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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보서(戊辰譜序) |
족(族)이란 같은 성씨의 겨레붙이요, 보(譜)란 그 겨레붙이의 혈통관계를 엮은 책이다. 옛날 송나라(960~1279) 정부자(程夫子, 정호와 정이)는 인심을 다스리고 종족을 거느리며 풍속을 후(厚)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근본을 잊지 않게 하려면 모름지기 보계(譜系)를 밝히고 세족(世族)을 거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대저 만물이 태어남에 근본은 하나이며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 되었는데 행여 존조(尊祖)하는 의리와 목족(睦族)하는 도리를 소홀(疎忽)히 한다면 이는 그 근본을 잊음이요. 이미 한 집안에서 인(仁)을 일으키지 못하면서 또한 어떻게 한 나라에 미풍양속이 이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정자(程子, 정호와 정이)의 말은 다만 백성을 교화하고 양속(良俗)을 이루는 요도(要道)가 될 뿐만 아니라 천하만세(天下萬世)의 민생을 위한 기강을 확립한 뜻도 된다. 이에 주나라 우왕(禹王)*이 홍수(洪水)를 다스리고 제후에게 토지와 백성을 내렸고 황제(皇帝)가 봉군(封君)에게 나라를 전(傳)할 새 입사성(廿四姓, 24성)을 얻음과 같은 일들이 저절로 성씨의 유래가 되었고 또한 주나라 사관(史官) 소사(小史)가 나라의 기록을 맡아 계세(繋世)를 정하고 소목(昭穆)을 밝힘은 그 종법(宗法)이 세워진 유래가 아니겠는가. 이제야 사람들이 저마다 질서(秩序)를 돈신(惇信)하는 의리와 인척간(姻戚間)에 화목(和睦)하는 도리를 알게 되어 이로서 효제심(孝悌心)이 일고 이로서 충의심(忠義心)이 선다. 이 점은 선왕의 백서이 모두 착하여 집집마다 표창(表彰)할 수 있는 까닭이며 그 돈후(惇厚)한 미풍양속은 후세에 가서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동방의 나라는 사대부로서 나라를 세웠기에 신분높고 권세있는 집안은 또한 능히 보계를 잘 닦음으로서 종지(宗支)를 분별하였고 종지를 엄하게 하여 그 근본을 든든하게 하였으니 집안에는 정답게 화목하는 풍습이 있고 나라 안에는 어질고 후덕한 미속(美俗)을 이루게 하는 까닭이 된다. <시경(詩經)>이 이르지 않았던가. 백성이 뜻을 이루어 먹고 사는데 편하기만 하더라 하고, 이는 참으로 성인(聖人)이 위에 있어 인효로 다스릴 것을 장려(奬勵)하고 인도(引導)하여 나갔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 장씨(張氏)는 본시(本是) 중국의 소주(韶州, (현)광둥성 사오관시) 사람이다. 그 계출(系出)인 대장군(大將軍) 휘(諱) 순룡(舜龍, 1255~1297)께서 원나라 장공주(長公主, 제국대장공주, 1259~1297)를 따라 동래(東來)하여 덕수현(德水縣)을 식읍으로 받았다. 덕수(德水)는 지금의 풍덕(豊德)이다. 자손은 이로 인하여 성씨의 관향(貫鄕)으로 정하였고 기후(其後) 몇 대를 지나 휘 핵(翮)에 이르러 비로서 조선국(朝鮮國)에 입조(入朝)하여 벼슬 자리가 판윤(判尹)이었다. 이로부터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 실로 동국(東國)에서 우러러 보는 씨족이 되었다. 불행히도 대대로 전해 오던 옛날 보첩(報牒)이 임진계사(壬辰癸巳)의 왜란중(倭亂中) 흩어져 없어졌고 다만 사사로이 간직하였던 가승보(家乘譜) 한 질(帙)이 남아 있는데 곧 종증대부(從曾大夫)인 계곡공(谿谷公)께서 손수 엮은 것으로 족보라 하지 않고 굳이 가승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공은 일찌기 문헌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또한 번거로워서 어지럽게 되는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오호라 계곡공의 의중에는 이미 이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대저 공의 총명과 문장으로서도 오히려 정중(鄭重)하고 진중하게 다루기 어려운 바 있었은즉 이제와서 족보가 없다는 것이 어찌 작은 뜻마저 갖기 못하였다고 하겠는가. 오호라 족보를 간행하지 못하였으므로 종중(宗中) 법도가 서지 못하고 종중 법도가 서지 못하므로 파속(派屬)을 밝히지 못하고, 파속을 밝히지 못하므로 족당(族黨)이 흩어진다. 대체로 보아 이와 같으니 친목하는 정성과 조상의 은공에 보답하고 먼 윗대를 추모하는 마음을 말함에 또한 어찌 족보없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이는 우리 장씨가 갈수록 쇠퇴해지는 까닭이며 일찌기 무능함이 한스러워 탄식으로 밤을 새웠다. 재종형(再從兄) 지혁씨(至赫氏)는 좋은 일에 뜻이 있는 선비다. 어느날 좌중에서 언성(言聲)을 높여 말하기를 근세에 와서 사대부는 보책(譜冊)을 갖지 못한 이가 없는데 우리 집안에는 아직도 종족(宗族)을 거두고 후손을 가르치는 보서(譜書)가없으니 참으로 미쳐 겨를을 내지 못한 일이다. 나는 앞으로 공론(公論)에 붙이어 이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내가 이에 응답하여 말하기를 매우 좋으나 이 일을 하려면 어떻게 감당(堪當)하겠읍니까 하였더니 이르기를 우리는 반드시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굽히지 않고 크게 하나로 뭉치어 춘추사(春秋史)의 근엄을 본받아 사실대로만 쓰는 곧은 붓을 잡고 동호(董狐)가 지은 좋은 사서(史書)와 같이 쓴다면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그렇다고 하며 잠자코 있는데 앞으로 족보가 완성되면 서문을 나에게 부탁(付託)한다고 하기에 나는 외롭게 자라 견문이 좁다고 사양(辭讓)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제 겨우 그 개요를 기술하였다. 하늘이 내고 땅이 기른 중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인의예지의 성품(性稟)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부자 형제 부부의 윤리와 노인을 존경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한는 도리가 있으니 집안에는 은혜와 의리, 독행(篤行)과 선행이 항상(恒常)있고 자손이 번성하여 먼 후대에 가서 천지백파(千支白派)로 나누어지며 결국 종가(宗家)가 이를 거느리고 계파는 이에서 나누어진 사실을 기록함으로서 친소(親疎)가 구별된다. 이것이 족보라고 이름지은 이유이다. 무릇 우리 조상의 자손은 모두가 선조의 공덕에 보답하는 정성을 독실(篤實)히 하며 서친(敍親)하는 도리를 돈독(敦篤)히 하면 우리 가문에는 앞으로 복이 내려질 것이며 이로부터 날로 융성(隆盛)해질 것인데 이 족보의 완성이 또한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시경>에 말하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만 하지말고 선조의 덕을 이어받아 닦을 지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효자는 아무리 효도를 하여도 다 하지 못하느니 길이 길이 그대들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였다.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 <무진보서>에서는 '주나라 우왕'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그는 하나라의 왕이었다. |
숭정181년(순조 8년, 서기 1808년) 무진 계하(季夏, 음력 6월) 후손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지면(至冕) 근술(謹述, 삼가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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