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부산의 모든 역사 기록을 담다, 부산박물관
1. 부산박물관

부산 남구 대연동의 부산박물관입니다. 1977년 9월 30일에 부산시립박물관이 세워지고, 두 차례 이름이 바뀌어 1999년 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부산광역시립박물관으로 그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곳에서 부산의 모든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박물관 관람료는 특별전시를 제외하고는 무료입니다.

| 위치 |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63(부산 남구 대연동 948-1) |
| 영업시간 | 화-일 09:00-18:00 |
| 주차 | 가능 |
| 휠체어 | 사용 |
| 와이파이 | 있음 |
2. 부산박물관 동래관
2-1. 선사실


계단을 올라오면 제일 먼저 동래관 선사실이 보입니다. 부산은 역사적으로 동래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이 지역에 처음 등장한 구석기 문화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엔 부산과 한반도의 전체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는 연표를 볼 수 있습니다.



부산의 구석기유적 지금보다 훨씬 추웠고 일본 열도와 연결되어 있던 과거에 지금의 해운대구의 청사포(청사포유적), 좌동(좌동유적), 중동(중동유적) 지역에서 1만 7천 년 전의 후기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돌을 깨어 도구를 만들고 바다를 터전으로 생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죠. 또 여기서 출토된 석기 중 좀돌날과 몸돌을 통해 동아시아 후기 구석기 문화와 일본 규슈 지역과의 교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총 5개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진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패총 유적인 부산 영도구에 위치한 동삼동 패총의 모습입니다. 여기서는 토기와 석기, 뼈연장, 조개 등과 다양한 자연환경과 식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자연유물도 출토되었다네요.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를 통해 일본 규슈와 교류를 했다는 사실과 집자리에서 발견된 탄 조와 기장으로 어업뿐 아니라 잡곡농경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동삼동 패총 말고도 부산에는 영선동 패총, 범방동 패총, 금곡동 패총(금곡동 율리 패총) 등이 있으며, 가덕도에는 신석기 집단 무덤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 문화는 부산에도 있었습니다. 가덕도(장항 유적, 외양포 패총, 대항 패총), 강서구(세산 유적, 범방동 패총, 수가리 패총, 죽림 패총, 북정 패총), 사하구(다대포 패총, 다대동 봉화산 유적), 북구(율리 패총), 서구(암남동 패총), 영도구(영선동 패총, 청학동 패총, 동삼동 패총, 조도 패총) 그리고 남구(용호동 패총) 등 강이나 바다 주변에서 이 신석기 시대 패총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신석기시대에 주로 쓰였던 간석기들을 포함해서 당시 쓰였던 사냥 도구나 그 때 잡힌 동물들의 동물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가덕도(가덕도 두문지석묘), 강서구(미음동 분절유적, 북정 패총), 사하구(괴정동 패총, 괴정1동유적, 괴정2동유적, 감천동 지석묘), 북구(금곡동 율리 유적), 부산진구(연지동 유적), 동래구(사직동 유적, 온천동 유적, 온천2구역 유적, 수안동 231-2번지 유적, 명장동 665-17번지 유적), 연제구(거제동 유적), 수영구(동래고읍성지), 해운대구(반여동유적), 금정구(노포동 대룡 석관묘, 노포동 유적, 두구동 취락유적, 오륜동 유적, 회동동·석대동 유적), 기장군(기장 고촌유적, 기장 안평리 543-36번지 유적, 기장 청강리 유적, 기장 가동 유적, 기장 방곡리 유적, 기장 명레리 유적) 등 전 지역적으로 산간지역이 아닌 곳을 중심으로 청동기 시대 유적이 고루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때 농경의 비중이 높아졌으며, 희소성이 높은 청동기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통해 신분의 분화와 의례의 세분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동래읍성은 원래 망미동에 있었다! 동래고읍성
현재의 동래읍성은 처음부터 동래구 마안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말 왜구들의 습격으로 현재의 마안산 지역으로 읍성을 옮기기 전까지도 현재 수영구의 망미1동 행정복지센터와 부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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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쯤, 중국 대륙에서 철기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오며, 철기시대가 시작됩니다. 그렇게 국가급의 정치집단이 형성되는데, 한반도 북부에는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가, 남부에는 고조선의 유민을 받아들인 마한(54개 소국), 진한(12개 소국), 변한(12개 소국)으로 구성된 삼한이 형성됩니다. 그 중 변한의 독로국이 지금의 부산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죠. 이 시대에는 널무덤과 덧널무덤과 같은 무덤의 규모가 커지고, 철제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거나 철 자체를 화폐로 쓰기 시작하였죠. 특히 남부의 철은 한, 예, 왜, 낙랑, 대방까지 수출되었다고 하며, 그렇게 부산을 포함한 변한과 진한 지역은 철을 기반으로 가야 문화와 신라 문화가 꽃핍니다.


