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곡수원지에 세워진 부산경찰서폭탄투척사건 의거자, 박재혁 의사 동상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성지곡수원지에 세워진 부산경찰서폭탄투척사건 의거자, 박재혁 의사 동상

728x90

 

(구) 성지곡수원지 둘레길을 걷다가 수원지의 서북쪽 너른 광장에 진입하면 박재혁 의사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소속의 박재혁 의사는 고서를 판매하는 상인으로 위장해 당시 독립운동가를 잔혹하게 진압했던 부산경찰서의 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를 만나 고서를 보여주는 척 하다가 그의 죄를 고하고 폭탄을 터뜨려 중상을 입힌 '부산경찰서폭탄투척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카카오맵 기준으로 표시된 위치와 실제 동상이 있는 위치는 다릅니다. 항공뷰를 통해 봤을 때, 넓은 제단 중 아래편 '헌7학병 6.25참전기념비'가 있다고 한 곳에 실제로는 '박재혁 의사 동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위쪽 제단에 실제로 '헌7학병 6.25참전기념비'가 있죠. 일단 카카오맵에 수정 요청을 해놨는데 어떻게 될지 지켜보겠습니다.

박재혁의사동상
관리번호 : 40-1-17
관리자 : 부산시설공단
국가보훈부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나 부산진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와 부산상업학교(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1920년 8월 만주 지린성(吉林省)에 있는 무장 항일독립 단체인 의열단(義烈團, 1919~1928)에 입단한 후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를 계획하고, 같은 해 9월 부산으로 들어와 고서적상으로 위장,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橋本秀平)에게 접근하여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의거로 박재혁 의사는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었다. 의사는 '왜적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 손으로 죽자"하고 단식을 시작하였고, 결국 형 집행 전에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현재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박재혁 의사의 독립정신을 후손들에게 일깨우기 위해 1998년 2월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박재혁의사 약력
1895년 5월 17일 동구 범일동에서 3대 독자로 출생하다.
1911년 3월 22일 부산진공립도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를 졸업하다.
1914년 3월 22일 부산공립실업학교(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다.
1917년 6월 x일 독립투쟁을 위해 상해로 건너가다.
1920년
4월 19일 독립자금조달을 위해 일시 귀국하다.
9월 x일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거사자금과 폭탄 등을 지원받다.
9월 14일 부산경찰서 서장실에서 폭탄 추척 후 체포되다.
9월 x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다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다.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다.
5월 12일
(실제 : 5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단식투쟁 중 27세로 옥중 순국하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다.
1966년 4월 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다.

헌서
하느님이 백두에 내려
삼천리를 일구셨네
흰 옷 즐겨 입던 의사
이 땅을 지켜 왔다
이제사 우리도 알리
임을 닮아 살리라

1998년 2월 일

김무조 짓고
조영조 쓰다
건립 : 부산광역시
제작 : 롯데그룹
조각 : 한인성

건립취지문
우리는 유서 깊은 이 백양산 기슭에 박재혁 의사의 동상을 세워 그 숭고한 애국 충절을 길이 우러러 보려한다. 박의사는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총명과 담력이 뛰어났다. 이후 부산상업학교 재학 시절부터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다가 졸업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망명중인 독립 투사들을 만나 3대 독자의 몸을 항일 구국의 제단에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단장으로부터 폭탄을 받아 환국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에게 중상을 입힘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현장에서 피체(被逮, 붙잡힘), 원수의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왜놈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단식으로 옥중에서 순국하니 향년 27세요 때는 1921년 5월 12일이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마침내 조국이 광복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국립묘지로 이장되니 선열에 대한 보답이라 하겠다. 박의사의 시종여일한 애국 충정과 백절불굴의 굳은 지조는 겨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1998년 2월 일
광복회부산지부장 이태길 짓고
부산시문화재전문위원 조영조 쓰다

만고의 충절 박재혁의사 동상 건립 연유문
부산시민의 정성과 뜻을 모아 박재혁의사님의 애국정신을 받들어 동상이 이곳에 우뚝 자리 잡기까지 연유를 여기에 새겨 박재혁 의사님을 추모하는 시민의마음에 세세연연(세세연년, 歲歲年年) 이어지기를 바란다.

1921년 5월 14일 박재혁의사님의 운구가 부산진역에 도착하자 시민과 함께 피눈물로 통곡하신 의사의 거사동지이신 소정(蘇庭) 최천택(崔天澤, 1896~1961) 선생님이 좌천동 동산에 정성껏 모신 이후 1966년 국립현충원에 이전 안장되셨고 1998년 부산시민과 부산상고동창회와 3.1동지회 회원들이 박재혁의사님의 동상을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1996년 3월 1일 3.1동지회(회장 옥영진) 부설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회장 최해군)를 설립하고,
의사님의 생질 유족회 회장(김갑경) 선임
1996년 3월 부산시 문화발전위원(22명)과 4차 회의를 거쳐 장소 선정은 박재혁의사기념사업회 유족회 회장(김갑경)과 3.1동지회 사무총장(오장수)에 위임 
1996년 8월 박재혁의사 동상건립 장소 답사 후 어린이대공원 현 위치 선정
1997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에서 동상건립 확정함
동상건립 자금은 롯데그룹에서 헌증
1998년 5월 12일 박재혁의사 동상 준공 제막식
추모제는 사단법인 3.1동지회 부설 기념 사업회에서 매년 봉행
표지석건립위원 최해군 김창식 한인성 서봉수 장안일 오장수 신봉환
김형호 김현구 최낙춘 조귀환 변등헌(부산상업고등학교 총동창회)

박제혁 제적등본과 동아일보 사망보도 (출처 : 오마이뉴스)

이후 그는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1921년 5월 11일 새벽에 사망했고, 고향에 잠시 묻혔다가 현충원에 모셔졌습니다. 이 동상에 대해 아쉬운 점은 현재는 틀린 것으로 여겨지는 최전택의 증언으로 그가 5월 12일에 사망했다고 적은 것입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그는 5월 11일 새벽에 사망했습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넓은 수원지입니다. 그리고 그 멀리 있는 조국의 산과 하늘까지입니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을 위해 몸을 바치고 다시 부산에서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 모두 바친 박재혁 의사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