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신라본기> 속 장보고(장궁복)와 청해진 그리고 그 시절 이야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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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신라본기> 속 장보고(장궁복)와 청해진 그리고 그 시절 이야기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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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원성왕부터 경순왕까지의 족보(참고용)

 

1. <삼국사기><신라본기><흥덕왕>

1-1. 흥덕왕 3년(828)

신라의 해상 교역로와 9세기에 있었던 완도의 청해진 위치 (출처 : 우리역사넷)

(흥덕왕 3년(828))
봄 정월, 대아찬(大阿飡) 김우징(金祐徵)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 사신을 당(
唐)에 보내 조공했다.


3월, 눈이 3척이나 깊게 내렸다.


여름 4월, 청해대사(清海大使) 궁복(弓福), 성(姓)은 장씨(張氏)이고,[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唐) 서주(徐州)로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가, 후에  귀국해 왕을 알현하고, 1만명을 거느리고 청해(清海)에 진(鎮)을 세웠다. [청해(清海)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
한산주(漢山州) 표천현(瓢川縣)의 요사스러운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빨리 부자가 되는 술법이 있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자못 현혹시켰다. 왕이 이 일에 대해 듣고 말하기를, "사악한 방도[左道]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선왕의 법註이다."라고 하고, 그를 먼 섬[逺㠀]으로 내다 버렸다.

음력 828년 4월, 당에 있다가 신라로 돌아온 장궁복(장보고)은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을 데리고 지금의 완도 내 장도로 가서 청해진(清海鎮, 828~851)을 세웁니다. 이후 그는 해적들을 소탕하며 신라인 노예 매매를 거의 근절시키고, 엔닌을 무사히 당나라로 보내주거나, 당의 산둥 반도에 사찰 적산법화원을 세우는 등 동북아시아 해양의 안전을 책임지게 됩니다.
 

1-2. 흥덕왕 11년(836)

(흥덕왕) 11년(836)
봄 정월 신축(辛丑) 삭(朔, 초하루) 일식[日有食之]이 있었다.
왕자(王子) 김의종(金義琮)을 당(唐)으로 보내 은혜에 감사드리고 아울러 숙위(宿衛)하게 했다.


여름 6월, 패성[星孛, 혜성]이 동쪽에서 나타났다.


가을 7월, 태백(太白, 태백성)이 달을 침범했다.


겨울 12월,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는 흥덕(興德)이라 했다. 조정(朝廷)은 (그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章和王妃)의 능에 합장했다.

 

2. <삼국사기><신라본기><희강왕>

2-1. 희강왕 원년(836)

희강왕(僖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제융(悌隆)[혹은 제옹(悌顒)],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孫) 이찬(伊飡) 헌정(憲貞)[혹은 초노(草奴)]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 비(妃)는 문목부인(文穆夫人)으로, 갈문왕(葛文王) 충공(忠恭)의 딸이다.


처음 흥덕왕(興德王)의 사망 때, 그 당제(堂弟) 균정(均貞)과 당제(堂弟)의 아들 제융(悌隆)이 모두 임금이 되고자 했다. 이때 시중(侍中) 김명(金明),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裴萱伯) 등은 제융(悌隆)을 받들었고, 아찬(阿飡) 우징(祐徵)은 조카[姪] 예징(禮徵) 및 김양(金陽)과 함께 그 아버지 균정(均貞)을 받들었는데, 동시에, (궁궐) 안으로 들어와 서로 싸웠다. 김양(金陽)은 중전(中箭)에 맞아, 우징(祐徵) 등과 도주했고, 균정(均貞)은 해를 당했다. 그리고 후에 제융)悌隆)이 이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2-2. 희강왕 2년(837)

(희강왕 2년(837)) 5월, 우징(祐徵, 신무왕)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처자식과 함께 황산진구(黃山津口)로 달아나서, 배를 타고 청해진대사(清海鎮大使)궁복(弓福)에게 가 의탁했다.

음력 837년 5월, 당시 왕위계승싸움에서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후의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와서 장보고에게 의탁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쯤 장보고의 직위는 청해진대사(清海鎮大使)였습니다.
 

2-2. 희강왕 3년(838)

(희강왕) 3년(838)
봄 정월 상대등(上大等) 김명(金明), 시중(侍中) 이홍(利弘) 등이 병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고 왕과 측근[左右]을 해했다. 왕은 스스로 온전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내 궁중(宮中)에서 목을 맸다. 시호를 희강(僖康)이라 하고, 소산(蘇山)에 장사지냈다.