기원후 2세기 후반 복천동 유적과 노포동 유적 등에서는 무덤의 규모가 커진 덧널무덤이 만들어집니다. 그곳에서 같이 묻힌 다양한 당대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쉬웠던 노포동 고분군 방문 후기
전에 자전거를 타고 이쪽 부근을 지나면서 이 고분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때는 입구를 찾지 못해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간 꼭 가보겠다고 결심하고 몇년이 지난 후, 스포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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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고대·중세실



| 부산 내 삼국시대 유적 분포도 | |
| 강서구 | 지사동 유적, 미음동 분절 고분군, 구랑동 고분군, 생곡동 가달 고분군 |
| 사하구 | 괴정동 고분군 |
| 북구 | 화명동 고분군, 덕천동 고분군 |
| 부산진구 | 당감동 고분군 |
| 동래구 | 복천동 고분군, 낙민동 유적 |
| 연제구 | 연산동 고분군, 배산성지 |
| 해운대구 | 반여동 고분군, 좌동 고분군 |
| 금정구 | 오륜대 고분군, 두구동 취락 유적 |
| 기장군 | 기장 연구리 고분군, 기장 고촌 유적, 기장 가동 유적, 기장 산성, 기장 청강·대라리 유적, 기장 청강리 고분군, 기장 동백리 유적, 기장 명례리 고분군, 기장 반룡리 고분군 |
철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며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며 여러 소국은 주변 지역을 통폐합하며 영토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 한강 유역의 백제, 경주 분지의 신라가 그 대표적인 국가들이죠. 그러나 이 삼국만 있던건 아니었습니다. 낙동강 유역 변한의 여러 나라가 가야연맹으로 성장했죠. 그러다가 532년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부산 지역은 신라에 포함되었으며, 757년에 동래군(東萊郡)이라는 행정 명칭이 등장하며 이 지역은 '동래'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 시대에는 철갑옷, 철제 무기, 철제 마구와 도질토기 등이 등장합니다.

