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는 n세기를 말하며, 그 세기 안에 살았던 사람을 기재한다. 두 세기를 같이 산 사람 또한 생년이 포함된 [nC]에 표시해 적는다. 생년 혹은 몰년을 확인할 수 없는 인물은 앞뒤 관계에 따라 특정 인물 뒷편으로 배치시키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는 출생일 혹은 사망일이 포함된 [nC] 항목에 기재한다. |
[3C]
卑弥呼 [ひみこ/히미코/~242 or 248]
야요이 시대 중 3세기경 야마타니코쿠(邪馬台国, 야마타이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여왕. 일본의 사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173년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거나, 239년에 위(魏)의 명제(明帝)에게 조공해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호칭과 금인(金印)을 받았다고 전한다.
難升米 [なしめ/나시메/?~?]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의 히미코가 위(魏)에 파견한 사신 대표로, <위지왜인전>에 따르면 위(魏) 경초(景初) 3년(239년) 남녀 노비 10명과 반포(斑布)을 헌상하고, 황제 조예(曹叡, 205~239)로부터 솔선중랑장(率善中郎将)의 칭호를 받고, 그가 섬기던 여왕 히미코의 칭호인 친위왜왕 금인을 받고 돌아왔다고 한다.
臺與 [とよ/토요/235~?]
야요이 시대 중 3세기에 살았던 여왕 히미코의 종녀(宗女, 종친의 딸). 히미코의 후계 남왕 다음으로 13세에 왜를 통합했다고 여겨진다. '이요(壹與)'라고도 부른다.
[4C]
[5C]
[6C]
聖徳太子 [しょうとくたいし/쇼토쿠 태자/574.02.07.~622.04.08.]
아스카 시대의 황족이자 정치가. 이 호칭은 후세에서 존칭으로 올린 시호이다. 씨성제를 약화시키는데 공헌했으며, 견수사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와 관위 12계와 17조 헌 법을 실시하여 중앙집권의 틀을 만들었으며, 불교와 유교를 전파했다. '우마야도 황자(厩戸皇子)' 혹은 '우마야도 왕(厩戸王)'이라고도 한다.
小野 妹子 [おの の いもこ/오노노 이모코/?~?]
아스카 시대의 남성 관인으로 카바네(姓)는 오미(臣)이며, 관위는 가장 높았던 다이토쿠(大徳, 대덕)이었다. 제2회 견수사(遣隋使)로 발탁되어 일본 덴노를 '해 뜨는 나라의 천자(日出處天子)'라고 적힌 국서를 수 양제(煬帝)에게 전달했으며, 이후 제3회 견수사까지 갔다왔다. 이모코노오미(妹子臣)라고도 한다.
阿佐太子 [あさたいし/아사 태자/?~?]
백제(百済)의 왕자로, 스이코 덴노(推古天皇, 554~628) 5년(597)에 내조(来朝, 왕을 보러 옴)해 쇼토쿠 태자를 만나자 그를 보고 구세관음(救世観音)의 화신(化身)이라며 합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7C]
蘇我 入鹿 [そが の いるか/소가노 이루카/~645]
아스카시대의 호족으로, 코우교쿠 덴노(皇極天皇) 치세에 국정을 농단하다시피 했는데, 이카루가노미야(斑鳩宮)에 살던 쇼토쿠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노오오에 왕(山背大兄王) 일가를 멸망시켜 위세를 떨쳤으나, 타이카 개신으로 나카노오오에노오우지(덴지 덴노)에게 암살당했다.
藤原 鎌足 [ふじわら の かまたり/후지와라노 카마타리/614~669.11.14.]
아스카 시대의 귀족 및 호족이자 정치가로, 일본 역사상 최대씨족인 후지와라씨(藤原氏)의 시조다. 나카노오오에노오우지(中大兄皇子, 덴지 덴노(天智天皇))와 타이카 개신(大化の改新)을 단행하고, 이후 개신 정부의 핵심 요인이 되어 율령제의 기초를 닦았다. '나카토미노 카마코(中臣 鎌子)' 혹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라고도 한다.
天智天皇 [てんぢてんのう/てんじてんのう/텐지 덴노/626~672.01.07.]
668년부터 672년까지 재위했던 제38대 덴노로, 후지와라노 카마타리(藤原 鎌足)의 협력으로 소가씨(蘇我氏)를 멸망시키고 황태자로서 다이카 개신을 단행했다. 일본사 최초의 호적인 경오연적(庚午年籍)을 만들었으며, 일본사 최초의 율령이라고 여겨지는 근강령(近江令)을 제정해 내정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나카노오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혹은 '카즈라키 황자(葛城皇子)'라고도 한다.
