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생각하는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부산임시수도기념관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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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나라를 생각하는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부산임시수도기념관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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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시수도기념관 관저 1층

원래 '나라를 생각하는 집'이란 뜻의 사빈당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전)대통령관저인 부산 서구 부민동에 위치한 부산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을 찾아왔습니다.

 

한국 전쟁 중 임시수도가 된 부산의 발전상을 담은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1. 주차장부산지하철 토성역 2번 출구로 나와 한 블럭을 지나 구덕로 199번길을 따라 쭉 3블럭 올라간 뒤 북쪽으로 꺽으면 보이는 풍경입니다.주차장은 오후 6시까지 열리며, 주차는 관람객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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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빈당(思邠堂)의 유래
'사빈당(思邠堂)'은 경남도청 창원 이전 후인 1984년 6월 25일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개관한 대통령 관저의 당호(堂號, 집의 이름)이다. 개관에 즈음하여 역사학자 정중환(丁仲煥, 1914~2001) 선생이 지은 당호독립운동가 한형석(韓亨錫, 1910~1996) 선생의 글씨로 현판을 새겨 걸었다.

'사빈(思邠)'은 '빈(邠, 나라 이름 빈)을 생각한다(思)'는 뜻이다. '빈(邠)'은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산시 성) 순읍(旬邑, (현) 쉰이 현)에 있었던 중국 고대 은(殷)나라의 제후국을 지칭한다. 또한 (邠)은 주(周)나라 개국의 기초를 닦은 문왕(文王)의 조부(祖父,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다스렸던 나라이기도 하다.

고공단보는 (邠)을 덕과 의로써 다스렸으므로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받들었다. 어느 날 북방의 오랑캐 훈육(獯鬻)과 융적(戎狄)이 재물과 땅, 백성을 요구하며 침략하자 고공단보는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싸우지 않고 (邠)을 내주고 기산(岐山, (현) 치산 현) 남쪽의 주원(周原)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빈(邠)의 백성들도 모두 고공단보를 따라왔으며, 그의 덕망이 널리 알려지자 이웃나라 백성들이 그에게 귀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그의 손자 창(昌, 주의 문왕)이 (邠)을 회복함은 물론 은나라에 이어 중국 전체의 패권을 장악해 주(周)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사빈당'이라는 당호는 '고공단보'와 '(邠)'의 고사(故事)에 빗대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침략에 의하여 서울을 내주고 부산에 임시수도를 마련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빼앗긴 땅을 수복했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당호를 지은 정중환(丁仲煥, 1914~2001) 선생은 1941년 일본 다이쇼대학(大正大学) 문학부를 졸업하고 해방 후 부산대, 동아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던 역사학자이다.

평생을 문화재 발굴과 수집조사에 몸 바쳐 초창기 한국사와 고고학 연구를 개척하였으며, 특히 가야하 및 한일관계사연구에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현판의 글씨를 쓴 한형석(韓亨錫, 1910~1996)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항일 군가의 작곡가, 가극연출가 등으로 활동하면서 무장항일투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해방 후에는 부산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독보적인 필법을 창안란 서예가로 유명하다.

임시수도기념관 안내도입니다.

이렇게 신발을 벗고 비치된 실내용 슬리퍼를 갈아신고 들어가야 합니다.

서재(書齋, library)

1층 서재의 모습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모형이 앉아 있습니다.

내실(內室, women's quarters)입니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Francesca Donner Rhee) 여사가 이곳에서 머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식당(dining room)입니다. 이곳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식사를 했겠죠?

당시 주방의 식기 사진과 1951년 6월 27일 찍은 노르웨이 병원선 고나계자들과의 담소 사진도 걸려 있습니다.

지금은 모형전시실로 쓰고 있는 거실(living room)입니다.

증언의 방으로 쓰이는 경비실입니다. 경비실 답게 창문으로 바깥 풍경이 잘 보입니다.

이곳엔 한국전쟁 특공대원 이정숙 할머니의 증언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특공대원 이정숙 할머니의 증언
1950년 9월 함경북도 성진시에 입성한 국군(백골부대)은 곧바로 G-2 대원을 모집하였습니다. 이에 성진여자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나는 19세의 나이로 자원입대하였으며, 정보처 특수공작대 요원이 되어 첩보수집과 인민군 생포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우리 G-2 대원들은 부대 본진에 앞서 적지를 수색하며 길주, 명천, 북경성, 청진, 나남, 웅기, 종성을 지나 계속 북진하였습니다.

계속 이어진 위험한 임무수행과정에서 일부 대원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나는 끝까지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오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대에 잔류하였습니다. 당시 국군에 밀려 후퇴하던 인민군들은 낮에는 민간인 행세를 하다 밤이면 아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고, 도주하여 죄 없 민간인들을 죽이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솔밭에서 집단 학살된 여학생들의 시신, 눈 속에 나뒹굴던 수많은 민간인들의 시신과 같이 참혹한 현장이 곳곳에서 목격되었습니다.

군가를 부르며 북진하는 우리의 피는 끓었고 무적의 용사라 자부하면서 대한에 충성을 다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어느날 밤 부대에 후퇴명령이 하달되었고, 그 길로 우리는 후퇴를 시작하였습니다. 밤이면 날아든 중공군과 인민군의 박격포를 피해 라이트를 끄고 가다시피 하여 후퇴하였습니다.

눈이 쌓여 함경남도 개마고원에서 많은 군수품을 소각하였고 부상병은 헬리콥터로 후송하였습니다. 함흥은 후퇴하며 집결한 동부, 서부, 중부전선의 군과 민간인들이 한데 섞여 아수라장이었고, 바다에서는 뒤쫓는 중공군, 인민군을 제지하기 위한 미함대의 함포사격이 이어졌습니다. 잠시 남하하였다가 다시 전진한다는 다짐을 남긴 채 우리는 엘에스티(LST, 전차상륙함)을 타고 남하하였습니다. 그때가 1950년 12월 20일이었습니다.

- 이정숙, <자유에 대한 애정이 회환과 고통으로> 6.25참전증언록 중에서
한국전쟁 중 특공대원으로 활동한 이정숙 할머니는 1932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성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9월 백골부대에서 모집한 G-2 특공대에 자원입대해 수색,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1년 4월까지 8개월관 복무했다.
이후 부산에 내려와 줄곧 살면서 안보강연, 자원봉사활동 등을 통해 전후세대들에게 전쟁의 잔혹함과 평화통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활동을 하고 있다.

 

화장실과 욕실도 있습니다. 당연히 전쟁통이라 화려한 곳을 살기는 어려웠겠지만, 생각보다 검소한 느낌이 드는 화장실과 욕실입니다. 물론, 당시 기준으로는 이렇게 타일 깔린 집은 엄청 호화로운 집이었겠지만요... 소개한 곳 외에도 응접실, 부엌 등 다른 건물도 있으니 한 번 구경가보세요~

 

2. 임시수도기념관 관저 2층

2층은 안전상의 이유로 관람인원을 최대 7명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고 조심히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마루방과 집무실을 볼 수 있습니다.

집무실 앞쪽과 뒤쪽에서 사진을 찍어봤는데요~

2층의 집무실은 매우 길고 큽니다.

집무실에서는 부산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연혁과 이곳에서의 대통령의 정치활동, 임시수도기 주요 정치사 연표 등에 대한 설명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회상의방으로 쓰이는 마루방에서는 <임시수도 부산, 1000일의 역사>(7분)와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7분)라는 영상이 틀어집니다. 당시 시대의 회상에 대한 영상물이 틀어지는데, 시간이 있으시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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