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와 낙수에서 성리학의 큰 뜻을 펼치다, 이락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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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와 낙수에서 성리학의 큰 뜻을 펼치다, 이락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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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서구 파호동의 궁산과 금호강 자락에 위치한 이락서당으로 가고 있습니다. 대구지하철 2호선 강창역에서 내려 금호강을 지나는 강창교쪽으로 걸어가면 나옵니다.

전 우선 강창교쪽에서 전경 사진을 하나 찍었습니다~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고, 강변에 위치해 풍경과 소리도 좋은 곳에 위치한 이락서당입니다.

계단을 내려가 안내판을 따라가면 철줄 옆에 '이락서당 입구'라고 적힌 안내판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른쪽 오르막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이곳에 올라오면 이락서당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등산로도 있습니다.

이락서당지(이락서당터, 伊洛書堂址)
대구·칠곡·성주의 아홉 문중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과 향촌 사회의 교화를 위한 뜻을 모아 정구(鄭逑, 1543~1620) 선생과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선생이 활동하던 곳인 파산에 서당을 건립하였다.

서당의 건립 시점은 <이락서당기>를 통해 1798년에 착공하여 이듬해 봄에 완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당의 이름인 '이락'은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낙재 서사원의 집에 하루 머물며 지은 시 <서사원의 집에서 취중 시[過徐淸安家醉中走筆/과서청안가취중주필]>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頤, 1033~1107) 형제가 학문 활동을 한 이수(伊水, 현 금호강)와 낙수(洛水, 현 낙동강)를 가리키는데 뒤에는 주희(朱熹, 1130~1200)까지 포함하는 정주학(정호·정이-주희로 이어지는 학통), 즉, 성리학을 의미한다.

서당의 구조는 마루를 중심으로 동, 서 양쪽에 방이 하나씩 배치된 형태이다. 이 중 동쪽 방은 모한당(慕寒堂), 서쪽 경미재(景彌齋)라 이름을 붙였는데, '모한'은 '한강 정구 선생을 존숭(尊崇)한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경미'는 '미락재 서사원 선생을 공경하다'는 의미이다.

서당은 노후화로 인해 보존 및 안전을 위해 2010년에 중건하였다. 하지만 서당 건립에 참여한 아홉 문중이 설립 당시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락서당규약(伊洛書堂規約)>을 제정하여 현재까지도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승하고자 노력하며, 향촌 사회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락서당지>는 향토문화유산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구문십일향(九門十一鄕)

성주 도씨(星州都氏) [서재(鋤齋), 서촌(西村)]
밀양 박씨(密陽朴氏) [덕산(德山)]
순천 박씨(順天朴氏) [묘골[竗洞/묘동]]
달성 서씨(達城徐氏) [남산(南山)]
일직 손씨(一直孫氏) [수성(壽城)]
광산 이씨(光山李氏) [슬곡(瑟谷)]
광주 이씨(廣州李氏) [상지(上枝)]
전의 이씨(全義 李氏) [하당(霞堂), 상곡(上谷)]
함안 조씨(咸安趙氏) [원대(院垈)]

* 성씨 가나다 순
대구광역시 달서구

그 옆에는 <이락서당규약>이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락서당(伊洛書堂)
이락서당은 조선 정조 무오(1798년)에 한락연원(寒樂淵源)의 후예 남주(南洲)의 구문십일향(九門十一鄕)
서른 군자가 유학(儒學) 중흥에 때맞추어 경전의 연구강론(硏究講論)을 한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인격도야(人格陶冶)에 힘쓰고 산수가 고루 갖춘 빼어난 경관에서 시문창수(時文唱酬)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며 아울러 자성훈회(子姓訓誨)에 그 목적을 두고 창건하였다.
당(堂)은 이수(伊水)와 낙강(洛江)의 합류지처(合流之處)요, 한로락옹(寒老樂翁, 정구와 서사원)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인 파산(巴山)의 절경에
제현(諸賢)의 합모구재(合謀鳩財)로써 세우고 모한(慕寒), 경미(景彌)로 연원(淵源)을 밝히니 가까이는 ㅇㅇ에
이르고 멀리는 이락(伊洛)에 다다라 천년세월(千年歲月)과 만리상거(萬理相距)에도 시공(時空)을 초월(超越)
부절(符節)하니 이름하여 이락서당(伊洛書堂)이다.

(원문에서는 浩然之 다음 행에 氣가 적혀 있다)
(원문에서는 諸의 다음 행에 賢이 적혀 있다)
<이락서당규약> 전문(前文)에서
신묘년(辛卯年) 5월

어마어마한 입구를 보십시오. 이 성리학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곳에 들어가 공부를 했던 유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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