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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세어라 금순아 |
작사 : 강사랑 작곡 : 박시춘 노래 : 현인 |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영도다리 서쪽편으로 영도 방향으로 건너오면 현인노래비가 맞이해줍니다~
부산 출신의 유학파 현인(玄仁, 1919~2002)의 고향, 그리고 흥남부두, 영도다리 등의 실제 지명을 사용해 한국전쟁의 설움을 잘 담은 그의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를 새긴 현인노래비죠.
보물섬 영도 이야기 스토리텔링 100선-76 굳세어라 금순아의 현인 |
1919년 12월 14일 부산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을 영선동에서 보내었으며 아버지를 따라간 일본 우에노음악학원(우에노음악학교, 東京音楽学校)의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12월 귀국하여 악단 활동을 하던 중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1913~1996)을 만나 <신라의 달밤(1946)>을 히트시키면서 인기 가수가 되었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왔으며 오리엔트레코드(오리엔탈레코드, 1947~1958)에서 취입한 <굳세어라 금순아(1953)>는 피난민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에게 안부를 전하도 다시 만날 때까지 굳세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노래는 전쟁의 참상에 대한 절묘한 묘사로 전쟁 직후의 시대상과 공명하면서 국민가요로 불렸다. 2002년 83세의 일기(一期)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아직까지 널리 애창되고 있다. |
비석의 뒷편엔 그의 약력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약력 | |
현인 | |
1919. |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출생 |
1938. | 경성제2고보(현 경복고등학교) 졸업 |
1942. | 일본 우에노음악학교(東京音楽学校, 1887~1952, 현 도쿄예술대학) 졸업 |
1947. | <신라의 달밤> 발표 |
1948. | <고향만리>, <비내리는 고모령> 발표 |
1950. |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자라> 발표 |
1961. |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 초대위원장 |
1962. |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 |
1967. | 문화공보부 공로상 |
1990. | KBS가요대상 공로상 제3회 원로연예인 공로대상 |
1996. | 제30회 가수의 날 특별 공로대상 |
1999. | '대한민국연예예술'대상 수상 문화훈장 화관장 수훈 |
2002.4.13. | 타계 |
-대표곡-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베사메 무초(베샤메무쵸), 서울야곡, 비내리는 고모령, 럭키서울, 꿈이여 다시 한 번, 인도의 향불 |
그의 노래는 아직도 불리고 있습니다. 힘든 시절을 살아가던 그 시절 분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던 노래를 가수 현인이 많이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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