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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3호선 구포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와 산책로를 따라 쭉 내려오면
어느새 저 왼편 위로 기념비 하나가 보입니다~ 이 기념비가 있는 쪽으로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됩니다. 그럼 기념비 뒷면이 나오죠~
기념비 정면쪽 계단도 있는데요. 보도와 연결되지 않아 매우 위험합니다. 전 사진을 찍으러 내려갔는데, 다 내려가진 않았어요.
1995년 8월 15일에 세워진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입니다.
기념비의 오른편에는 설명문이 있습니다. 이 설명문 위에는 이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또한 '위대한 북구유산 40선' 중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
국가보훈처 지정현충시설 |
* 관리번호 : 40-1-21 * 관리자 : 부산시 북구청장 |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독립운동을 기념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선열들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하여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조성하였다. 구포장터 3·1운동은 경성의전(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양봉근(楊奉根)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김옥겸(1892~1957) 등)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였다. 3월 29일 정오, 청년들과 장날을 맞아 모인 장꾼, 농민, 노동자 등 1, 000여 명이 구포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벌였다. 무자비하게 총칼로 제지하는 일경에 의해 9명이 부상을 입고 주동자 42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구포 지역 주민들의 굳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보여준 의거로 기록되고 있다. 기념비의 뒷면에는 구포장터 3·1운동에 앞장 선 43분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고 있다. 해마다 3월 29일에 즈음해 구포장터 3·1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고 온 몸으로 일제에 항거한 구포 주민들의 민족정신을 면면이 이어가고 있다. |
구포장터 3.1운동 기념비 비문 |
겨레의 젖줄인 낙동강은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 고장 사람들이 피 흘리며 항쟁했던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유유히 흘러내리고 있다. 강물 따라 뱃길을 오르내린 큰 나루터가 있었던 강변의 장터에서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은 천여명 장꾼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이어져,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왜경의 총칼 앞에서도 맨몸으로 싸웠고, 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하다가 끝내 옥살이를 해야했던 역사적 사실은 이 고장에도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참으로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구포장터 항일 투쟁의 혈맥을 후대에 길이 물려 주기 위하여 8·15광복 제50주년을 맞아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강둑 위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운다. |
구포장터 3·1운동에 앞장선 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서울 3·1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분:양봉근(楊奉根)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신 분(42명) : 김옥겸(金玉兼) 유기호(柳基護) 박덕홍(朴德弘) 정치호(鄭致浩) 허희중(許希中) 손진태(孫晋泰) 이몽석(李夢石) 양태용(梁泰鎔) 권용학(權龍鶴) 김장학(金章鶴) 윤경(尹涇) 김영길(金永吉) 안화중(安華重) 임봉래(林鳳來) 김윤길(金閏吉) 유진영(兪鎭榮) 김용이(金用伊) 윤대근(尹大根) 최종호(崔宗鎬) 허정(許楨) 김달수(金達洙) 윤정은(尹正殷) 백인봉(白仁鳳) 윤경태(尹敬泰) 강석이(姜碩伊) 허치옥(許致玉) 변태엽(邊泰燁) 박용수(朴龍水) 노원필(盧源弼) 윤장수(尹張守) 박영초(朴永初) 도우황(都宇黃) 박도백(朴道伯) 김덕원(金德元) 조해규(趙海奎) 신성집(申性執) 박석오(朴碩五) 강두조(姜斗兆) 진유관(陳有寬) 노원길(盧源吉) 최한봉(崔漢奉) 정태호(鄭泰浩) |
일천구백구십오년(1995년) 팔월(8월) 십오일(15일) 삼십만 북구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은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3월 11일이 되자 부산 부산진의 일신여학교에서 먼저 만세 함성이 터졌고, 13일에는 동래시장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 함성이, 18~19일에는 동래시장의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을 중심으로한 만세 운동이 진행됩니다. 이 물결은 낙동강 옆 구포장터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구포가 꽤 멀기 때문에 언젠가 한번은 가야지 하다 이번 3.1절을 맞아 찾아왔습니다. 항상 느끼지만 그들의 눈물과 피, 함성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나라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선열들께 정말 그리고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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