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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본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카페 오른편에 작은 비석 2기가 있습니다.
'오륜동(五倫洞) 흥학계(興鶴契) 영세불망지비(永世不忘之碑)'라고 적혀 있습니다.
오륜동(五倫洞) 흥학계(興鶴契) 영세불망지비(永世不忘之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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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첩산봉비곡(四圍疊山鳳飛谷) 장강저수백구유(長江貯水白鷗遊) 봉황산하천연암(鳳凰山下天然巖) 천추기념석림정(千秋記念石林亭) |
사방 둘러싼 첩첩 산에 봉황은 계곡으로 날아들고 긴 강 산중호수에는 백로가 노니네. 봉황산(鳳凰山) 아래 천연암 위엔 오랜 세월을 기념하는 석림정(石林亭)이 있도다. |
해당 비문의 7언시 해석은 '주영택, 『그 금석문에 새긴, 금정 이야기』, 부산광역시 금정구 문화홍보과, 2016, 69쪽'을 인용했습니다. 이 비석은 서기 1971년 신해 3월 3일에 김종준(金鐘準)이 찬(撰)하고, 문성하(文成夏)가 글(書)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경진(文慶鎭)과 안응찬(安應燦)이 후원했다고 하네요.
비 정면 기준 왼쪽면 | 비 정면 기준 오른쪽면 |
푸른 물결 잔잔한 호수 맑게 흐르는 그 물에 몸체를 담고 동쪽 하늘 높이 아홉 봉우리 자랑하듯 솟아있는 구곡산(九曲山) 남쪽 전편에는 늠늠한 구월산(九月山)의 웅자(雄姿) 북녘엔 호반(湖畔)의 절경(絶景) 봉황산(鳳凰山)이 우뚝 솟아 병풍(屛風)을 이루는듯 아담하고 평화로운 고장 우리 오륜대(五倫臺) 다시 한번 불러보는 정어린 그 이름 오륜대 삼강오륜 서로들 명심코 상부상조 인화단결(人和團結)로 우리들의 흥학계(興鶴契)를 천추만세에 길이 빛나게 하리 | 서기 1971년 신해 3월 3일 김종준(金鐘準) 찬(撰) 문성하(文成夏) 글(書) 후원 문경진(文慶鎭), 안응찬(安應燦) 계원일동(契員一同) |
부산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가 쓴 <회동이야기>에 따르면 1971년에는 일제강점기(1920년대) 때 마을 발전을 위해 조직된 흥학계(興鶴契)를 기리기 위한 '오륜동흥학계영세불망비'를 오륜 본동마을에 세웠다고 합니다. 부산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는 그 비에 새겨진 7언시에서 마을에 대한 마을주민들의 자부심을 볼 수 있다고 평가했죠.
서기 1982년 임술 2월 일 박기덕(朴基德) 아들 진국(鎭國) 이충장(李充章) 아들 동환(東煥) 문성하(文成夏) 아들 영호(永聕) 문경진(文慶鎭) 아들 채홍(彩洪) 이진선(李鎭琁) 아들 성태(成太) 김동수(金東守) 아들 성하(聖夏) 김용찬(金龍讃) 아들 영진(永振) 이병문(李柄文) 아들 원수(源守) 문두환(文斗煥) 아들 태진(泰鎭) 문성만(文成萬) 아들 영배(永培) 김종술(金宗述) 아들 성칠(星七) 후원 최성운(崔成運) |
그 오른편엔 1982년 1971년 당시 오륜동 흥학계 영세불망비를 세울 때 돕거나, 그 흥학계에 있었던 사람들의 아들들이 다시 한 번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특히 문성하(文成夏), 문경진(文慶鎭)은 영세불망비의 글을 쓰거나 후원을 했던 사람으로 비석에 적혀 있는 인물입니다.
이 오륜동 흥학계에 대해선 더 자세한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만,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한 마을을 발전과 행복을 위해 노력했던 마을 사람들의 피와 땀을 돌아볼 수 있는 작은 흔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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