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전(성자전, Житие́)>이란?
러시아어로 즤찌예(Житие́), 그리스어로 비오스(βίος), 라틴어로 비타(vita)라고 불리는 성인의 삶과 업적을 다룬 교회 문학 장르가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단어 모두 '삶(생애)'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한국어로 <생애전>이라 부르구요. 또 그 문학적 특징 때문에 <성자전>이라고도 부릅니다. 국내에선 <성자전>이라는 번역을 많이 쓰고 있으나, 이 글에선 원래의 의미에 더 가까운 <생애전>이라고 쓰겠습니다.
보통 <생애전>은 그 성인이 죽고 나서 지어지는데요. 꼭 공식적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시성식이 끝나고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국내에서 유명한 <생애전>인 <아바쿰의 생애전> 또한 사제장 아바쿰이 직접 썼습니다.
이 <생애전>은 문학적 예법과 '카논(κανών)'이라 불리는 교회법과 같은 구조적인 제약이 있다는 특징이 있으며, 그렇기에 세속적인 전기나 일대기와 그 문학적 특징이 완전히 다릅니다. 세속적인 전기나 일대기에선 그 인물의 행위를 묘사하면서 시대, 장소를 적어두는 데에 반해, 대부분의 <생애전>에선 연도, 지명(마을명, 도시명)은 언급되지 않으며, 단순히 그 인물의 영적 업적이나 기적에 대한 이야기만 실려 있습니다.
2. 러시아 문학 속 <생애전(성자전, Житие́)>
2-1. 러시아 문학 속 <생애전>의 특징
<생애전>은 사실 초기 크리스트교에서 자주 볼 수 있던 문학 장르였습니다. 당연히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러시아 정교회 또한 이 장르가 유행했죠.
정교회를 받아들인 러시아의 고대 문학에선 몇몇 성인들의 전기가 짧게 쓰이면서 <생애전> 장르가 유행하기 시작했는데요. 러시아식 <생애전>은 메타프라스티스(Μεταφραστής, 900'~987)의 생애를 기린 그리스식 <생애전> 양식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 정교회를 통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러시아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이 형식은 성인의 초기 행보나 생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이 부분은 널리 알려진 여러 장소들을 덧붙이거나 미사여구를 보충해서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첫부분은 대부분 픽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생애전> 자체는 크리스트교적 교훈과 교화를 목표로도 하기 때문에, 성인의 여러 기적적인 이야기나 업적도 꼭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레퍼토리가 똑같아서 개성적이지 않았죠. '결국 기적이 일어났다!' 이런 느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니 말이에요.
2-2. 러시아 문학 속 여러 <생애전>들
15세기 이전의 초기 러시아의 <생애전>의 단순하고 규칙적이라는 보편적인 특성에서 예외도 존재했는데요.
바로 <원초연대기>를 썼던 네스토르 레토피세치(Не́стор Летопи́сец)가 1080년대에 쓴 <페오도시 페체르스키의 생애전(Житие Феодо́сия Пече́рского)>과 1110년대에 쓴 <보리스와 글렙에 대한 읽을거리(Чтение о Борисе и Глебе)>입니다. 이들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생애전>들로 평가되는 책들인데요. 이 책들은 성인의 삶을 적고 있긴 하지만,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내용을 넣어 독자들의 흥미를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그 외 12세기에 쓰였을 것이라 추정되는 <레온티 로스톱스키의 생애전(житие Леонтия Ростовского)>과 같이 12~13세기 서남쪽의 로스토프스카야 주(Росто́вская о́бласть) 지역에 등장한 <생애전>들도 단순한 이야기를 적어 내고 있죠. 내용이 그렇게 딱딱하거나 어렵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한편, 같은 시기 서북쪽의 스몰렌스크 주(Смоле́нская о́бласть) 지역에 등장한 <성인 아브라아미의 생애전(Житие святого Авраамия)>과 같은 <생애전>들은 비잔틴식 생애전이었는데요. 이들은 더욱 견고하게 이야기의 틀이 짜여 있었다고 하는 의견들이 많습니다.
고대 러시아어로 쓰인 <생애전> | |
출판일 불확실 | <아브라아미 로스톱스키의 생애전(Житие Авраамия Ростовского)>, <안토니 페체르스키의 생애전(Житие Анто́ния Пече́рского)> <보리스와 글레프에 대한 옛이야(Сказание о Борисе и Глебе)> |
11세기 | <블라디미르 공에 대한 기억과 찬사(Память и похвала князю Владимиру)> |
12세기 | <존귀한 유프로시니아 폴로츠카야의 생애전(Житие преподобной Евфросинии Полоцкой)> <우스펜스키 모음집(Успенский сборник)> |
13세기 |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Повесть о житии Александра Невского)> |
16세기 | <마카리 젤토보드스키와 운젠스키의 생애전(Житие Макария Желтоводского и Унженского)> |
1672 | <그가 직접 쓴 사제장 아바쿰의 생애전(Житие протопопа Аввакума, им сами́м напи́санное)> |
이후로도 다양한 <생애전>이 쓰여졌는데, 인간 중심의 문학을 열었던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에 들어서까지 쭉 쓰였습니다.
2-3. 아바쿰의 <생애전>
<아바쿰의 생애전> 혹은 <그가 직접 쓴 사제장 아바쿰의 생애전(Житие протопопа Аввакума, им сами́м напи́санное)>은 1672년에 편찬된 사제장 아바쿰 페트로프(Авва́кум Петро́в, 1620~1682)의 생애전 양식을 빌려온 자서전입니다.
<생애전> 장르는 종교적인 특성상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하게 하기 위해 교훈적이고 딱딱하며, 교회법 등에서 적용한 규칙이나 문학점 규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제장이었던 아바쿰 페트로프가 쓴 <생애전>은 규범적이지 않은 말투와 단순함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Занеже люблю свой русский природный язык, виршами философскими не обыкл речи красить.
러시아의 자연적인 언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철학적인 운문(ви́рши)으로 꾸미지 않았다.
- 아바쿰 페트로프
실제로 그는 자연스러운 말이 글로 나타나길 원했고, 그래서 그의 <생애전>은 기존의 장르에서의 성자는 엄근진하고, 주변 사람보단 신만 바라보며, 결국 죽음으로 하나님께 가게 된다는 그런 진부한 스토리가 아닌 신을 사랑하지만, 아내를 사랑하고, 주변을 둘러본다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등 종교적 내용이 들어간 '자서전'에 가깝게 변했습니다.
이 자서전격 생애전은 17세기 그가 사망한 이후 2세기 동안, 종교계에서만 읽혀졌으나, 1861년, 러시아 철학자이자 문학가 니콜라이 삽비치 티혼라보프(Никола́й Са́ввич Тихонра́вов, 1832~1893)가 우연히 발굴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인의 인쇄소에서 처음 인쇄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 책은 세간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죠. 19세기 후반의 당대 유명 문학가들도 이 책에 대해 호평을 펼쳤습니다.
아바쿰의 <생애전>은 다양하고 풍부하며 포괄적인 러시아 자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여기 모스크바의 살아있는 말(живая речь)이 있다. 그는 모든 작가들이 배워야 할 언어를 사용했다.
- 이반 투르게네프
(아바쿰은) 훌륭한 스타일리스트
- 레프 톨스토이
종교 권위자 위치에 있었으나, 언문일치를 몸소 실천해 기존의 딱딱한 문체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었던, 아바쿰.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기존 종교적 장르 중 하나였던 '생애전(성자전)'으로 러시아의 문학의 또 다른 문을 열었던 사람으로 오래동안 기억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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