냐.

공숙공의 초휘(初諱)는 삼가(三哥)이시며, 몽고(蒙古, 몽골)의 후신인 원나라(1271~1368)에 계시다가 고려(高麗, 918~1392) 때에 충렬왕비(忠烈王妃)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의 수행원으로 이 땅에 오신지 3년만에 비로소 지금의 성씨(장(張))와 휘자(諱字)(순룡(張舜))를 충렬왕으로부터 받으셨다.

시조님께서 이 땅에 오실 무렵 고려왕조는 정치적으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을 분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소위 '사라센' 문화라고 일컬으는 회회문화(回回文化)가 원나라 전토(全土)에 융성하였던만큼 고려에도 큰 영향을 입었으며, 그 계통의 천문·수학·역법·관측의기(觀測儀器) 등은 이조(李朝)에까지 전래되었거니와, 공숙공께서는 고려에 오신 후 온갖 충성으로써 충렬왕을 보필(輔弼)하시는 한편 고려의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하여 원나라의 사행(使行)을 도맡다시피 봉행(奉行)하셨으며, 공숙공께서 세상을 따나신지 불과 1개월만에 충렬왕은 그의 아들 충선왕(忠宣王)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우리 시조님 저택(邸宅)에 퇴거(退居)하면서 이를 '덕자궁(德慈宮)'이라 하였음이 <고려사기(高麗史記)>를 통하여 전해지고 있다.

우리 장문(張門)에는 옛적의 구보(舊譜)가 병화(兵火)로 인하여 모두 산일(散佚)된 것으로 알려져 있거니와 오늘까지 세전되어 오고 있는 족보는 지금으로부터 166년전에 유정공(柳亭公)의 운손(雲孫)(8대손)이시며 경력공(經歷公)의 현손(玄孫)(4대손) 되시는 통덕랑공(通德郞公) 휘(諱) 지혁(至赫)과 대사간공(大司諫公) 휘(諱) 지면(至冕) 양(兩) 족조(族祖)의 주재(主宰)로 발간된 <무진보(戊辰譜)>(2책)가 최고간(最古刊)이며, 그 후 대사간공의 종손(從孫)이신 도정공(都正公) 휘(諱) 익(瀷) 족장(族丈)을 중심으로 간행된 <무신보(戊申譜)>(3책)와 <을해보(乙亥譜)>(5책), 그리고 도정공의 현윤(賢胤) 은산군수(殷山郡守)  신근(㥲根) 족형(族兄) 주도로 <을묘뵤(乙卯譜)>(6책)가 최후로 간행되었는데, 이상 4차에 걸친 문중대역(門中大役)이 모두 경력공 문하(門下)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후에도 은산공(殷山公)의 현군(賢君) 훈보(勳甫)가 보소(譜所)를 개설하고 수단을 추진하다가 비록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좌절(挫折)되었으나, 그 역시 경력공의 계하(系下)이었음을 상기케 한다.

그로부터 30여 성상(星霜,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와서야 60년만에 온 문중 제현(諸賢)의 힘찬 성원(聲援)과 불타는 열의로써 금차의 보서(譜書)가 출간케 됨을 족친첨위(族親僉位, 족친 여러분)와 함께 기쁨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보첩(報牒)이란 한 할아버지로부터 퍼진 후예(後裔)의 세대와 계열(系列)을 서록(叙錄)하여 각자의 혈통을 바로 알며 선조의 소목(昭穆)을 밝힘과 아울려 조상을 추모하고 일가간에 친목을 두터이 하려함에 그 목적이 있거니와, 그 보다 선조의 얼을 이어 받으며 자기의 근본을 찾기 위하여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그런데 족보는 옛날에나 필요한 것이며 현시대에는 전혀 필요가 없는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 모양같으나, 적과 싸우는 전쟁에 있어서 승리를 거두려면 먼저 적황(敵况)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위한 병법의 철칙이어늘, 오늘과 같이 치열(熾烈)한 생존경쟁에서 자기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승리할 수 있을까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다.


싸움에는 승리가 있어야 하며 종문(宗門)에는 족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갖 정성을 기울여 이 보서(譜書)를 편찬하는 바이며, 이 족보가 간행되는 날부터 우리는 더욱 합심협력하여 존조정신의 철저(徹底)와 자손만대의 행복을 빌며 온 문중이 단란(團欒)해짐으로써 우리 장문(張門)은 다시 중흥의 길로 들어서서 장차 눈부신 발전과 번영(繁榮)을 누릴 것으로 확신함과 아울러 역대의 조상님께서도 기뻐하시어 틀림없이 홍복(鴻福, 洪福)을 내리실 것으로 믿어 마지않는 바이다.
대한민국56년(서기1974년) 갑인 맹춘(孟春, 음력 1월)에
불초후손(不肖後孫) 홍근(鴻根) 근서(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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