県犬養橘三千代 [あがたいぬかいのたちばなのみちよ/아가타이누카이노 타치바나노 미치요/665?~733)
나라 전기의 궁녀[女官]. 미누왕(美努王)에게 시집가 타치바나노 모로에(橘 諸兄)를 낳고,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 不比等)와 재혼하여, 코묘 황후(光明皇后)를 낳았다. 몬무 덴노(文武天皇), 쇼무 덴노(聖武天皇) 양육에 있어서, 타치바나성(橘姓)을 하사받아 권세를 떨쳤다. '타치바나노 미치요(橘三千代)'라고도 한다.
[8C]
聖武天皇 [しょうむてんのう/쇼무 덴노/701~756.06.04.]
724년부터 749년까지 재위했던 제45대 덴노로,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 不比等)의 딸 코묘시(光明子)를 황후로 삼았다. 그가 즉위한 이후 많은 자연 재해가 일어나 자주 천도하고 또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도다이지(東大寺/동대사)를 포함한 여러 쿠니에 코쿠분지(国分寺/국분사)와 코쿠분니지(国分尼寺/국분니사)를 건립해 불교를 수호하고 널리 알려 불교 진흥에 힘썼다.
和気広虫 [わけのひろむし/와케노 히로무시/730~799]
나라 시대 말기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의 궁녀[女官]. 비전(備前) 출신으로, 와케노키요마로(和気清麻呂)의 누나. 법명은 호우킨니(法均尼). 와케노키요마로와 함께 쇼토쿠 덴노(称徳天皇)를 섬겼고, 우사하치만 신궁 신탁 사건(宇佐八幡宮神託事件)에 연루되어 빈고(備後)에 유배되었다. 이후 용서받고 간무 덴노(桓武天皇)를 섬겼다.
和気清麻呂 [わけのきよまろ/와케노 키요마로/733~799]
나라 시대 말기부터 헤이안 시대 초기의 쿠게(公卿). 비전(備前) 출신으로, 승려 도쿄(道鏡)가 황위에 오르려고 계획했을 때, 우사하치만 신궁 신탁에 의해 이를 저지하고 분노를 사 오스미(大隅)로 유배당하나, 도쿄 실각 후 고닌 덴노(光仁天皇)와 간무 덴노를 섬기며 헤이안(平安) 천도에 힘썼다.
[9C]
[10C]
源経基 [みなもとのつねもと/미나모토노 쓰네모토/?~961.12.30.]
헤이안 시대 중기의 쇼군(武将). 세이와 덴노(清和天皇)의 황자(皇子) 사다즈미 친왕(貞純親王)의 장자로, '로쿠손노우(六孫王, 육손왕)'이라고도 불렸다.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난(조헤이·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을 진정시킬 쯤에, 오노노 요시후루(小野好古)를 따라 활약했으며, 미나모토성(源姓)을 받아 신적강하(臣籍降下)해, 세이와 겐지씨(清和源氏)의 조상이 되었다.
渡辺綱 [わたなべのつな/와타나베노 츠나/953~1025]
헤이안 시대 중기의 무사. 미나모토노요리미츠(源頼光)의 사천왕(四天王) 중 한 명 이었다. 교토의 키도마루(鬼童丸), 오오에야마(大江山)의 슈텐도지(酒呑童子), 라쇼몬(羅生門)의 오니(鬼)를 퇴치했다는 전설이 있다.
藤原道長 [ふじわら の みちなが/후지와라노 미치나가/966~1028.01.03.]
헤이안 시대 중기의 쿠교우(公卿/공경/일본 귀족 계급의 하나)로, 4명의 딸을 황후(后)로 만들어 외척이 된 뒤, 나이란(内覧/내람), 셋쇼(摂政/섭정), 타이죠다이진(太政大臣/태정대신)을 역임하고, 권세를 떨치며 영화를 누렸다. 나중에 병이 들어 출가에 호죠지(法成寺/법성사)를 지었다. 칸파쿠(関白/관백)로 임명된 적은 없지만, 미도칸파쿠(御堂関白)로 칭해졌으며, 그 별칭을 딴 일기인 <미도칸파쿠키(御堂関白記)>가 지금도 전한다.
[11C]
[12C]
藤原 頼長 [ふじわら の よりなが/후지와라노 요리나가/1120.05~1156.08.01.]
헤이안 후기의 공경(公卿). 후지와라노 타다자네(藤原 忠実)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우지노사다이진(字治左大臣), '아쿠사후(悪左府)'라고도 불렸다. 다재박식했기에 아버지(타다자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고, 형 관백(関白)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와는 대립했다. 스토쿠 상황( 崇徳上皇)과 모의해 호겐의 난(保元の乱, 1156.08.05)를 일으켰으나 패사하게 되었으며, 이후 12권의 일기 <타이키(台記)>만 남기며 세상을 뜬다.
阿古屋 [あこや/아코야/?~?]
