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속 김헌창 관련 내용 정리
본문 바로가기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삼국사기> 속 김헌창 관련 내용 정리

728x90
780년, (통일)신라의 혜공왕이 반란군에 의해 사망합니다. 그렇게 번영하던 신라 중대가 지고, 혼란기인 신라 하대로 돌입하게 됩니다. 진골 쥐족 왕위 다툼 때문에 혜공왕 사후 약 150년간 20여 명의 왕이 교체되는데요. 그 중 통일신라 내에서 가장 큰 반란이자 내전이었던 김헌창의 난(9세기)이 일어납니다. 이 내용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도 줄곧 출제되는 내용이죠.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그 난을 일으킨 김헌창을 어떻게 적고 있는지 정리해봤습니다.

1. 신라의 17관등

등수 이름 가능한 신분
1 이벌찬(伊伐湌)
(이벌간, 우벌찬, 각간, 각찬, 서발한, 서불한)
진골
2 이찬(伊湌)
(이척찬, 일척간, 이간)
3 잡찬(迊湌)
(소판, 잡판, 잡간)
4 파진찬(波珍湌)
(해간, 파미간, 파진간기, 파진한기)
5 대아찬(大阿湌)
(대아간)
6 아찬(阿湌)
(아척간)
진골 6두품
7 일길찬(一吉湌) 6두품
8 사찬(沙湌)
9 급찬(級湌)
10 대나마(大奈麻) 6두품 5두품
11 나마(奈麻) 5두품 4두품
12 대사(大舍) 4두품
13 사지(舍知)
14 길사(吉士)
15 대오(大烏)
16 소오(小烏)
17 조위(造位)

신라는 골품제라는 독특한 계층 분리 체계를 갖추고 있었는데, 왕족인 성골과 진골, 그리고 귀족층인 6두품, 5두품, 4두품 등이 그 예입니다. 4두품이라고 한 데에서 3~1두품 혹은 3~0두품도 있었을 것이라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신라의 17관등은 골품제에 따른 각 신분이 어떤 관등까지 오를 수 있느냐를 정한 것입니다.

아래서부터 4두품은 기본적으로 12등 대사(大舍)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능력 등을 인정받아 일부는 나마(奈麻)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습니다. 

5두품은 11등 나마(奈麻)부터 10등 대나마(大奈麻)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6두품은 10등 대나마(大奈麻)부터 6등 아찬(阿湌)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왕족 중 진골은 6등 아찬(阿湌)부터 1등 이벌찬(伊伐湌)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김헌창' 관련 기록을 정리하면서 다양한 17관등이 나오는데, 이를 잘 보고 대략적으로 그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래 관등이 표시된 인물들의 이름을 정리했으니, 참고바랍니다.

등수 이름 가능한 신분
인명
1 이벌찬(각간) 진골
김충공(金忠恭)
2 이찬 김헌창(金憲昌)
제옹(悌邕)
김영공(金永恭)
김균정(均貞)
3 잡찬 위공(衛恭)
김웅원(雄元)
윤응(允膺)
4 파진찬 제릉(悌凌)
5 대아찬 김육진(金陸珍)
김우징(祐徵)
6 아찬 진골 6두품 정련(正連)
녹진(祿眞)
7 일길찬 6두품
장웅(張雄)
9 급찬 최웅(崔雄)
영충(令忠)
11 나마 5두품 4두품 황지(黃知)
12 대사 4두품
검모(黔牟)

 

2. <삼국사기><신라본기><애장왕>

2-1. 애장왕 8년(807) : 이찬 김헌창의 시중 등재

(애장왕) 8년(서기 807년)
봄 정월, 이찬(伊飡) 김헌창(金憲昌)[혹은 정(貞)이라고도 함]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2월, 임금이 숭례전(崇禮殿)에 앉아 음악[樂]을 감상했다.


가을 8월, 큰 눈이 내렸다.

 

2-2. 애장왕 10년(809) : 애장왕 시해 사건

(애장왕) 10년(서기 809)
봄 정월, 달이 필(畢, 필수(畢宿))를 범했다.


여름 6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의 소금창고[鹽庫]에서 소리가 났는데, 소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벽사(碧寺)에서 두꺼비[蝦蟆]가 뱀을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대아찬(大阿飡) 김육진(金陸珍)을 당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토산물[方物]을 바쳤다.
크게 가물었다.[大旱]
임금의 숙부 언승(彦昇, 헌덕왕)이 그의 동생 이찬(伊飡) 제옹(悌邕, 애장왕)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와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시해했다. 임금의 동생 체명(体明)이 임금을 지키고 있다가[侍衛] 함께 해를 당했다. 임금을 추시(追諡, 죽은 뒤해 시호를 추증함)해 애장(哀莊)이라 했다.

