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으로 보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고문귀 하판락의 일생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신문으로 보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고문귀 하판락의 일생

728x90

1. 부산일보의 어버이날 포상대상자 명단에서 '하판락'의 이름을 발견하다!

출처 : 꼬꼬무
대통령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보건복지부장관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ㅇㅇㅇ)
부산시장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대통령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
부산시장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하판락(85.남천2동),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보건복지부장관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대통령상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그냥 얼핏 보면 어버이날 포상대상자로 선정된 인물들이구나~ 하고 지나갈 수 있지만, 사실 이 기사에는 무서운 이름 하나가 숨어 있다. 바로 '하판락(河判洛, 1912~2003)'. 그는 사실 부산 경남 지역에서 악명 높았던 친일 경찰 중 하나였다.

꼬꼬무 영상과 각종 검색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하판락은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을 고문했는데, 사람을 패는 것은 예삿일이었으며, 전기로 몸을 지지거나, 물로 고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손가락을 비틀거나, 종아리 사이에 야구방망이를 끼운 뒤 무릎 위에서 구르며 다리에 압박을 가하거나, 고춧가루로 고문을 하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악랄한 것은 주사 바늘을 몸 여기저기 찔러 피를 뽑아내어 그 피를 피해자의 몸과 얼굴에 뿌리는 괴상하면서도 잔인한 착혈 고문을 행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이 '부산 어버이날 대통령상 포상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이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만한 일이다. 다행히 그의 만행은 현재 만방에 밝혀진 상태다.

2. 신문으로 보는 하판락의 인생 중후반

2-1. 1930.02.12, 동아일보, 진주학생=16명 출옥

진주학생=
16명 출옥


[진주] 진주학생사건(1930.01.17)으로 10일과 15일과 19일간의 3종으로 구류처분을 바더 진주형무소로 보냈다함은 긔보(旣報)한 바어니와 이제 10일간이 만긔(滿期)되어 지난 (2월) 9일 아츰 여덜시 삼십분에 10일간 구류를 마치고 출감한 학생씨명을 다음과 가트며 아즉도 다섯 사람이나 구류중에 잇다는데 학생들의 신상을 건강하다고 한다.


출옥자(감옥에서 나온 자) 씨명
▲ 김국조(金國祚), 박률(朴律), 진창현(陳昌鉉), 최종낙(崔鍾洛) (이상 4년생(4학년))
▲ 정명석(鄭明錫), 남학우(南學祐), 정종호(鄭鍾浩), 하판락(河判洛), 박성무(朴性茂), 변신기(卞信基), 이창수(李昌秀), 최윤철(崔崙喆), 정인화(鄭仁和), 정기화(鄭奇化) (이상 3년생)
▲ 정쌍동(鄭雙同), 김항기(金恒起) (이상 2년생)


◇ 재옥자(감옥에 있는 자) 씨명
▲ 서정태(徐廷泰) (3년생) 심점협(沈點俠) (2년생) (이상19일간 구류)
▲ 박원지(朴源志), 황성팔(黃性八), 조정래(趙正來) (2년생) (이상 15일간 구류)

1930년 1월, 진주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에서 당시 3학년이던 하판락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했었다. 이때까지도 그는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로 보면 깨어있던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잡혔고, 10일동안 갇혀있다가 다른 동무들과 함께 출옥하게 되었다.

2-2. 1932.03.11, 조선일보, 진주고보졸업식, 지난 5일에 거행

진주고보졸업식
지난 5일에 거행


[진주]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제3회 졸업직을 지닌 5일에 거행하얏는대 금년졸업생은 32명이므로 그의 씨명은 다음과 갓다고 한다.


정재우(鄭在宇), 이상원(李相元), 정덕용(鄭德鎔), 하판락(河判洛), 변신기(卞信基), 최응섭(崔應燮), 서태흥(徐台興), 김수봉(金守鳳), 하종응(河鐘應), 권장이(權章伊), 정종화(鄭宗和), 김복구(金福九), 박우상(朴祐相), 김재국(金在國), 김종수(金宗洙), 김찬문(金燦文), 정규병(鄭奎丙), 김국조(金國祚), 김무세(金茂世), 정외갑(鄭外甲), 김영민(金榮敏), 김용조(金龍祚), 이안호(李安浩), 정석운(鄭碩云), 강판칠(姜判七), 김용진(金用震), 황식(黃煶), 김재자(金在字), 이학돈(李學墩), 김상석(金相石), 박두석(朴斗錫)

진주학생사건이 있은지 약 2년이 지나고 진주고등보통학교에서 하판락은 졸업하게 된다. 이 때 졸업한 학생 중 진주학생사건 당시 시위를 했던 변신기, 김국조 등도 같이 졸업했다고 한다. 이윽고 신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후 경상남도 경찰부 순사로 입직하게 된다.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그를 조사하고 심문했던 사람들의 기록 중 <반민자죄상기>에 자세히 나온다.

