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과 예퍼 영주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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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과 예퍼 영주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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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의 역사

18세기 후반의 안할트 공국 내 안할트페르프스트 공국의 위치. 사진 속 주황색 지역이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 (출처 : @Sir Iain)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Fürstentum Anhalt-Zerbst, Principality of Anhalt-Zerbst)현재의 독일 작센안할트주(Land Sachsen-Anhalt)에서 아스카니아가(Askanier)가 다스렸던 신성로마제국의 후국이었습니다.

 

이 후국은 1252년 안할트 공국의 하위 분할로 나타난 후국이었는데, 1396년 안할트데사우 후국(Fürstentum Anhalt-Dessau, 1396~1561, 1601~1863)과 안할트쾨덴 후국(Fürstentum Anhalt-Köthen, 1396~1562, 1603~1853)으로 다시 나뉘며 잠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1544년, 그 지역들을 합쳐 다시 세워졌으나, 1796년까지 안할트데사우 후국, 안할트괴텐 후국, 안할트베른부르크 후국(Fürstentum Anhalt-Bernburg, 1252~1468, 1603~1863)으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공국입니다.

안할트 백국
(1030~1212)
안할트 후국
(1212~1252)
체르프스트 후국
(1252~1396)
베른부르크 후국
(1252~1468)


아셔스레벤  후국
(1252~1315)
쾨덴
(1396~1562)

데사우 후국 -
데사우
(
1396~1561)
데사우 후국 체르프스트 후국 플뢰츠카우 후국
(1544~1553)
체르프스트 후국
(1544~1570)

안할트 후국
(1562~1603)
쾨덴
(1603~1806)
데사우
(1603~1807)

체르프스트 후국
(1603~1793)

플뢰츠카우 후국
(1603~1665)
베른부르크
(
1603~1803)
괴텐
(1806~1847)

베른부르크
(1803~1863)
데사우 공국
(1807~1863)
베른부르크 후국
안할트
(1863~~1918)

위 표에서 '체르프스트, 베른부르크, 아셔스레벤, 쾨덴, 데사우' 등은 다 적으면 표 내용이 잘 안보이기 때문에 모두 앞에 '안할트-'를 생략했습니다.

 

2.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의 역대 후작

이번엔 이렇게 복잡한 변천 역사를 가진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의 역대 후작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역대 안할트-헤르프스트 후국 지도자
대수 호칭 재위 기간
1 지그프리드 1세(Siegfried I) 1252~1298
2 알베르트 1세(Albert I) 1298~1316
3 알베르트 2세(Albert II) 1316~1362
(3대와 공동 재위) 알베르트 3세(Albert III) 1359
(3, 4대와 공동 재위) 발데마르 1세(Waldemar I) 1316~1368
4 요한 2세(Johann II) 1362~1382
(4대와 공동 재위) 발데마르 2세(Waldemar II) 1368~1371
(5대와 공동 재위) 발데마르 3세(Waldemar III) 1382~1391
5 지그문트 1세(Sigismund I) 1382~1396
5 알베르트 4세(Albert IV) 1382~1396
(이후 안할트-데사우 후국과 안할트-쾨덴 후국으로 분열)
1 요한 5세(Johann V) 1544~1551
2 카를 1세(Karl I) 1551~1561
(2대와 공동 재위) 베른하르트 7세(Bernhard VII) 1551~1570
(2대와 공동 재위) 요아임 에르네스트(Joachim Ernest)
1551~1570
(이후 안할트 후국으로 통합)
1 루돌프(Rudolph) 1603~1621
(2대 섭정) (안할트-플뢰츠카우의 아우구스트) (1621~1642)
2 요한 6세(Johann VI) 1621~1667
(3대 섭정)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의 조피 아우구스테) (1667~1674)
3 카를 빌헬름(Karl Wilhelm) 1667~1718
4 요한 아우구스트(Johann August) 1718~1742
5 요한 루드비히 2세(Johann Ludwig II) 1742~1746
(5대와 공동 재위)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Christian August) 1742~1747
(6대 섭정)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하나 엘리자베스) (1747~1752)
6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Friedrich August) 1747~1793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을 다스리던 아스카니아가(Askanier)는 그 가문이 18세기까지도 쭉 내려왔습니다.

그들을 '안할트체르프스트 후작'이라 불렀는데, 마지막 후작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가 1793년 사망하고, 1796년에 그 자리는 안할트데사우 후국, 안할트괴텐 후국, 안할트베른부르크 후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사라질 줄 알았던 그들의 피는 저 멀리 '러시아 제국'으로 나아가 그 명맥을 잇게 됩니다.

 

누가 어떻게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가 피를 이어받았는지를 알려드리기 전에 그 전에 안할트페르프스트 후국에서의 예퍼 영주에 대해 잠시 알아보죠.

 

3.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과 러시아 제국에서의 예퍼 영주

1500년경 예퍼의 위치 (출처 : <&nbsp; Allgemeiner Historischer Handatlas>)

예퍼 영주(Herrschaft Jever)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 중 1548년에 부르고뉴(부르군디) 지역에 속하게 된 독일 북부 바닷가 인근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입니다. 예퍼 영주가 다스리는 예퍼(Jever)라는 땅은 오래전부터 항구 도시로서 큰 역할을 했다가, 이후에는 무역 중개지로서 점차 큰 상업 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원래 다른 가문의 영지였지만, 시간이 지나 1667년, 이 땅은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의 요한 6세(Johann VI)가 되면서 이 후국의 영지가 됩니다.