부산에서 삼국시대의 흔적을 잘 볼 수 있는 고분군 중 하나가 바로 배산 북쪽 구릉에 위치한 연산동 고분군입니다. 이곳은 동해에서 수영강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며, 동래 분지 내 지역민들이 어디서든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일렬로 지어졌습니다.
삼국 시대 부산의 대표적인 고분군, 연산동 고분군
연동시장 쪽에서 쭉 올라가다 안내판에 따라 좌측으로 꺾어서 더 올라가면, 이런 안내문이 나온다.사적 제 539호 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삼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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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제구 고분군 바로 남쪽 배산 정상의 두 봉우리와 칠부능선을 두르는 포곡식(包谷式,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계곡(谷) 일대를 돌아가며(包) 벽을 쌓는 방식) 산성인 배산성(盃山城)도 삼국시대 신라의 대표적인 성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죠. 6세기에 지어진 이 성은 탁월한 조망권을 바탕으로 당시 부산 지역의 관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발굴 조사에서 '거칠산군 산하 대판고촌(大板古村)의 곡물 등 입출(入出)을 을해년 2월에서 4월을 중심으로 한 분기에 점검을 했다'는 내용이 적힌 목간도 발견되어 눈길을 끕니다.
거칠산국과 신라의 흔적, 배산성지와 배산집수지
1. 정상 인근 배산성지 안내배산을 등산하다 보면 나지막한 성벽들이 보이는데요. 이 성벽이 바로 배산성 성벽입니다. 이 배산 전체가 배산성지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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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는 금, 은, 금동으로 만든 장신구가 유행했는데요. 부산 지역에서는 지배층을 상징하는 관과 귀걸이뿐만 아니라 형형색색의 유리옥을 엮은 목걸이가 많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방면에 걸쳐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합니다.
신문왕은 685년에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지방을 9주 5소경 117군 293현으로 개편하고, 군현에는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는 군현제를 시행했구요.
| 양주 | |
| 동래군 | |
| 기장현 | 동평현 |
경덕왕은 757년에 지방제도를 전면개편하는데, 이때 삽량주를 양주로,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갑화양곡현을 기장현으로, 대중현을 동평현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기장현과 동평현은 동래군 산하로, 동래군은 양주 산하로 포함시켰죠.



어쨌든 이 시대에는 불교문화가 크게 융성합니다. 그렇게 화장이 전국적으로 성행했고, 고분 형성도 점점 간소화되었죠. 또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사찰이 조성되었는데, 부산 지역에는 화엄십찰 중 하나인 금정산 범어사가, 기장 지역에는 불광산 장안사가 창건됩니다.
범어사 탐방
범어사의 시작은 바로 이 화행교(化行橋)가 아닐까 싶다. 화행(化行)은 불교에서 승려가 민가를 찾아다니면서 불법(佛法)을 설파하는 것을 말한다. 범어사 승려들은 이 다리를 지나 민가로 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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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 장안사 – 천 년 역사를 품은 기장 불광산의 사찰
기장 옛길(Gijang Old Road)1. 기장읍성2. 기장향교3. 장안사4. 안적사5. 기장군청6. 대변항7. 정관박물관8. 좌천역9. 일광해수욕장10. 송정시장11. 철마초등학교12. 안평역부산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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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산청군 지리산 폐사지에 있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대좌의 중대석(中臺石, 석등의 화사석을 받치는 가운데에 위치한 대석) 안에 안치한 것으로 전해지는 납석(蠟石)으로 만든 국보로 지정된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입니다. 766년에 불상의 대좌 중대석에 법사리(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인데, 신라의 비로자나불좌상이 8세기에도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물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과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청동기시대부터도 발견되는 우물 유적도 종종 보이는데요. 부산 지역에서는 수영구 망미동의 동래고읍성터와 기장군 고촌 유적 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물이 조사되었습니다. 이 우물에는 많은 당대에 쓰였던 물품들도 같이 발굴되었죠.
동래읍성은 원래 망미동에 있었다! 동래고읍성
현재의 동래읍성은 처음부터 동래구 마안산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말 왜구들의 습격으로 현재의 마안산 지역으로 읍성을 옮기기 전까지도 현재 수영구의 망미1동 행정복지센터와 부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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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지붕에 기와를 얹는 문화가 유행합니다. 동래구 낙민동 유적에서 수많은 막새와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삼국시대 이후 기와로 장식한 큰 건물이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918년, 고려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919년에 개경으로 천도했죠. 그렇게 되자 부산 지역은 지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변방에 위치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동래군은 격을 낮추어 동래현으로 바꾼 뒤 울주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울주 동래군 기장현은 울주군 직속으로 두었고, 동평현은 양주군 직속으로 둡니다.
| 고려시대 부산 지역의 행정 개편 | ||
| 울주군 | 양주군 | |
| 동래현 | 기장현 | 동평현 |
고려 인종 시대(1122-1146)에 동래현과 기장현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으로 승격됩니다. 이후에도 동래현과 기장현 지역은 고려 말 왜구의 출몰로 국방상의 요지로 주목받게 됩니다. 한편 동평현은 조선 태종 5년(1405년)에 동래현으로 귀속됩니다.


