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로 들어온 남평 문씨 의안공파의 후예들과 조상들을 기리는 동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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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로 들어온 남평 문씨 의안공파의 후예들과 조상들을 기리는 동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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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팔송로 59번길 66'엔 남평 문씨(南平文氏) 의안공파(毅安公派) 동래종중(東萊宗中)의 재실인 동성재(東成齋)가 있습니다. 정문 영모문(永慕門)이 보이구요. 그 문의 왼편엔 '동성재 관리위원회(東成齋管理委員會)'라는 현판이, 오른편엔 '남평 문씨 의안공파 동래 종중회(南平文氏毅安公派東萊宗中會)'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남평문씨대종회(m-oo-n.com/)의 기록에 따라 정리한 문다성을 시조로, 문익(文翼)을 중시조로 한 10대파의 분파까지의 부계도를 그려봤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다가 남평 문씨의 두 인물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충숙공 문극겸 영정 (출처 : http://www.m-oo-n.com/sajeok/26goganwon.htm)

우선, 충숙공(忠肅公) 문극겸(文克謙, 1122~1189)은 고려 말에, 용호군대장군, 중서시랑평장사, 태자소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왕을 지극히 섬기고 간언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충신이었습니다. 또한 무신 이의방의 동생 이린과 이거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어 이의방 형제들의 장인이었던 인물이면서 무신과 문신을 차별 없이 대해준 분이기도 했죠.
고려 의종은 문극겸의 충언을 듣지 않고 환관의 말만 들어 그를 내쫓아버립니다. 그 직후 무신정권(1170~1270)의 시작을 알린 무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만, 그는 문신이었지만, 무신에게도 아부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태도와 왕에게 간언 하던 일로 인해 살아남았고, 몇 명의 문신도 무신들을 설득해 살려주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한편 그의 딸 중 한 명이 이의방의 동생 이린에게 시집갔는데, 그 이린의 6대손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입니다. 어찌 보면, 현재 태조 이성계의 후예의 왕족들 대부분은 문극겸의 피가 섞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문익점 (출처 : 한국경제)

두 번째로, 문극겸의 자손들 중 충성공파의 파조(派祖, 한 파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이자 남평 문씨에서 분파한 단성 문씨(丹城文氏)의 시조로도 여겨지는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고려 말 목화 종자를 도입하고 재배해 전국에 보금한 학자이자 문신입니다. '목화씨'로 유명한 그분 맞습니다. 그가 목화씨를 고려로 반입하고 재배하면서 고려의 의복 문화가 크게 바뀌게 됩니다. 크게 신경 쓰고 있진 않았는데, 이 분이 '남평 문씨 충선공파의 파조'이자, '그의 다섯 아들 또한 각각의 파조가 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역사의 연결고리가 맞춰졌습니다.

문익점의 다섯 아들 중 셋째 문중실(文中實)은 의안공파의 파조입니다. 그의 막내아들 문평(文苹)은 문어동(文圄仝)과 문우원(文遇元)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종질(從姪)이자 스님이던 문가학(文可學)이 역심을 품고 백성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가 발각되어 잡힌 일이 생겼습니다. 이에 태종은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가학(可學, 문가학)을 미친놈(顚狂者)이라 여긴다. 천병(天兵), 신병(神兵)을 제가 불러오게 할 수 있다는데, 이 미친놈(狂者)의 말이 아니겠는가!"
予謂可學爲顚狂者。 天兵神兵, 吾能召致, 此非狂者之言乎!"

- 태종의 발언(<조선왕조실록><태종 6년(1406년)><11월 15일 신미 2번째 기사>)

그렇게 역모로 찍혀 죽게 되었고, 자연히 화를 피하려 했던 문평은 원래 살던 경상남도 단성을 떠나 두 아들과 가족을 데리고 사천으로 이사 갑니다. 이후 문평은 첫째 아들인 문어동(文圄仝)은 사천에 두고, 둘째 아들 문우원(文遇元)을 데리고 동래 초읍동로 이사 오게 되었죠. 그렇게 문평은 자연히 '남평 문씨 충선공파 의안공파 동래입향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문평-문우원'으로 이어지는 가계와 그의 후손들이 부산 지역 곳곳에 살았고, 이후, 1956년, 여러 남평 문씨 문중과 일가들의 성금으로 동래구 사직동에 동성재(東成齋)를 지어 조상을 기억하고 모이는 장소를 만듭니다. 이곳에는 동래 입향조 문평을 포함한 11위의 조상과 각 배우자들의 위패인 배위(配位) 11위의 총 22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향사일(享祀日, 제사일)은 음력 10월 3일이라고 합니다.

이후 도시 개발로 2009년 기존보다 작은 규모의 재실을 지금의 금정구 남산동 위치에 옮겨 세웠습니다. 그것이 지금 보고 있는 동성재입니다.

