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으나 왜적에게 무너진 기장 두모포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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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막기 위해 세웠으나 왜적에게 무너진 기장 두모포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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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두모포진성
<신증동국여지승람><기장현 관방조>에 "두모포진은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는데 부산포진의 종3품 수군첨사(水軍僉使)의 지휘를 받았고 병선 16척과 군사 843명을 두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호진(萬戶鎭)이었음에도 병선과 수군병력 수가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숫자였다.

기장 죽성리의 두모포진성은 고려시대 왜구의 방어를 위한 경상좌수영 관하의 수군 진성(鎭城)으로 병선의 정박과 물자 보급을 위하여 해안에 토성으로 축조하였다가, 1510년(중종 5)에 둘레 3만 7500㎡[1,250척], 높이 3m[10척] 규모의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죽성리왜성을 축성하면서 대부분의 석재를 이곳에서 운반하여 갔기 때문에 훼손되었고 복구되지 않은 채로 1629년(인조 7)에 성을 그대로 두고 영(營)을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으로 옮겼다. 이전하기 전까지 동남해안의 중요 국방요새로서 그 기능을 다하였다. 진의 이름은 그대로 두모포영(豆毛浦營)이라 불렀으므로 구별을 위하여 기장현의 두모포(豆毛浦)란 지명은 두호(豆湖)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한 때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려 시대에 이곳에 '두모포진(두모포진성)'을 흙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510년 1250척의 둘레, 10척의 높이로 석성으로 개축해 현재의 부산 지역의 해안 방어의 첨단 구역으로 철저히 방어되었으나, 결국 임진왜란 때 허물어지고 그 돌들은 일본군이 죽성리 왜성을 짓기 위해 들고 가며 흔적이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터는 지금까지 이어지죠...
 
앞서 안내판에 나왔겠지만, 이후 성 함락 이후 두모포영(豆毛浦營)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지금의 부산 동구 수정동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 '두모포왜관'과 같은 이름이 남아 있는 이유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죠. 

현재 카카오맵에서는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6번지'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안내판의 위치로 보면 두모포진성의 일부가 그 '죽성리 26번지' 아랫부분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답사를 가기 위해 지도를 켜는 경우, 죽성천 아랫길로 안내하기 때문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따라서 답사를 가시려는 분들은 저처럼 고생하지 마시고 '원죽1리마을회관'을 검색하고 가시길 바랍니다! 다만 저 지역 또한 두모포진성의 흔적이 있었을 수도 있으므로, 두모포진성의 범위에 대한 대략적인 연구가 진행된 뒤 카카오맵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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