<반민자죄상기><고등경찰 김덕기와 그 일행들><주사기로 착혈(搾血)하던 고문귀 하판관>
고문왕(拷問王)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쳐지던 하판락(河判洛)은 경남 진양(晉陽) 출생으로 4263년(1930년) 진주중학을 졸업 후 즉시 순사로 들어간 곳이 혁명투사들의 학살을 일삼던 경남경찰부 고등형사로 근무하던 외사계(外事係)였고, 4269년(1936년) 순사부장으로 승진 4270년(1937년) 다시 경부보로 승진하여 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으로 있었다. 4275년(1942년) 9월 평남(平南)을 중심으로 전선 기독교인들을 신사(神社) 불참배 라는 이유로 70여 명을 검거 투옥하였고 4276년(1943년) 시월에는 경남 기독교 중심의 반일투사를 탄압 4277년(1944년) 경남 고등과 경부보로 재직당시 부산(釜山), 울산(蔚山)을 중심으로 하여 반일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된 엠엘(M.L)동맹(同盟)친우회 간부 여경수(呂敬守)씨와 이광우(李光雨)씨 외 7, 8명을 반일투쟁의 군자금 조달과 일(日)군사요지 시설을 파괴음모 하였다는 것으로 (소위 울산공당사건(蔚山共黨事件)) 체포하여 화적(火적), 전기 등으로 지지는 등 가혹한 고문을 하여 고문에 못이겨 여(呂)씨는 즉사케 하고 이광우(李光雨)씨 외 전부를 4년 이상의 극형에 처하였으며 동년 11월 경남 의령지사(宜寧志士) 고(故) 수파(守坡) 선생의 문집(文輯)이 배일적(排日的) 문구가 있다는 것을 구실로 그 연루자를 검거하여 악형을 가한 다음 투옥시켰고, 4276년(1943년) 부산에 있는 호주성교당(濠洲聖敎堂) 관리인 김준기(金準基)씨를 황국신민 정신이 결여되었다는 이유로 검거 투옥시킨 후 자기측근자 김한수(金漢秀)에게 관리케 하는 등 조선형사로서 가장 교활하고 악질적 친일귀였으며 더구나 이 자가 하는 상투고문은 주사기(注射器)로 착혈(搾血)을 시켜 신경을 잃게 하고 전기고문, 물고문, 비행기고문 등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고문을 예사로 하여 수많은 애국자와 동족을 치사(致死) 혹은 병신이 되게 한 극악무도한 고문귀(拷問鬼)라고 한다. 이 자를 반민특위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이송하던 당시 부산(釜山)시민들은 부두에 운집하여 당장 여기서 우리들이 처리하겠으니 맡겨달라고 애원을 하게쯤 그에게 대한 인민의 뼈에 사무친 원한은 충천하였던 것이라 한다.
기소해당죄상 반민법 제3조 제4조 6항
담당검찰관 김웅진(金雄鎭)
담당재판관 신태익(申泰益)
1912. 출생
1930. 진주중학 졸업/진주학생운동 참가
1932. 진주고보 졸업
1936. 경남경찰부 순사부장으로 승진
1937. 경남경찰서 경부보로 승진/경남경찰부 고등과 외사주임직
1942.09. 평남 전선 기독교도들의 신사 불참배라는 이유로 70여 명 검거 및 투옥시킴
1943.10. 경남 기독교 중심 반일투사 탄압(부산 호주성교당 관리인 검거 등)
1944. 엠엘동맹 친우회 간부 및 울산공산당사건 의심자 등 반일투쟁자 검거 및 고문
1944.11. 고 수파 선생 관련 연루자 검거 및 투옥

학생시절 분명 반일운동에 참가했었지만 결국 일본에 붙어 순사(경찰)가 된 뒤 그는 같은 조선인들을 잔혹하게 탄압하게 되었다...