역대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의 예퍼 영주
대수 호칭 재위 기간
1 요한 6세(Johann VI) 1667
2 카를 빌헬름(Karl Wilhelm) 1667~1718
3 요한 아우구스트(Johann August) 1718~1742
4 요한 루드비히 2세(Johann Ludwig II) 1742~1746
(4대와 공동 재위)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Christian August) 1742~1747
5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Friedrich August) 1747~1793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은 다른 후국으로 분할되며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럼 이 땅은 누구의 소유가 되었을까요? 바로 마지막 영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누나인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Sophie Auguste Fredericke)입니다. 그녀는 현재 다른 이름으로 유명한데요. 바로 그녀는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의 조그만한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의 공녀였던 것이죠!

역대 러시아 제의 예퍼 영주
대수 호칭 재위 기간
1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 II) 1793~1796
2 파벨 1세 페트로비치(Па́вел I Петро́вич) 1796~1801
3 알렉산드르 1세 파블로비치(Алекса́ндр I Павлович) 1801~1807
-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테 조피(Friederike Auguste Sophie) (1793~1807)

그런데 그 작은 후국에서 어떻게 그 거대한 러시아 제국의 황후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 그녀가 결혼하기까지의 인생 스토리를 살짝 들여다 봅시다.

 

4.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 황후가 되기까지

4-1. 예카테리나 2세의 탄생

현재의 슈체친 지역 (출처 : google map)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Sophie Auguste Fredericke)는 1729년 4월, 프러시아 왕국 포메라니아 주의 슈테틴(Stettin, 현재의 폴란드의 슈체친)의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1725년의 안할트체르프스트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출처 : http://album.foto.ru/photo/200752/)

그녀의 아버지는 이후에 자신의 형 요한 루드비히 2세와 공동으로 안할트체르프스트 후국을 다스리게 되는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인데, 그는 프로이센 슈테틴 지역의 연대장이자 사령관이었고, 이후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의 공작으로 출마했으나 떨어지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1746년경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하나 엘리자베스 (출처 : wikipedia)

그녀의 어머니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하나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삼촌에게 키워졌고, 15살이 되어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녀의 가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크리스티안 1세(Christian I, 1426~1481)가 나오는데, 그는 덴마크의 왕이자, 노르웨이의 왕이었고, 스웨덴의 왕이었으며, 홀슈타인-렌츠부르크 공작이면서, 슐레스비히의 공작이자, 홀슈타인의 공작이고, 올덴부르크의 백작이었을 뿐 아니라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몇 세기 동안 지배한 올덴부르크 왕조의 시조이기도 했죠. 그런 핏줄을 이어받은 여성이었습니다.

 

4-1. 예카테리나 2세의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 황태자와의 약혼까지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는 어려서부터 집에서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배웠고, 춤, 음악과 같은 예술도 익혔으며, 역사, 지리, 신학도 공부했습니다. 워낙 장난기 많고 호기심 많았던 소녀라, 슈테틴의 거리에서 소년들 앞에서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려고 칼을 휘두르는 연습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럭무럭 자라났죠.

표트르 1세부터 파벨1세까지의 표트르계 계보도

1743년 러시아 황후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는 그녀의 후계자인 대공 표트르 페도로비치(Пётр Фёдорович, 훗날 러시아 황제 표트르 3세)의 신부를 선택하는 동안 그녀의 어머니가 임종 당시 홀스타인 왕자의 아내가 되라고 유언했던 것을 기억해냅니다. 한 때 예카테리나 1세는 홀슈타인가와 인연이 있었고, 대공 표트르 페도로비치의 아버지 또한 홀슈타인가 출신이었습니다. 이렇게 홀슈타인가와 여러 대에 걸쳐 엮인 인연에서 비롯해 대공 표트르 페도로비치는 홀슈타인가의 요하나 엘리자베스의 첫째딸이었던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Sophie Auguste Fredericke)와 약혼하게 됩니다.

러시아 제국에 도착한 1744년에 그려진 조피의 초상 (출처 : Луи Каравак)

그렇게 조피는 15살쯤인 1744년 1월에 러시아 땅을 밟았고, 그곳에서 러시아어, 러시아 역사, 정교회, 러시아의 전통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조국이 될 이 러시아의 모든 것이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밤낮으로 어려운 러시아어를 공부했으며, 추운 날에도 그 공부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폐렴에 걸려 그의 어머니 요하나 엘리자베스는 놀라 루터교 목사를 데려오겠다고 했는데, 그녀는 러시아에 왔으니 러시아식으로 해야한다며 러시아 정교회의 대주교 시몬(Архиепископ Симон)을 불러줄 것을 요청했죠. 정말 러시아에 대한 애착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것을 느낄 수 있었던 대목이었습니다. 이 일로 궁정에서 그녀의 인기는 높아지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해 6월에는 정교회로 개종하고,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그 다음날 미래의 황제가 될 표트르 페도로비치와 약혼합니다.

1756년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그리고 그의 아들 표트르 3세 (출처 : http://collection.nationalmuseum.se/)

독일의 작은 후국의 공녀(公女)였던 조피 아우구스테 프리데리케는 자신의 어머니가 속해있던 홀슈타인가가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가와 맺었던 인연으로 러시아 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해야할 공부도 열심히 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인정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황후까지 되었죠. 글을 정리하면서 대단한 인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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