한편, 음력 838년 1월, 김명은 시중 이홍 등과 함께 왕의 측근을 해합니다. 그러자 희강왕은 자신도 죽을 것을 알고 목을 매 자살했죠. 그렇게 김민이 즉위해 민애왕이 됩니다.
 

3. <삼국사기><신라본기><민애왕>

3-1. 민애왕 원년(838)

(민애왕 원년(838))
민애왕(閔哀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姓)은 김씨(金氏), 이름은 명(明)이다.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증손(曾孫)이다. 대아찬(大阿飡) 충공(忠恭)의 아들로, 여러 관직을 (거쳐) 상대등(上大等)이 되었고, 시중侍中) 이홍(利弘)과 함께 왕을 핍박하고 죽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돌아가신 아버지[考]를 헌강대왕(宣康大王)이라 추시(追諡, 죽은 뒤에 시호를 추증함)하고, 어머니 박씨(朴氏) 귀보부인(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삼고, 아내 김씨(金氏)를 윤용왕후(允容王后)로 삼았다. 拜이찬(伊飡) 김귀(金貴)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고, 아찬(阿飡) 헌숭(憲崇)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 김양(金陽)이 병사를 모집하여 청해진(淸海鎭)으로 들어가 우징(祐徵,
신무왕)을 만났다. 아찬(阿湌) 우징(신무왕)은 청해진에서 김명(金明, 민애왕)이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진대사(鎭大使) 궁복(弓福)에게 일러 말하기를, "김명은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고, 이홍(利弘)도 마음대로 군부(君父)를 죽였으니,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장군의 병사에 의지하여 군부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궁복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의(義)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勇)이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저는 비록 용렬(庸劣)한 사람이지만, 명령하시면 곧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병사 5,000명을 나누어, 친구인 정년(鄭年)에게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아니라면 이 화란(禍亂)을 평정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겨울 12월, 김양이 평동장군(
平東將軍)이 되어 염장(閻長), 장변(張弁), 정년, 낙금(駱金), 장건영(張建榮), 이순행(李順行)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다다랐다. 왕은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게 했다.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시켜 기마병[馬軍] 3천으로 돌격하게 했는데, 적을 거의 다 살상했다.

김우징과 같은 편이었지만, 왕위계승싸움에서 잠시 몸을 피할 곳을 찾던 김양(金陽) 또한 김우징의 소식을 듣고 838년 2월, 청해진으로 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며 아버지와 선왕의 복수를 하고 싶으니 난을 평정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장보고는 '그 청을 받아들인다'라고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친구 정년(鄭年)에게 청해진의 군사 절반 정도인 5000명을 주며 난을 진압하게 해달라고 했죠.
 

3-2. 민애왕 2년(839)

(민애왕) 2년(839)
봄 윤(閏) 정월, (김양의 군사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의 언덕[達伐之丘]에 다다랐다. 왕은 군사가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伊飡) 대흔(大昕)과 대아찬(大阿飡) 윤린(允璘), 의훈(嶷勛) 등에게 명해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도록 했다. (김양의 군사가) 또 한 차례 싸움에 크게 이겨, 임금의 군사[王軍]의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西郊大樹] 밑에 있었는데, 측근들[左右]이 모두 흩어져 혼자 서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月遊)의 집[月遊宅]으로 도망쳤으나, 병사들이 찾아 그를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했다.

김양은 결국 민애왕을 죽여 선왕의 복수를 합니다. 그리고 그 왕의 자리엔 김우징이 오르는데, 그가 신무왕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장보고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4. <삼국사기><신라본기><신무왕>

4-1. 신무왕 원년(839)

신무왕(神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손자인 균정(均貞) 상대등(上大等)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 동생[從弟]이다. 예징(禮徵) 등이 궁금(宮禁, 궁궐)을 깨끗이 숙청하고, 예절을 갖춰 그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의) 조부[祖] 이찬(伊飡) 예영(禮英)[혹은 효진(孝眞)이라고도 한다.]을 혜강대왕(惠康大王)으로 삼아 추존하고, 돌아가신 아버지[考]를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삼고, 어머니 박씨(朴氏) 진교부인(眞矯夫人)을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삼고, 아들 경응(慶膺)을 태자(太子)로 삼았으며,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을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고 식실봉(食實封, 식읍) 2천 호를 주어 봉했다.
이홍(利弘)이 두려워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산림(山林)으로 숨었으나, 왕이 기사[騎士, 기병]을 보내 (그를) 쫓아가 잡아 죽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당(唐)에 보내면서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에게 노비(奴婢)를 주었으나, 황제[帝]가 그 일을 듣고 먼 나라 사람이 불쌍하다 여겨 조서[詔]로 명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왕이 큰 병으로 드러누웠다. (왕의) 꿈에 이홍(利弘)이 화살을 쏘아 등에 맞았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등에 종기[瘡]가 났다. 이달 23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 지냈다.