2-3. 1949.01.27, 조선일보, 김우형 하판락, 부산에서 체포

김우영(金雨英) 하판락(河判洛)
부산에서 체포


반민특위는 부산에도 손을 버처 친일거두를 속속 검거중에 있는데 (1949년 1월) 24일 오전에는 김우영(金雨英, 64), 하판락(河判洛) 2명을 그들 자택에서 무난히 체포하였다. 전기 김(金)은 경도제대(京都帝大,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총독부 이사관 충청남도 산업부장을 지나 국민종력연멩 충청남도고문 중추원참의 등의 요적에 있었고 해방 후에는 다시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었다. 또한 하(河)는 가와모도(河本)로 성을 갈고 경상남도 경찰부 조선과 특별최고지휘자로 경부(警部)의 직에 있었던 자라 한다. (부산발 고려)

그 외 비슷한 시기의 <경향신문>의 기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河)는 고등게형사로서 수많은 애국자를 고문학대하여 고문왕이라는 이름까지 받은 자이라 한다.


- <경향신문>(1949.01.26)

광복이 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8.10~1949.10)의 조사를 통해 그의 악행이 밝혀졌고 1949년 1월 오후에 잡혔다. 이 때 <경향신문>은 그의 별명이 '고문왕'이라고 소개할 정도로 그는 이미 부산, 경남 지역에서 큰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2-4. 1949.02.11, 동아일보, 문초에 착수 하판락 이두철

문초에 착수
하판락(河判洛) 이두철(李斗喆)


특위에서는 10일부터 부일(附日, 일본에 빌붙음)피의자로 피검된 하(하판락(河判洛))과 이(이두철(李斗喆))에 대한 문초를 개시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문초 여하가 매우 주목되고 있다.

그 악명높은 하판락이 잡히자 사람들의 많은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2-5. 1949.02.24, 경향신문, 하판락은 내 자식 주겼오

하판락은 내 자식 주겼오
부산의 일부인이 특위에 서한(書翰)


지난 (1949년) 1월 27일 부산 특위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문초를 받고 있는 고등게형사 하판락(河判洛)에 관한 죄상을 부산부 범일동에 있는 김금이(金今伊, 62)라는 부인으로부터 조사관에게 적어보냈다는데 그 서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전기 김여사의 장난인고 여경수(呂敬守)군은 단기 4276년(서기 1943년) 5월경에 애국정신 및 조국독립을 위하여 지하 운동을 하던 중 불행히도 악독한 왜경에게 체포되어 당시 경남도 경찰부 경부였던 하판락의 혹독한 독수(毒手, 악독한 수단)에 두발의 탈취와 수책고문(水責拷問, 물고문), 혈액 채취 등의 고문을 당하고 투옥 3년 후에 옥사하였다 한다.


(...)

1930~40년대에 있었던 ML동맹의 간부 여경수(呂敬守)가 잡혀 같은 조선인 경찰 하판락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옥사했다는 사실을 그의 어머니가 반민특위에 고발했다. 이 서신으로 사회는 하판락의 악행을 알 수 있었고, 그렇게 그의 운명이 끝나가는 듯했다.

 

2-6. 1949.03.17, 동아일보, 노덕술 등 기소

노덕술(盧德述) 등 기소


그간 반민특위 검찰부에서 취조를 받고 있던 반민피의자 노(노기주(魯璣柱)), 하(하판락(河判洛)), 노(노덕술(盧德述)) 등 3명은 지난 (1949년 3월) 15일 하오 반민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공관에 회부되었다.

여경수 어머니의 서한 등의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그를 직접 수사하고 결국 3월 15일 그는 반민범 위반으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된다.

 

2-7. 1949.04.07, 동아일보, 반민공판 일정

반민공판일정
박흥식(朴興植)은 (4월) 10일에


반민피고 조(조병상(曺秉相)), 하(하판락(河判洛)) 양인에 대한 제1회 공판(4월) 7일
노(노기주(魯璣柱)), 임(임창수(林昌洙)) 양피고에 대한 제1회 공판은 8일
그리고 박(박흥식(朴興植)), 이(이기용(李埼鎔)) 양피고에 대한 제2회 공판은 오는 10일에 있으리라 한다.
그의 공판은 4월 7일에 열렸다.

