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변 신선이 놀다 올라간 곳, 상강선대와 하강선대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낙동강변 신선이 놀다 올라간 곳, 상강선대와 하강선대

728x90

1. 상강선대(할배당산)

1-1. 상강선대(할배당산)

덕포역 1번 출구로 올라와 3번 출구 방향으로 조금 가다 보면 전통적인 느낌의 건물 하나가 보입니다.

덕포역 1번 출구쪽에 위치한 상강선대 당산제 전경과 위치 (지도 출처 : 카카오맵)

이곳이 바로 상강선대와 상강선대 당산제가 있는 곳이죠!

한 기록에 따르면, 상강선대와 하강선대는 주민들의 신앙의 상징으로서 이곳의 고목을 당산나무로 하여 1700년(숙종 26)경 언덕 위에 당집을 세워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빌어 왔다고 하네요.

상강선대(上降仙臺)
소재지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상리부락
본 장소를 상강선대(上降仙臺)라고 부르고, 덕포1동쪽에 있는 것을 하강선대(下降仙臺)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러한 이름은 이곳이 경관이 빼어나 매년 음력 12월 1일*이면 신선이 하강(下降)하여 목욕을 하고 쉬어 갔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강선대(降仙臺)가 위치해 있는 이곳은 현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까지는 배가 드나드는 포구였으며, 강선대 주변에는 촌락이 있었고, 주민들은 농업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고 하며, 마을 앞 강이름을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옛날부터 살아온 주민들은 아직도 상강선대쪽을 상리(上里), 하강선새쪽을 하리(下里)라고 부르고 있으나, 사상지역의 주택개발로 촌락의 형태는 찾을 수 없고,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 조차도 이곳이 포구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강선대 위에는 당산을 지어놓고 있는데 이것을 할배당산이라 부르고, 하강선대 것을 할매당산이라 하며 진선회(津船會) 회원들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이곳을 보호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고 있다.
* <부산역사문화대전><강선대>에는 '매년 음력 11월 1일'이라고 되어 있다.

상강선대의 제당은 계단을 올라가야 나옵니다.

'정은조(鄭殷朝), 손기윤(孫琪潤), 김우관(金禹瓘), 서향수(徐享洙), 황룡호?(황룡고?/황룡갑?/黃龍浩)'라는 이름이 적힌 돌도 보입니다. 이곳 상강선대에는 이렇게 사람 이름들이 많이 새겨져 있어요.

강선대 관리사무실인 진선회(051-302-5837)가 있는 건물이 있습니다.  그 옆에도 돌이 하나 있네요~

'김소선(金小善), 김홍ㅇ(洪ㅇ), 엄우ㅇ(嚴禹ㅇ), 황룡주(黃龍珠)'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돌을 지나 위 계단으로 올라가면 할배당산이 나옵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접근하기 힘들다고 주변 어르신들이 말했어요. 아마 제일에 찾아와야할 듯 합니다!

 

1-2. 상강선대의 비석들

상강선대 비석
과거 사상 지역에 제방을 쌓아(築堤 : 축제), 낙동강의 홍수로부터 농토와 인명, 재산의 침수(沈水) 피해를 막아주기 위해 치수사업(治水事業)을 벌였던 기록이 있고, 당시 동래부사(東萊府事)들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비석 3기(基)가 덕포2동 상강선대 앞에 세워져 보존(保存)되어 있다.

그리고 제일 왼쪽에는 아버지가 위급할 때 단지(斷指, 손가락 자르기)하여 목숨을 살린 효자 구주성의 효성을 기리는 비가 자리잡고 있다.
부사이공경일축제혜민비(府事敬一築堤惠民碑, 부사이경일축제혜민비)
1788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의 내용에는 축제의 필요성과 제방의 규모를 밝히고 있다.
부사이공명적축제혜민비(府使李公明迪築堤惠民碑, 부사이명적축제혜민비)
1840년에 세운 것으로 홍수의 피해 상황과 축제에 동원된 인원수를 밝히고 있다.
부사박공제명축제혜민비(府使朴公齊明築堤惠民碑, 부사박제명축제혜민비)
1832년에 세운 것으로 사상지역의 입지조건과 축제의 필요성을 밝히고 동원된 인원수 등을 밝히고 있다.
효자구주성지려(孝子具周星之閭, 구주성 효자비)
1715년에 마을 사람들이 효자 구주성(具周星)의 효성을 기려서 세운 비석이다.

비 앞면 비 뒷면
효자구주성지려
(孝子具周星之閭)
숭정기원후4임인(崇禎紀元後四壬寅, 1842년) 2월(二月) 개수(改竪)

1842년 '효자 구주성의 정려(旌閭)'를 고쳐 세웠음을 알 수 있는 비석입니다.