타이라노 게쿄(平 景清, ?~1196?)의 연인으로, 교토고죠자카(京都五条坂)의 유녀(遊女)였다. 치카마츠 몬자에몬(近松 門左衛門, 1653~1725)의 <슛세카게쿄(出世景清, 1685)>나 분코도(文耕堂)·하세가와 센시(長谷川 千四, 1689~1733)의 합작인 <단오우라카분토군키(壇浦兜軍記)> 등에 등장한다.
[13C]
[14C]
[15C]
[16C]
[17C]
[18C]
[19C]
渋沢 栄一 [しぶさわ えいいち/시부사와 에이이치/1840.03.16.~1931.11.11.]
일본의 사업가. 아호는 세이엔(青淵, 청연). 에도시대 말기에 묘슈(名主) 신분의 농민으로부터 히토츠바시가(一橋家)의 무사에게 추심되어,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쇼군 취임에 따라 막신(幕臣, 막부의 신화)이 되어 메이지 정부에서 관료도 맡게 된다. 민부성(民部省)을 거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아래에서 요시다 키요나리(吉田清成, 1845~1891) 등과 함께 조폐, 호적, 출납 등 다양한 정책 입안을 실시해 1대 조폐두(紙幣頭, 시헤이노카미, 현) 국립인쇄국장)와 대장성(大蔵省) 3등관(三等官) 대장소보(大蔵少輔) 사무취급(事務取扱)이 된다. 이후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사업게로 진출해 제일국립은행(第一国立銀行, 현) 미즈호은행), 도쿄상법회의소(東京商法会議所, 현)도쿄상공회의소), 도쿄증권거래소(東京証券取引所) 등 다양한 500개 이상의 회사와 경제단체의 설립과 경영에 관여했고, 도쿄양육원(東京養育院) 등의 복지사업, 도교자혜회(東京慈恵会), 성루카국제병원(聖路加国際病院) 등의 의료사업, 그 외에도 실업 교육, 여성 교육, 사학 교육 지원, 이화학 연구소 설립 등의 연구 사업 지원, 국제 교류 및 민간 외교 등의 실천에 힘쓰며,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도 '일본자본주의의 아버지(日本資本主義の父)'라고 불리게 된다. 한편, 그의 도덕-경제 합일사상을 '논어와 주판(論語と算盤)'으로 부르며 더욱 참된 경제인으로서 알려진다.
平田 佐矩 [ひらた すけのり/히라타 스케노리/1895.09.26.~1965.12.06.]
다이쇼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의 실업가. 미에현(三重県) 욧카이치시(四日市市)에서 가업을 이어 히라타 제망(平田製網, 현 히라보(ヒラボウ)) 사장이 되어 서양식 카에루마타(蛙股, 다리벌린 개구리 형상)의 어망(漁網)을 짜는 편강기(編網機)를 발명해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또, 한신전기제강(阪神電気製鋼)의 사장을 역임하고, 욧카이치시 시의회의원(市議会議員), 시조역(市助役, 부시장) 등을 거쳐 1959년엔 제11대 욧카이치시 시장(1959.05~1965.12)이 된다. 그가 당선되고 나서 이세 만 태풍(伊勢湾台風)이 일어나 그로 인해 입은 피해 복구에 집중했고, 욧카이치시를 미에현의 석유화학산업의 중심 도시로 발전시켰다. 다만, 이 급작스런 공업화로 욧카이치시 천식(四日市ぜんそく)이 만연해져 관련 환자 치료비를 무료화하기도 했다. 한편, 일본횡단운하(日本横断運河)와 같은 대대적인 프로젝트가 구상되기도 했으나 실행되진 않았다.
[20C]
手塚 治虫 [てづか おさむ/데즈카 오사무/1928.11.03.~1989.02.09.]
오사카 출신의 20세기 만화가. 본명은 한자 표기가 다른 데즈카 오사무(手塚 治)이며, 일본의 스토리 만화와 TV 애니메이션 분야를 확립했다. <철완 아톰(鉄腕アトム, 국내반영명 '우주소년 아톰')>, <불새(火の鳥)>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石ノ森章太郎 [いしのもり しょうたろう/이시노모리 쇼타로/1938.01.25.~1998.01.28.]
미야기 출신의 20세기 만화가. 본명은 오노데라 쇼타로(小野寺章太郎)이며, SF, 시대물, 성인용 학습만화 등 광범위한 장르를 그려 나갔으며, 면밀한 스토리 전재와 리얼한 터치로 호평을 받는다. 데표작으로는 <사이보그 009(サイボーグ009)>, <가면라이더(仮面ライダー)>, <호텔(HOTEL)>, <만화일본경제입문(マンガ日本経済入門)>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어린이용 특촬방송 <비밀전대 고레인저(秘密戦隊ゴレンジャー)>의 원작도 그렸다.
[2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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