 

2-8. 1949.04.09, 조선일보, "고문한 일 없다"

"고문한 일 없다"
하판락 사실을 일체 부인
(4월) 7일 하오


반민공판 제6일 오후는 7일 오후 2시부터 동 15분부터 반민피고 하판락(河判洛)에 대한 제1회공판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신태익(申泰益) 판사, 주임 김웅진(金雄鎭) 검사 입회하에 개정되여 오후 5시 정각까지 165분간에 걸친 사실심문이 있었는데 동피고는 기소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한편 특검부에서 제시한 증인의 진술 내용까지 도전적으로 부인하였다. 심문 내용의 요지는 대략 별항과 같으며 제2회 공판은 오는 21일이다.
7일 오후 반민공판은 오후 2시부터 동 5시까지 고등경찰 하판락(河判洛)에 대한 심문이 있었는데 피고는 애국투사를 검거한 일은 있으나고 문한 사실은 없다고 답변하였다한다. 재판장은 제2회 공판을 오는 21일 속개할 것을 선언하고 페정하였는데 특히 동공판에서는 속속 드러나는 잔악한 피고의 죄상에 일반방청인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었다.


(별항)
문 : 종교단체를 탄압할 때 혹독한 고문을 했다는데?
답 : 그런 일 없읍니다.
문 : 기독교도들을 검거하는 것을 피고는 옳게 생각하였는가?
답 : 좋은 일이라고 생각지 않었읍니다.
문 : 제2차 기독교 사건은 어떤 것인가?
답 : 역시 불신사참배자들을 탄압한 것으로 상부의 명령에 의해 했을 따름입니다.
문 : 그들을 문초할 때 고문했을 것은 사실이지?
답 : 고문은 않했읍니다.
문 : '친엔동맹(ML동맹)'의 간부 여경수(呂敬守)를 문초할때 머리를 뜯고 피를 빼고 물 메기는 등의 잔인무도한 고문을 했다고 증인들이 말했는데 사실인가?
답 : 원! 천만의 말입니다.
문 : 여(呂, 여경수)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러 경찰에 갔을 때도 "개같은 자식을 만나 뭐하겠나?", "네 아들 인제 다 본 줄 알어라"하고 말한 일이 있고 한버은 아들을 만났을 때 얼골이 창백하기에 이유를 물었드니 고문에 못이겨 못살게 되었다고 하였다는데?
답 : 원. 듣던 바 처음입니다.
문 : 피고는 자기 동생을 학병(學兵)에 강제로 보냈다는데?
답 : 나는 반대했지만 동생이 자진 찬성에서 나갔읍니다.
문 : 강(姜)모를 오랬동안 구속문초할 때 피고는 강의처신(甲=20)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로 협박공갈을 퍼붓고 마지막에는 교묘히 신을 유혹하여 정조까지 빼었고 신으로 하여금 남편과 이혼에 이르게까지 이 사실이 있다고 강(姜)이말하고있는데?
답 : 원. 천만에 말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읍다.

반일운동가 여경수를 문초할 때 머리를 뜯거나 피를 빼거나 물을 마시게 하는 등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이야기와 그를 찾아온 어머니에게 면박을 주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동생이 학도 특별지원병(학도병, 학병)이 된 것, 강씨에게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준 것이 대해 문책하자 그는 모두 아니라고 잡아뗐다.

2-9. 1949.04.22, 경향신문, 반민공판 피고는 타협주의

반민공판
피고는 타협주의
조병상(曺秉相) 뻔뻔스런 답변


21일 반민자 조병상에 대한 제2회 공판은 오전 11시 15분 김웅진(金雄鎭) 검찰관 입회 신태익(申泰益) 재판관 주심으로 개정되었다. 기소문에 의거한 사실 심문은 전회로서 끝마치고 변호인으로부터 몇가지 간단한 보충심문이 있었고 총활적인 재판장의 심문으로 "피고가 지금 일본하에 있는 것으로 가장하고 조선사람의 나아갈 길을 말해보라"하는 질문에 피고는 "그에는 두 가지가 있다. 타협주의와 비타협주의가 있다. 피고는 타협주의다"라고 대답하자 재판장은 연거퍼 타협주의에 대한 피고의 견해를 물었다. 이로서 오전의 공판을 끝마치고 오후에 들어가 이성근(李聖根), 하판락(河判洛)의 공판이 속개되었다.

2-10. 1949.05.25, 동아일보, 하(河)의 죄상 조사 특재 양씨 귀경

하(河)의 죄상 조사
특재(特裁) 양씨(兩氏, 2인) 귀경


특별재판부 김호정(金鎬禎), 이종면(李鍾冕) 양씨(兩氏, 2인)는 반민피고 하(하판락(河判洛))의 죄상에 대한 증인 조사차 부산 방면에 출장한 바 있었는데 하(河)에게 악독한 고문을 당한 10여명 증인 중에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상처가 낫지 않은 사람도 있음이 판명되었다한다.