고려 중기가 지나면서 동래 정씨 가문을 중심으로 중앙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동래 지역의 호족들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그렇게 동래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며 동래 정씨의 세력도 강해져 갔습니다. 동래정씨 시조들을 모시는 화지공원에서 그 위세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 다양한 불교 유산들이 전해 내려옵니다. 부산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사찰로는 범어사, 장안사, '기비사'라는 명문이 발견된 만덕사가 있습니다. 한편, 부산 해운대 인근 호텔 정원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다포양식 목조건물을 모방한 사암으로 만든 석탑의 옥개석과 탑신입니다. 고려미술이 잘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죠.
범어사 탐방
범어사의 시작은 바로 이 화행교(化行橋)가 아닐까 싶다. 화행(化行)은 불교에서 승려가 민가를 찾아다니면서 불법(佛法)을 설파하는 것을 말한다. 범어사 승려들은 이 다리를 지나 민가로 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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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 장안사 – 천 년 역사를 품은 기장 불광산의 사찰
기장 옛길(Gijang Old Road)1. 기장읍성2. 기장향교3. 장안사4. 안적사5. 기장군청6. 대변항7. 정관박물관8. 좌천역9. 일광해수욕장10. 송정시장11. 철마초등학교12. 안평역부산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의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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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을 나가 부산관으로 가는 길목 앞에는 부산 만덕사지에 있었던 기와지붕 용마루 양 끝에 얹은 치미(鴟尾, 망새)도 볼 수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꽃무늬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치미가 이 정도였으면 만덕사는 얼마나 거대한 절이었고, 국가에서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3. 부산박물관 부산관
3-1. 조선실



이제 부산관으로 갑니다. 부산관이지만 시작은 '동래'로 시작합니다.
조선의 행정 체계는 8도 아래에 부, 대호부, 목, 도호부, 군, 현을 두었습니다.
| 행정구역 단위 | 행정관 직책 및 품계 |
|
| 8도 | 관찰사 | 종2품 |
| 부 | 부윤 | |
| 대도호부 | 대도호부사 | 정3품 |
| 목 | 목사 | |
| 도호부 | 도호부사 | 종3품 |
| 군 | 군수 | 종4품 |
| 현 | 현령 | 종5품 |
| 현감 | 종6품 | |
고려 시대 때 동래현이었던 행정구역은 동래도호부(1547-1592), 동래현(1592-1599), 동래부(1599-1895), 동래군(1895-1896), 동래부(1896-1903), 동래군(1903-1906), 동래부(1906-1910)의 순서로 행정구역 단위의 변동이 생겼습니다. 1910년 부군면 통폐합 이후 동래부라는 행정구역은 부산부로 바뀌게 됩니다.

동래부의 최고직책 동래부사는 동래부의 행정, 사법, 외교, 국방의 책임자입니다. 1546년(명종 1년)에 이윤암(李允巖)이 제1대 동래도호부사로 임명된 다음부터, 349년간 총 255명이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는데,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웠기 때문에 국왕의 신임이 두텁고 강명한 자들이 많이 임명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 된 고경명(재임 : 1590-1591), 임진왜란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한 송상현(재임 : 1591-1592), 임진왜란 후 회답겸쇄환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를 데리고 귀환한 오윤겸(재임 : 1609), 명나라 장수 이영춘을 찾아가 화전법(火戰法)을 배우고, 마태오 리치를 만나 세계지도를 만들고 정구(鄭逑, 1543-1620)를 초대해 유학 진흥을 도모했던 황여일(재임 : 1615-1618), 흉년으로 힘들었던 동래사람들을 돕는데 힘쓴 이원정(재임 : 1661-1662),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고구마를 국내로 처음 도입한 조엄(재임 : 1757-1758)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죠. 그 외에도 이안눌(재임 : 1608-1610), 정치화(재임 : 1635-1642), 민정중(재임 : 1658-1659), 이덕성(재임 : 1687-1689), 이형상(재임 : ?-?), 민백상(재임 : ?-?), 이이장(재임 : 1753), 강필리(재임 : 1764-1766), 이문원(재임 : 1780-1781), 오한원(1806-1809), 정현덕(1867-1874) 등이 유명하죠.