동성재 기(東成齋 記)
이곳은 남평 문씨(南平文氏) 동래 입향조이신 휘(諱) 평(苹) 선조를 모신 재실이다.
시조(始祖)는 고려 삼중대광보국 삼한 벽상공신(三重大匡補國三韓壁上功臣)이신
휘 다성(多省)이시고 시호(諡號)는 무성(武成)이시다.
중시조 휘 익(翼)은 직문하성사(直門下省事)와 서북지병마사(西北知兵馬使)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오르시고 풍산군(風山君)에 봉(封)해졌으며 시호는 경절(敬節)이시다.
조부(祖父)는 휘 익점(益漸)이신데 목화를 전래하여 추위에 떨던 백성들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하셨고 목면 수출로 국력을 향상시켜 나라에서는 강성군(江城君)에 봉하고
충선(忠宣)의 시호와 부조묘(不祧廟) 건립을 명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補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을 추서하며 부민후(富民侯)를 추봉(追封)하였다.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는 간의대부(諫議大夫) 참지문하시중(參知門下侍中) 휘 중실(中實)로 시호는
의안(毅安)이시다.

입향조는 중시조로부터 14세가 되시며 진주 단성에서 의안공의 4남으로 태어나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부(父), 조(祖, 할아버지)를 따라 강성으로 낙향하였다.
조선 초기인 서기 1400년에 가화(家禍)를 당하여 고향을 떠나 장남 휘 어동(圄仝)은
경남 사천에 머무시고 차남 휘 우원(遇元)은 동래에 은거하신 부친과 함께 후학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그 후로 후손들이 번성하여 7개 문중(성안, 사상, 초읍, 북면, 금사,
거벌, 반여) 2만 여명의 거대 종중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1956년 동래 입향조 기념사업 기성회를 조직하여 31세 북면문중 문진호(文鎭鎬)님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7개 문중과 일가들의 성금으로 부산시 동래구 사직동 391과 392번지
1,087평의 대지와 건물을 구입하고 중수하여 동성재라 이름 지었다.
31세 성안문중 문철환(文喆煥)님이 독담(獨擔)하여 영모단을 설단하시고,
32세 북면문중 문의순(文義淳)님은 철마면의 논 658평을 기증하시어 제사를 모셔 오던 중
도시개발로 인해 재실이 도로에 편입되어 금정구 남산동 980-13번지 238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36평의 재실과 20평의 관리사를 신축하여 2009년 9월 29일 준공을 하였다.

오늘이 있음은 오로지 조상님의 음덕 일진데, 일가들은 더욱더 우의를 돈독히 하며
가문의 영원한 번영과 화합을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 갈 것을 바라는 바이다.

2009년 10월 23일
남평문씨 동래종중회

재실의 왼편엔 위와 같은 남평 문씨 의안공파와 재실 동성재의 연혁이 적혀 있습니다.
 
해당 기록에서 조금 궁금한 점은 '1400년의 가화'입니다.
앞서 이 남평 문씨에게 화를 입힌 문가학(文可學)의 모반 사건은 <조선왕조실록>에선 태종 6년(1406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선 1400년 가화라고 말하고 있죠.
물론, 실록에 적힌 사건과 여기서 말하는 가화가 다를 수도 있는데요. 이 연도가 다른 가화가 서로 어떤 관계인지, 아님 한 사건을 잘못 적은 것인지에 대해선 추가로 조사를 해봐야 할 듯합니다.

원지도 출처 : 카카오맵

대략적인 지도는 이렇습니다. 정문 영모문으로 들어가서 계단을 오르면 22분을 모신 동성재가 나오며, 그 뒤엔 관리동이 있습니다. 관리동은 이 뒤로 돌아가 시종문을 통해서도 들어갈 수 있는 듯합니다.
 

뒤편으로 돌아오면 개인 가정집 겸 동성재 관리동으로 쓰이는 듯한 곳이 나옵니다. 이렇게 남평 문씨 의안공파의 사람들을 모시는 동성재를 찾아왔습니다. 항상 이런 재실을 방문하다 보면 조상들을 기억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의미 있는 행동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 글을 쓰면서 '문재인 전 대통령'도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낼까? 하는 단순한 궁금증이 생겼고, 그래서 아래 글(https://mspproject2023.tistory.com/1627)에서 그의 부계도를 정리해봤습니다. 아쉽게도, 그는 분파가 달라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러 오진 않는다고 합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어디 문씨일까? - 남평 문씨 부계도

우선 해당 글은 전혀 정치적 의도가 없고 문재인의 가계도가 어떠한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쓰기 시작했음을 미리 알립니다. 남평 문씨 재실 중 한 곳을 방문하면서 '현재 모든 '문씨는 남평 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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