하판락의 죄상을 확인하기 위해 증인들을 만나러 부산에 갔었던 특별재판부 김호정과 이종면 2인은 그에게 고문당한 10여명 중 아직도 그 상처가 낫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반민특위 업무를 속행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2-11. 1949.08.28, 동아일보, 특위간부의 독직사건 국고금 94만원 횡령

특위간부의 독직사건
국고금 94만원 횡령
심계원에서 적발코 변상을 판정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는 반민특위간부들이 국고금을 횡령한 부정사건이 심게원(審計院, 심계원)에 적발되었다.
즉 반민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위원 김상덕(金尙德), 동부위원장 반민특위 김상돈(金相敦) 위원, 김명동(金明東) 등 위원이 재무관을 시켜서 94만5천4백97원 34전이라는 거액을 횡령하였는데 심지어는 국고금 20만원을 시정상인에게 대부한 사실과 또는 보관한다는 미명 아래 노(노덕술(盧德述)), 하(하판락(河判洛)) 등 피의자의 소지금을 압수하여 수차 횡령한 액수가 88만5백원이나 된다한다. 그래 방금 동 장부 기타 서류는 심게원에서 지난 13일 적발 압수하고 수일전 변상 판정을 내리었다하는데 이들이 이같은 막대한 돈을 횡령한 것은 작년 12월 24일부터 지난 6월 말까지의 사이에 행한 것이라고 한다.

이전에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으로 점점 힘을 잃어가던 반민특위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또 터졌다. 반민특위의 간부들이 국고금을 횡령하고 피의자들의 소지금을 압수했다는 사실이 심계원(현 감사원)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이 조작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당시 대한민국 심계원에서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좋게 보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반민특위의 날은 점점 저물어갔으며, 결국 1949년 6월 초대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한 간부들이 사퇴하였고 그 자리는 공석이 된다.

2-12. 1949.08.31, 경향신문, 반민특위엔 부정없다

반민특위엔 부정없다
이(李) 위원장 성명 발표


특위위원장 이인(李仁)씨는 요지음 시내 몇몇 신문에 반민특위의 심게결과(심계결과) 부정사건이 있는 듯이 보도된 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박의 성명을 29일 발표하였다. (사진은 이인씨)


반민특위는 6월 중 전 위원장 김상덕(金尙德)씨 이하 위원 9명이 총사직하였고 뒤이어 심계원에서는 정기심계로 특위의회계를 심게(심계)한 결과 항목 유용한 것을 지적한 것이나 7월 14일 이인 위원장, 송필만(宋必滿) 부위원장 이하 10명의 위원이 국회에서 다시 선출신임되어 항목 유용을 하게 된 실정을 조사한 즉 국회의원이 국회나 분과위원회에 출근할 때도 법률 제23호 국회의원 보수에 관한 법률 제3조에 의하여 집무수당과 차마비로 일당 1500원씩 지불하게 되었다. 반민특위의 위원은 일반관청과 같이 매일 출근하는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차마수당을 지불할 예산항목은 없었으나 전위원장 이하 각 위원은 이것을 당연히 지불할 것으로 인정하고 출근위원에게 1500원씩 지불한 것이고 또 반민특위는 수사 기관인데도 불구하고 기밀비 예산이 부족하여 노덕술(盧德述), 하판락(河判洛) 등 급박한 수사 형편에 따라 다소의 회계금전을 지불케하였다. 비록 항목은 없다 하디라도 사리상 지불 아니하면 안될 것이 분명함으로 후임 위원장 이하 각 위원은 이것을 정리하기 위하여 국무총리, 국회의장, 기획처장과 협의한 결과 원만한 해결을 되었다.

7월부턴 반민특위 해산을 원했던 이승만의 측근 이인(李仁)과 그 휘하 간부들이 반민특위에 소속되었다. 그렇게 반민특위는 내부적으로 자연스럽게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2-13. 1949.09.02, 경향신문, 이성근 하판락 보석

이성근 하판락 보석


특별재판부에서는 반민피고로서 4회 심리를 마친 이성근(李聖根)과 3회 심리를 마친 하판락(河判洛) 양명을 (1949년 8월) 30일 병으로 보석하였다고 한다.