현재의 덕포동에 살았던 창원 구씨 구주성은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하여 목숨을 살렸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나중에 조선 정부에게까지 알려져 1610년(광해군 2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고 합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715년(숙종 41년)에 효자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후 1842년에 이곳에 비석을 고쳐 세웠다고 하네요.

부사박공제명축제혜민비(府使朴公齊明築堤惠民碑)입니다.

1831년 2월 동래부사로 부임한 박제명이 1832년 9월에 제방을 축조한 공을 칭송하는 비석이죠~

비 앞면 비 뒷면
부사박공제명축제혜민비
(府使朴公齊明築堤惠民碑)
동래의 사주(沙州) 한쪽은 낙동강 하류의 요충지에 닿아 있어 비옥한 땅이 비어 놀고 있었다. 지난 1788년(정조 12, 이경일 부임기)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1814년(순조 14) 큰 물난리로 곳곳이 무너져 내려 해마다 침수되는 근심으로 백성들이 안도하지 못하였으나 제방을 쌓을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우리 어지신 부사께서 특별히 먹고살기 어려운 부민들의 형편을 관문(關文)을 통해 감영에 보고하여 기장의 장정 500명, 양산의 장정 700명, 김해의 장정 800명 그리고 본 동래의 장정 6,800명을 확보하고 부산창의 미곡 70포를 빌린 다음 별도로 감독할 관리를 파견해 주었다. 올해 2월 12일 모라 뒤쪽 방축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무너진 곳을 메우고, 내려앉은 곳을 돋우어 3월 16일에 주례의 사목포(司牧浦)에서 일을 마쳤다.

이렇게 10여 리 7,000발의 둑이 마치 바다를 막은 성처럼 우뚝 서니 물의 피해는 사라지고 그 땅도 다시 열리게 되었다. 우리 부사의 공로는 소식이 두원에 제방을 쌓은 것에 못지않다. 이곳 부민들의 본업도 다시 보리농사라도 지탱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름답고 성대하다. 이에 돌에다 새겨 영세토록 남기노라. 순정 후 네 번째 임진년(1832년) 9월 9일. 원주의 변진화가 기록하고, 영천의 이사훈이 쓰다.

도감 중군 김형진, 별임 최익헌·신성술·박치언, 도색 호장 이중담, 읍비장 김처권·김광수, 서계색 호장 이정출, 읍비장 이시간·방치상·정석훈, 면비장 김국신·김득서·황운종·이상경·강계욱·최대륜·김환정, 김규혁, 겸감 황해록.
* 번역 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부사이공명적축제혜민비(府使李公明迪築堤惠民碑)입니다.

박제명 부임기(1831.02.~1833.06.)에 낙동강 인근에 이미 제방을 다시 축조했지만, 약 6년이 지난 이명적 부임기(1839.01.~1840.06.) 또다시 물난리가 납니다. 이 때 동래부사 이명적이 제방을 다시 지었죠. 그의 임기가 끝난 1841년에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렇게 혜민비를 세운 것입니다.

비 앞면 비 뒷면
부사이공명적축제혜민비
(府使李公明迪築堤惠民碑)
사면(沙面) 한쪽은 강과 바다가 교차되는 곳에 접해 있어 해마다 침수를 겪었다. 무신년(1788년, 이경일 부임기) 새 둑을 쌓은 뒤로 주민들이 안전한 제방이 있음을 즐거워하였는데 그 후에 다시 둑이 무너졌다. 이것을 수축한 일과 임진년(1832년, 박제명 부임기)에 중수한 사실은 앞에 적은 비문에 상세하므로 지금 군말을 보태지는 않겠다. 그러나 뜻밖에도 기해년(1839년) 물난리로 십 리나 되는 긴 둑이 □□ 무너지고 마른 밭, 진 논 할 것 없이 모조리 물고기와 □의 거처가 되어 버렸다. 애석하게도 이 사면만이 홀로 참담하고 황급한 지경을 당해 장차 모두 죽을 뻔하던 차, 우리 부사께서 품고 보호하여 그 어려움을 구제해 주셨다.

이듬해 봄 감영에 요청하여 이웃 읍의 장정 2,600명과 본 읍의 장정 5,000명을 뽑아 같은 해 3월 초하루에 공사를 시작하여 26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리고 강자도(綱子島)의 둑이 또 침몰해서 새로 쌓았더니 우뚝이 솟아 바닷물을 밀어내고 그 피해는 사라졌다. 우리 부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이루었겠는가? 은혜롭게 머물렀다 가신 후로, 떠나신 뒤의 그리움을 생각하여 드디어 돌에다 새겨 영원토록 잊지 않고자 하노라.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신축년(1841년) 10월 남평 문진열 삼가 적다.

별감관 황해상, 도감 수성 별장 신응백, 읍리 호장 이사훈·박옥근, 면패장 최건원·최대륜·김환정·황치문·이장원·김규혁·이성엽·박치연·황해주·이정관, 수비 도감 유학 조광규·서형후
* 번역 출처 :  부산역사문화대전

가장 오른쪽에 있는 비석은 부사이공경일축제혜민비(府事敬一築堤惠民碑)입니다.