 

3. <삼국사기><신라본기><헌덕왕>

3-1. 헌덕왕 5년(813) : 이찬 김헌창의 무진주도독 발령

(헌덕왕) 5년(서기 813년)
봄 정월, 이찬(伊飡) 헌창(憲昌)을 무진주도독(武珍州都督)으로 삼았다.


2월, 시조묘에 참배했다. 현덕문(玄德門)에 불이 났다.

 

3-2. 헌덕왕 6년(814) : 무진주도독 김헌창의 시중 등재

(헌덕왕) 6년(서기 814년)
봄 3월, 숭례전(崇禮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이르자 임금은 거문고를 타고[鼓琴], 이찬(伊飡) 충영(忠榮)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 나라의 서쪽 지방에 큰 홍수가 나자, 사자[使]를 보내 수해를 당한 주와 군의 사람들을 위문하고, 1년 동안 조조(租調, 세금)을 면제했다.


가을 8월, 서울[京都]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밤과 같았다.
무진주도독 헌창(憲昌)을 불러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검모(黔牟) 대사(大舍)의 아내가 한 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3-3. 헌덕왕 8년(816) : 시중 김헌창의 청주도독 발령

(헌덕왕)  8년(서기 816년)
봄 정월, 시중(侍中) 헌창(憲昌)을 내보내 청주도독(菁州都督)으로 삼았고, 장여(璋如)를 시중으로 삼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절동(浙東, 중국 절강 동쪽)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한산주(漢山州) 당은현(唐恩縣)에서 길이 10척, 넓이 8척, 높이 3척5촌이 되는 돌이 저절로 100여 보 움직였다.


여름 6월, 망덕사(望德寺)의 두 탑[二塔]이 서로 싸웠다[戰].

 

3-4. 헌덕왕 13년(821) : 청주도독 김헌창의 웅천주도독 발령

(헌덕왕) 13년(서기 821년)
봄, 백성들이 굶주리자, 자손(子孫)을 팔아서까지 자신이 살려고 했다.


여름 4월, 시중 김충공(金忠恭)이 죽어서, 이찬 영공(永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청주도독 헌창(憲昌)을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으로 고쳐 삼았다.


가을 7월, 패강(浿江)과 남천(南川)의 두 돌이 서로 싸웠다[二石戰].


겨울 12월 29일, 큰 우레가 쳤다.

 

3-5. 헌덕왕 14년(822)/녹진 열전 : 김헌창의 난

김헌창의 난 당시 세력도를 나타낸 지도 (출처 : 아시아경제)

14년(서기 822년)
봄 정월, 왕의 친동생 수종(秀宗, 흥덕왕)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어오게 했다.[수종(宗)은 혹 수승(秀升)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5척이나 내려서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임금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역을 일으켜[反叛]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 세워[建元]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고, 무진(珍, 무진주), 완산(完山, 완산주), 청(菁, 청주), 사벌(伐, 사벌주) 4주(四州)의 도독(都督)과 국원(國原, 국원경), 서원경(西原, 서원경), 금관(金官, 금관경)의 사신(仕臣) 및 여러 군과 현의 수령(守令)들을 위협해 자기에게 속하게 했다.
청주도독(菁州都督) 향영(向榮)은 몸을 빼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漢山, 한산주), 우두(牛頭, 우두주), 삽량(歃良. 삽량주), 패강(浿江, 패강진), 북원(北原, 북원경) 등은 헌창(憲昌)의 역모를 미리 알고 병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 완산(完山, 완산주) 장사(長史) 최웅(崔雄)과 조(助, 주조) 아찬(阿飡)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쳐서[遁走] (이를) 알렸다. 임금은 즉시 최웅에게 급찬(級飡)  속함군태수(速含郡太守) 직위를, 영충에게는 급찬 직위를 주었다. 드디어 장수 8인[將八人]을 차원(差員, 맡겨 뽑음)해 왕도(王都) 8방을 지키게 했으며, 그런 후에 파병[出師]했다. 일길찬(一吉飡)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迊飡) 위공(衛恭)과 파진찬(波珍飡) 제릉(悌凌)이 뒤를 따랐으며, 이찬(伊飡) 균정(均貞)과 잡찬(迊飡) 웅원(雄元)과 대아찬(大阿飡) 우징(祐徵) 등이 삼군(三軍)을 통솔해 정벌에 나섰다. 각간(角干) 충공(忠恭)과 잡찬(迊飡) 윤응(允膺)은 문화관문(蚊火關門)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二郞]이 각각 종군을 청해, 명기는 여러 낭도들과 함께 황산(黃山)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나아갔다[赴]. 이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로(要路, 중요 도로)를 차지하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장웅이 적병을 도동현(道冬峴, 도동고개)에서 만나 공격해 패배시켰다.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연합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이기고, 속리산(俗離山)으로 진군해 적의 병사들을 쳐서 궤멸시켰으며,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과 싸워 궤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熊津)에 도착해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斬獲] 것은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은 겨우 몸을 피해 성으로 들어가 수비를 견고히 했는데, 모든 군사가 포위해 공격한 지 열흘[旬] 만에 성[城將]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죽었다. (그를) 따르는 사람[從者]이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그의 몸을 옛 무덤[古塚]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宗族]과 따르던 무리[黨與]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풀어주었다[縱].
후에 전공을 논해 관작[爵]과 상을 차등있게 주었다. 아찬
녹진(祿眞)에게는 대아찬의 직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은 적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더럽혀지지 않았으므로(不汙,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태수(菁州太守)의 청사(廳事)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異鳥]가 나타났었다. 그 키는 5척이었으며, 색이 검었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 하고, 부리[喙]의 길이는 1척 5촌이었으며, 눈은 사람같았고, 모이주머니[嗉]는 다섯 되[升] 그릇만 하였는데, 사흘[三日] 만에 죽으니, 헌창이 패망할 징조였다. 
각간(角干) 충공(忠恭)의 딸 정교(貞嬌)를 태자비(太子妃)로 삼았다.
패강(浿江)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顚木]에서 싹이 돋았는데[生蘖], 하룻밤에 높이가 13척, 둘레가 4척 7촌이었다.