결국 일은 터졌다. 그렇게 악독했던 하판락이 보석으로 풀려난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2-14. 1973.03.07, 매일경제, 3차로 51사(社)인가 재무부 서민금고업체 총3백49개

3차로 51사(社)인가
재무부 서민금고(庶民金庫)업체 총3백49개


재무부는 <상호신용금고법>에 따라 종전 2백98개 서민금고법 사업인가를 낸데 이어 5일 3차로 51개 업체에 대해 사업인가를 발급했다.
이로써 사업인가를 받은 업체는 총3백49개업체(본점기준)가 되었으며 지점까지 포함한 영업소는 5백12개가 되었다.
또한 지난해(1972년) 8월 2일 상호신용금고법이 제정, 서민금고 사업인가 신청을 낸 총 3백64개 업체 중 인가를 받지 못한 사업체는 14개이다.
한편 재무부는 서민금고기준업체의 인가사무를 마친데 따라 인가된 금고에 대해 내적충실과 공신력 제고를 위한 작업 일환으로 오는 (1973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동안 서울은행집회소에서 상호신용금고업체의 경영자 및 실무자 연수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이 연수 교육에는 경영자 3백50명, 회계실무자 3백50명등 총 7백명을 대상으로 하는데 연수내용은 ①법령 및 업무 방법서 약관 해석 ②상품 개발 ③회계 처리 등이다.
또한 재무부는 오는 4월초 전인가법인체에 대해서 업무감사도 실시할 방침이다.
3차사업인가 발급업체는 다음과 같다.


◇서울지역 ▲서흥금고(이정옥) ▲성실기업(최응섭) ▲새한양금고(이익붕) ▲경기금융(황균응) ▲중소금고(김영일) ▲유신금고(유영옥) ▲한진금고(정승면) ▲새한상신(신상기) ▲삼성실업(김근식) ▲안국금고(신봉식) ▲금성실업(김양준)


부산지역 ▲진주금고(김동열) ▲신흥금고(박상기) ▲한일금고(최관식) ▲통일금고(이현순) ▲우양금고(하판락)


◇경기지역 ▲지나금고(박우군)


◇강원지역 ▲상동금고(이원탁) ▲시민금고(허복기) ▲동일산협(엄기운) ▲대성금고(허필순) ▲신삼화기업(김용현) ▲한일금고(유석관) ▲원창금고(장기세) ▲강원금고(조항래) ▲금성실업(김양준)


◇충북지역 ▲유남상사(김석건) ▲옥천금고(정기운) ▲진천상창금고(박범위) ▲삼화기업(장부송) ▲영의금고(김정규) ▲충북금고(허호)


◇충남지역 ▲서산상협(박상원) ▲진성금고(이평래) ▲부여상협(고흥원) ▲예산상협(최만락) ▲아산상협(강신출)


◇전북지역 ▲남원금고(김종석) ▲삼흥금고(김순원)


◇전남지역 ▲제일금고(오은주) ▲구례중앙금고(김문수) ▲제일금고(이채순) ▲협심금고(진승길) ▲호남금고(기우대)


◇경북지역 ▲영덕금고(김상연) ▲대구한신금고(이상의) ▲경산신탁(이영식) ▲상주영남주택(이안순) ▲한국금고(이세원)


◇제주지역 ▲한국금고(김영호) ▲연합금고(김채흥)

대한민국 재무부에서 사업인가를 허락한 상호신용금고 업체 349개 중 부산의 우양금고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상호신용금고란 영세 상공인을 위한 금전 융통, 상호 신용계의 구성, 어음 할인, 대출 등에 관한 은행과 비슷한 업무를 취급하는 금융 회사로, 이용자가 목돈을 쓰고 푼돈으로 갚는 것이 특징이다. 이 상호신용금고는 현재 상호저축은행, 저축은행이라는 이름으로 은행은 아니지만 은행과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영세업자들의 돈을 굴려 부를 축적해 나가다가 그의 후손에게 신용금고업을 물려줬다. 이후 하판락의 후손들이 운영하던 우양금고는 다양한 금융활동을 펼치다가 상황이 부실해져 1999년 파산 신청을 했고, 결국 타 신용금고에 흡수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반일 학생 운동에 참여했지만 결국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이 되어 조선인을 잔인하게 고문하다가 정치적 상황으로 제대로된 처벌조차 받지 않고 금융업으로 큰 성공을 이룬 친일파 하판락. 친일파가 더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신문으로 그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그가 잘 살았고, 그의 후손들도 잘 살았다는 사실을 직접 읽게 되자 좀 더 충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가 끝난지 78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시점에서 다른 중요한 업무 때문에 이런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당장 할 수 없다고 쳐도 이러한 진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번에 꼬꼬무에서 하판락을 보고 그의 일대기를 신문을 통해 정리해봤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