성리학을 국가지배이념으로 채택하고,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제를 운영한 조선은 그 관련 교육기관도 많이 세웠는데요. 나라가 운영하는 관학(官學)과 개인이 운영하는 사학(私學)으로 크게 구분됩니다.
| 관학(공립교육기관) | 성균관(成均館), 4부학당(四部學堂), 향교(鄕校) |
| 사학(사립교육기관) | 서원(書院), 서당(書堂) |
부산 지역의 조선 시대 대표적 교육기관에는 관학인 동래향교와 기장향교와 사학이자 사액서원이었던 안락서원과 1732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읍성을 쌓은 기념으로 세운 서당인 시술재(時述齋)가 운영되었습니다.
부산의 유학문화를 간직해온 동래향교
명륜교차로에서 동래로로 조금 더 올라오면 명륜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동래향교가 보인다.이 동래향교는 교육을 하던 강학공간과 의례를 하던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는데, 우선 반화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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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은 15세기 이후부터 주진(主鎭)-거진(巨鎭)-제진(諸鎭)으로 구분되는 진관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부산 지역의 경우, 육군은 울산경상좌병영 관할 경주진관에 속했으나, 1655년 독립된 진으로 승격해 양산군과 기장군까지 관할했습니다. 수군은 주진인 경상좌수영 관할 부산포진, 다대포진, 해운포진, 서평포진 등 여러 진을 거느렸죠.
이런 군사기지뿐 아니라 동래읍성, 금정산성, 좌수영성 등의 방어시설이나 병마나 역마를 조달하기 위한 절영도목장, 석포목장, 오해야목장도 있었으며, 군사적 위급 사항을 중앙에 알리기 위한 봉수제와 역원제도 운영되었습니다.

16세기 후반까지도 동북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며, 조공(朝貢)과 회사(回賜)로 대표되는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5-16세기 동안 네 차례의 사화를 겪고 붕당정치가 시작된 조선은 국론이 분열된 상황이었습니다. 명은 농민과 종실 구성원들의 반란과 북로남왜의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며, 을묘왜변과 영파의 난 이후 각각 조선과 명과의 무역이 폐지되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전국시대를 일본은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를 마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다 노부나가가 정권을 장악한 아즈치모모야마시대에 들어선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은 일본 내부의 세력 갈등을 풀기 위해 조선과 명을 쳐서 인도까지 점령하자면서 한반도 남부 동래를 침공합니다. 임진왜란의 서막이었죠..



부산진순절도와 2종류의 동래부순절도가 당시 부산 지역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보여줍니다.