1788년 동래부사 이경일이 사면(沙面, 현 사상구+사하구) 지역의 낙동강 제방을 쌓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 축제혜민비가 세워집니다. 그렇게 한동안 부산지역 낙동강 동편은 낙동강 범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죠.

비 앞면 비 뒷면
부사이공경일축제혜민비
(府使李公敬一築堤惠民碑)
우리 사면은 낙동강의 하류에 닿아 있어 논밭이 수해를 입는 통에 해마다 씨를 뿌리고도 수확이 없었을 뿐 아니라, 또한 인가마저 물에 잠겨 견디기 어려운 근심이 있었다. 부사가 동래부에 부임하여 비록 포흠으로 축난 곡식을 거두는 데도 여가가 없었지만, 이러한 실정을 듣고는 감영에 보고하여 양산 제방 쌓는 일에 나누어 가던 부역을 특별히 면제케 하고, 각 면에서 조발(調發)한 다음 별기위(別騎衛) 별장(別將) 이명천(李命天)을 보내어 처음부터 끝까지 작업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모라촌 뒤쪽 키 모양의 석축이 270발, 같은 동네 상주을산 일원의 방죽이 700발, 하주을산 쪽 300발, 덕포리 대암 일원이 350발, 창거리 부상포 아래에서 모전 말단의 각 지역에 이르는 곳 모두 1,050발, 그리고 감동도 일원에 돌을 세워 새로 물길을 낸 그 좌우의 방죽이 700발, 괘내와 주례 두 동네 앞의 사목포에 새로 도수로를 연 그 오른쪽 방죽이 700발이다. 모두 계산해 보면 그 공사가 넓고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포 아래위로 각각 2개의 통을 묻어 물을 대고 빼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개 10리 안에 있는 5,000여 마지기의 땅 가운데 예전에 재난을 면하였던 논은 조금 높은 곳에 있는 1,000여 마지기의 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더 늘어난 것이 역력하다. 수해도 사라졌고 둑을 쌓는 일도 그해에 완성을 보았으니 부사께서 공덕을 이루신 것이 신통하고 신속하다고 할 만하다.

둑 안쪽 앞으로 새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1,000여 마지기가 될 것이요, 또 몇 해 지나지 않는 사이에 갈대밭이 모두 논이 될 것이며, 이 모두가 수해 없는 좋은 땅이 될 것이다. 아! 부사의 은택이 이 지역에 미침에 어찌 한정된 곳이 있을까마는 사면은 더욱 깊다고 하겠다. 만약 부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분명 물고기 신세가 되었을 것인데, 이제 만세토록 길이 의지할 편리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동도와 사목포의 수로와 덕포 상포의 새 방죽 등지의 땅이 모두 논으로 편입되고, 마른 밭들은 개간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여, 그 값이 동전 60꿰미가 되었다. 그 이익을 얻은 수백 명에게 세금을 거두어 들여야 마땅하였지만 들추어 따지지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도 오히려 더욱 염려하는 마음으로 수량대로 회계 조처하였다. 부사께서 우리 사면의 면민들을 보살피심이 어찌 이리도 지극하신지. 적합한 사람을 뽑아 일을 완성시킨 것으로도 그의 감식안이 밝고 원대함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작은 돌에 적어 만고에 잊지 못할 부민들의 마음을 붙여 둔다.

건륭 53년(1788년) 12월 사상면에서 세우다.

좌수 문명현 기록, 유학 정유 쓰다. 감관 황하정

상강선대 옆에 있는 비석군을 통해 조선 후기 사하구와 사상구의 낙동강 범람을 막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조선 전기 부산 지역 효자 구주성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2. 하강선대(할매당산)

상강선대에서 하강선대까지 약 10~11분이 걸린다 (출처 : 카카오맵)

상강선대에서 사상초등학교 방면으로 10~11분 내려오면 하강선대가 있습니다.

하강선대 앞에는 '하강선대 어울림공원'이라고 있습니다만...이곳은 엄격히 출입이 금지되어 평소에도 이 공원까지도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신성한 곳임을 알 수 있죠! 개인적으로는 이 하강선대 어울림공원까지만 개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1980년 12월 8일에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수령이 약 335년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언제 기준으로 335년인지는 모르지만, 부산역사문화대전에 따르면 '1700년 무렵 상강선대와 하강선대에 있는 고목'이라고 한 것 보아 1700년 이전에도 있었던 나무로 추정됩니다!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 대한민국의 시대까지 살아온 나무임을 알 수 있었어요!

 

어쨌든 이렇게 신선이 놀다 내려간 경치 좋은 곳은 지역의 당산이 되어 아직까지도 보존되고 신성시되고 있습니다~ 정말 문화적으로 멋진 곳 같네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