신무왕은 장보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식읍 2천 호를 주고, 감의군사라는 관호를 줍니다. 이 사태에서도 민애왕을 따랐던 이홍은 도망갔는데, 결국 죽임 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신무왕은 등에 난 종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합니다...

 

5. <삼국사기><신라본기><문성왕>

5-1. 문성왕 원년(839)

(839년) 문성왕(文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응(慶膺)이다.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이며,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한다.]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했다[大赦].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이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아버지 신무왕[神考]을 도와 선조[先朝]의 큰 적을 없앴으니, 그의 공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바로 (궁복을)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아울러 장복(章服, 관복)을 하사했다.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이 즉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도왔던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삼고, 관복을 하사합니다.

 

5-2. 문성왕 7년(845)

(문성왕) 7년(845)
봄 3월,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궁복(弓福)의 딸을 두 번째 왕비[次妃]로 삼고자 하니, 조정의 신하들[朝臣]이 간하여 말했다.

"부부의 도는 사람의 큰 윤리입니다. 그러므로 하(夏)는 도산(塗山)으로 흥하였고, 은(殷)은 신씨(氏)로 번창하였으며, 주(周)는 포사(褒姒)로 멸망했고, 진(晉)은 여희(驪姬)로 혼란했습니다. 즉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있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궁복은 섬사람[海島人]인데, 그의 딸을 어찌 왕실의 배필[配王室]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따랐다.


겨울 11월, 우레가 쳤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12월, 초하루에 해 세 개[三日]가 나란히 나타났다.

또,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두번째 왕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신하들은 별 볼 일 없는 섬집안사람의 딸을 왕가의 아내로 맞는 것은 옳지 않다고 호소했고, 결국 결혼 건은 없던 일로 됩니다.

 

5-3. 문성왕 8년(846)

(문성왕) 8년(846)
봄, 청해(淸海)의 궁복(弓福)이 왕이 (그의) 딸을 바치는 것[納女]을 원망해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조정에서는 장차 그를 토벌한다면 생각하지도 못한 환난이 있을 것이 염려스럽고, (그를) 그대로 두자니 그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근심했다. 무주 사람[武州人] 염장(閻長)은 당시에 용장(勇壯, 날래고 씩씩함)하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가) 와서 말했다.

"조정에서 다행히 저의 요청을 들어 주신다면, 저는 한 명의 졸개도 없이 그저 맨주먹[空拳]만으로 궁복의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 임금이 따랐다.

염장은 거짓으로 나라를 배반한 척하고 청해(淸海)에 투항했다. 궁복은 힘센 장사(壯士)를 좋아했기에 시의(猜疑, 시기와 의심)없이 (그를) 귀한 손님[上客]으로 대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침내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劒]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 그의 무리를 불러 설득하니, 엎드려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 소식은 장보고에게도 당연히 전해졌고, 결국 이에 분노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무진주(현재의 전남과 광주를 합친 지역)의 염장(閻長)이 왕 앞에 나서서 자신이 그를 죽이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곧 청해진으로 갑니다. 그는 신라를 배반한 척 하며 청해진에 투항했고, 곧 장보고와 친한 사이가 됩니다. 그러다 장보고가 술에 만취한 사이, 염장은 장보고의 칼을 빼앗아 그를 암살하고, 반란 세력을 진정시킵니다. 그렇게 삼국사기에서 장보고의 이야기는 끝납니다.

 

5-4. 문성왕 13년(851)

(문성왕 13년(851)
봄 2월 청해진을 혁파[罷]하고, 그 곳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당(唐)에 사신으로 갔던 아찬(阿飡) 원홍(元弘)이 불경과 불사리[佛牙]를 가져오니 왕이 교외로 나가서 맞이했다.

장보고가 사망한지 5년 만인 음력 851년 2월, 청해진을 혁파하고, 그 지역 사람들을 벽골군(현 전북 김제 일대)로 옮깁니다. 해상을 주름잡던 장보고와 그가 관리했던 청해진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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