당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조총, 청동소총통, 장창과 찰갑편 등의 무기도 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동래는 피해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전공자 포상, 순절자 현창(顯彰, 밝게 빛냄), 전란 기억 등의 사업을 전개했죠.
부산 지역에는 1605년 동래부사 윤훤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송상현과 관련자를 기리기 위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송공사((현)송공단)을 세워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제사를 했구요. 1608년에 동래부사 이안눌은 동래읍성 남문 밖 농주산에 전망제단을 세웠습니다. 1709년에는 부산진성에 만공단이 세워졌으며, 1652년에는 충렬사가 세워졌죠. 1731년에는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성 전투 당시 희생된 유해를 발굴해 삼성대 구릉에 여섯 무덤을 만들어 모셨는데, 그 무덤은 현재 금강공원 임진동래의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부산은 대표적인 임진왜란 추모도시로서 그 전통성과 지역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에 맞서 결사항전을 한 동래사람들을 기리는 송공단
동래시장의 북쪽에 송공단이 있다. 이 부근에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의 다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여기를 와봤다면 다른 곳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동래시장 뒤편에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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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동래경찰서 쪽에 있었던 농주산터와 임진왜란 순국자를 기리던 농주산 전망제단터
부산동래경찰서 남쪽 쌈지공원에 작은 표지석이 있습니다. 농주산터[弄珠山址]조선시대 남문 밖에 있던 야산(野山)터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가장 먼저 이 고장에서 순사(殉死)하신 분들을 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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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공원 안의 임진동래의총(+이사가버린 고려오층석탑)
1. 임진동래의총 금강공원 안내도다. 입구에서 쭉 올라가서 좌측으로 가면 케이블카를 탈 수 있고, 우측으로 가면 산책하며 여러 볼거리, 즐길거리를 마주할 수 있다.케이블카 타는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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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부터 시작된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던 사절단인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 중에 멈췄다가 일본 에도 막부가 들어서며 다시 국교가 재개되었고, 조선통신사도 다시 파견되었습니다.
일본사 - 에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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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일 공식 외교사절에는 한 번 파견 갈 때 총 400-500명이 참가했는데, 삼사(정사, 부사, 종사관)와 통역관, 제술관, 상관(한의사, 사자관, 서기, 화가, 군인), 차관(마상재, 선장, 연주자), 중관(기수, 시종, 하급통역관, 요리사, 나팔수), 하관(격군)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서계(공식 외교 문서)와 별폭(예단 품목)을 가지고 한양을 출발해 이곳 부산에 도착한 다음 쓰시마를 거쳐 에도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한 번 왕복하는데 6-12개월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재밌는 건 통신사 행렬이 통과하는 지역의 영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준비하고 도로를 정비하면서 접대 준비에 많은 비용을 썼고, 일본인들도 통신사 행렬을 보기 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다고 하네요.

그 출발지인 동래는 조선 후기부터 충주, 안동, 경주, 동래가 함께 분담했던 사행단 접대, 특산물과 예단 모집, 해신제 등 통신사 파견 준비를 다 맡게 되어 그 중요성이 커집니다. 실제로 상관급인 군인, 차관급인 선장, 중관급인 하급통역관, 하관급인 격군 등은 동래의 부산, 좌수영, 동래, 초량 등 지역 주민들로 뽑혔다고 하네요. 그렇게 모든 준비가 마치면 영가대에서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통신사가 바다를 건너기전 제사 지냈던 영가대 본터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254-8에 영가대 본터가 있습니다.골목을 지나 U턴하면 작은 공원 하나가 보입니다.여기가 바로 '영가대'가 있었던 곳입니다.철길 옆 방범벽에는 '영가대 본터'라는 이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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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차 조선통신사에서 정사 직책을 맡았던 홍계희가 부산에서 에도까지의 여정을 총 30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사로승구도권(槎路勝區圖卷, 뗏목길명승지그림책, 1748)>을 볼 수 있었고, 일본 규슈 아리타(有田)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도해선문긴접시(朝鮮人渡海船文長皿, 조선인이 배로 바다를 건너는 무늬가 새겨진 긴 접시)와 조선통신사행원 중 기수와 나팔수가 해뜨기 직전 후지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이 그려진 채색통신사문접시(彩色通信使文楪匙)도 볼 수 있었습니다.