여름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가을 7월 12일, 해에 흑훈(黑暈, 검은 햇무리)가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겨울 12월, 주필(柱弼)을 당(唐)에 보내 조공했다.

음력 822년 3월 김헌창의 난이 일어납니다. 원인은 무열왕계였던 진골 귀족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위에 앉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죠.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난은 처음엔 신라 전체를 잡아먹을 듯 했으나 곧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후에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했는데, 녹진(祿眞)이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임금이 대아찬(大阿飡) 작위를 수여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삼국사기><열전><녹진전> 마지막에는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의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반역을 일으켜, (...) 아찬 녹진(祿眞)에게는 대아찬의 직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라는 내용에 대해 다시 한 번 적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이니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3-6. 헌덕왕 17년(825) :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의 난

(헌덕왕) 17년(서기 825년)
봄 정월, 헌창(憲昌)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여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했는데, 도독(都督) 총명(聰明)이 병사를 거느리고 (싸워) 그를 잡아 죽였다.[평양(壤)은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고려) 태조()가 지은 <장의사(莊義寺) 재문(齋文)>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의 명산[]'이라는 구절이 있다.]


3월, 무진주(武珍州) 마미지현(馬彌知縣)에 사는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四臂]. 출산할 때 하늘에서 큰 우레가 쳤다.



여름 5월, 왕자 김흔(金昕)을 당(唐)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앞에 와 있는 대학생(大學生) 최이정(崔利貞), 김숙정(金叔貞), 박계업(朴季業) 등을 번(蕃, 번국)으로 돌려보내 주시고, 그 새로 조정에 다다른 김윤부(金允夫), 김입지(金立之), 박양지(朴亮之) 등 열두 명을 숙위(宿衛)할 수 있게 해주시고, 또 국자감(國子監)에 배치하여 공부를 배워 익히도록[習業]하고, 홍려시(鴻臚寺)에서 (그들에게) 물자와 양식[資粮]을 공급하여 주십시오."라 아뢰었다.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 삽량주(歃良州)에서 흰 까마귀[白烏]를 바쳤다.
우두주(牛頭州) 대양관군(大楊管郡)에 사는 황지(黃知) 나마(奈麻)의 아내가 한 번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기에, 벼 1백 섬을 하사했다.

그러나 3년 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또 도적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금방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 총명에 의해 진압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헌덕왕대의 김헌창의 난 그리고 그 아들 김범문의 난은 총 3년만에 끝납니다. 이 짧은 3년 동안 신라 전역이 들썩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무열왕계는 더 이상 왕권다툼에 참가할 수 없고 좌천되었죠. 한편, 이 사건을 보고 있던 다른 지역의 호족 세력들은 지방할거를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였고, 원성왕계 내부에서 왕위계승쟁탈전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3-7. 헌덕왕 18년(826) : 헌덕왕의 사망

(헌덕왕) 18년(서기 826년)
가을 7월, 우잠태수(牛岑太守) 백영(白永)에게 명해 한산(漢山)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사람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浿江)에 장성(長城) 3백 리를 쌓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헌덕(憲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옛 기록[記]에는 '(왕위에) 오른 지 18년 보력(寶曆) 2년(서기 826년) 병오 4월에 죽었다.'라고 하고, <신당서(新唐書)>에는 '장경(長慶) 보력(曆) 연간에 신라왕[王] 언승(昇)이 죽었다.'라고 했다. 그리고 <자치통감(資理通鑑)>과 <구당서(舊唐書)>에는 모두 '태화(太和, 대화) 5년(서기 831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이 (기사들이) 잘못된 것일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