쓰시마(對馬)-아이노시마(藍島, (현)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코쿠라키타구 아이노시마)-아카마세키(赤間關, (현)시모노세키)-가미노세키(上関)-가마가리(카마가리, 蒲刈)-우시마도(牛窓)-무로쓰(무로츠, 室津)-효고(兵庫)-오사카(大阪)-요도강(淀川)-교토(京都)-오미하치만(近江八幡)-나고야(名古屋)-시즈오카(静岡)-에도(江戸, 도쿄). 이렇게 일본을 거쳐 에도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조선인내조지기>, 이러한 행차기는 후기 제11차 조선통신사(1763)의 행렬 장면을 묘사한 <대전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죠.

통신사의 중요한 핵심인 <통신사서계>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위 통신사서계는 후기 제10차 조선통신사 당시인 1748년 5월 3일에 통신사 정사 홍계희가 쓰시마주에게 보낸 외교문서라고 합니다.

에도성 내에서 통신사 일행이 향응(響應)받는 모습을 묘사한 6곡 1척의 소병풍인 통신사병풍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전통적인 야마토에[大和絵] 양식으로 그린 작품으로 벽체와 천장을 제거하고 사선의 부감시점으로 묘사한 병풍도인데요. 일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에 위치한 후쿠겐지(福禪寺)에도 <에도성내응접도권(江戶城内應接圖卷)>에도 이 병풍과 같은 장면이 묘사되어 있어 같은 원본을 참고하여 만든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말 위에서 펼쳐지는 곡예인 마상재(馬上才)를 그린 <마상재도권(馬上才圖卷)>도 볼 수 있는데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펼쳐진 이 한반도의 마상재는 일본에도 알려져, 일본의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 파견 시 마상재꾼들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1636년부터 마상재꾼이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 참여하게 되었으며, 1655년과 1811년을 제외하고 에도성의 쇼군 앞에서 매회 마상재가 펼쳐졌다고 하네요. 이 그림은 마상립(말 위에서 서서 달리기), 쌍기마(두 마리 말 위에 서서 달리기), 마상도립(말 위에 거꾸로 서기), 등리장신(말안장 옆으로 몸을 굽혀 감추기) 등 다양한 마상재 기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동래를 묘사한 그림을 그렸던 변박(卞璞, ?-?)이 쓴 사처석교비를 본 다음 그 변박과 관련된 유산을 보게 됩니다. 우선 조선 후기 동래에 설치된 군관청에 소속된 구성원들을 직책별로 입속 순서에 따라 수록한 명부인 <별군관청선생안>(충렬사소장본)에서는 변박이 행수군관의 명단 중 22번째에 실려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렸던 <아집도(雅集圖)>, <묵매도(墨梅圖, 1764)>도 볼 수 있죠.
[부산] 이제는 부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화가 변박이 쓴 사처석교비
동래부사 이문원(李文源, 1740-1794)의 기부금과 동래부 유지들의 모금으로 동래부 남부 밖에 있던 네 곳의 나무다리를 1781년에 돌다리로 바꾼 것을 기념해 세운 사처석교비(四處石橋碑, 네 곳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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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파견된 통신사들은 조선과 일본 양국 문화가 교류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일본 문인들은 시를 잘 짓는 것을 교양으로 중시해 통신사 일행과 시문을 교환하며 문학 교류에 열의를 보였죠. 그래서 일본의 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가 성행합니다. 문학 외에도 역사, 풍속, 의약, 의복, 식생활 등에 다양한 분야에서의 지식과 정보도 교류되며 서로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었죠.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로만 교류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국교를 재개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 사절이 머물 공간이 필요해졌는데요. 이에 조선은 1601년 절영도((현)영도)에 임시 왜관을 설치했다가 1607년에 두모포에 1만 평 규모의 정식 왜관을 만들어 교류를 시작합니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 회복을 약속한 <기유약조(1609)>를 맺으며 한양의 동평관(東平館)도 폐지된 상황에서 1678년 초량에 동관과 서관으로 구분되는 10만 평 규모의 왜관을 새로 지어 1876년까지 유지했죠. 이 왜관을 중심으로 대일공무역과 대일사무역(대일개시무역)도 전개되었으며, 일본으로 쌀과 인삼이, 일본으로부터 구리, 납, 은, 물소뿔, 단목이 조선으로 들어왔죠.
부산진역 앞 윤흥신장군 동상에서 임진 영웅과 두모포왜관터 이야기를 듣다
부산 동구 초량동의 부산진역 1번출구로 나와 조금만 내려가면 '윤흥신장군 동상 쌈지공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부산일보에 따르면, 1981년, 동구 초량동 고관입구교차로에 7m 높이 석상으로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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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구도심의 영원한 공원, 용두산공원
용두산공원을 간 적이 있습니다~입구에서부터 에스컬레이터나 계단를 타고 올라가면 처음엔 미타선원이 보입니다.미타선원 부산의 중심이자 상징인 용두산공원의 초입에 위치한 미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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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역은 폐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왜관 거주 일본인들은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무역도 허가받은 조선상인이 왜관에 들어가 행했습니다. 왜관 담장 밖에 복병막(伏兵幕)을 설치해 일본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감시했으며, 왜관의 정문인 수문(守門)에는 동래부와 부산진의 장교, 역관, 문지기 등이 지키고 있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출입을 엄격히 단속했죠.


변박이 그린 <왜관도(1783)>를 통해 초량왜관의 전체적인 모습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산 구도심의 영원한 공원, 용두산공원
용두산공원을 간 적이 있습니다~입구에서부터 에스컬레이터나 계단를 타고 올라가면 처음엔 미타선원이 보입니다.미타선원 부산의 중심이자 상징인 용두산공원의 초입에 위치한 미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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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 | 수입 | |
| 대일공무역 | 목면(17세기까지), 쌀 | 구리, 납, 물소뿔, 단목 |
| 대일사무역&대일밀무역 | 중국산 비단, 중국산 비단실, 조선산 인삼 | 은 |
설명문에서도 알 수 있듯, 부산 지역은 대일 무역의 거점이었습니다. 다양한 방식의 무역을 통해 여러 종류의 물품을 수출하고 수입했죠.

<동래부사접왜사도>에는 조선 후기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어 당대의 행사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그림 중 그림면에 '조선(朝鮮)'이라고 나라 이름이 쓰인 경우 조선화가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제작한 것이거나 동래부 출신 화가가 일본에 수출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 그림 5점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당대의 기념물들을 살펴봅시다.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에 부산요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찻잔들과 입학다완(立鶴茶碗, 서있는 학을 그린 찻사발)과 일본 에도시대에 간행된 다도에 활용되었던 다양한 도자제품의 그림과 간단한 설명을 정리한 <고토기집람(古土器集覽)>도 볼 수 있고, 인삼대왕고은(人蔘代往古銀)이라고도 불리는 교호(享保, 1716-1735) 연간에 만들어진 정은인 교호정은(향보정은, 享保丁銀)과 조선에서 수출된 당시의 인삼도 볼 수 있습니다.ㅇ


후기 제7차 조선통신사 당시 윤지완과 대마도주와 왜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처리를 놓고 5개 조항에 달하는 조약을 체결한 뒤 그 내용을 돌에 새겨 초량왜관 앞에 세운 약조제찰비(約條製札碑, 약조 문서화한 비석)와 그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동래에 대한 이야기는 서서히 끝으로 가고 근대의 부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합니다.
[부산] 초량왜관에 세워졌던 조일무역에 대한 규칙들, 약조제찰비
후기 제7차 조선통신사 당시 윤지완과 대마도주와 왜관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처리를 놓고 5개 조항에 달하는 조약(계해약조)을 체결한 뒤 그 내용을 돌에 새겨 초량왜관 앞에 세운 약조제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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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근대실


서구 열강이 이룩한 세계의 구조는 '근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1876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일수호조규(1876)>이 맺어지고, 그렇게 차례차례 조선의 문이 세계에 개방됩니다. 외교관, 선교사, 상인, 기자, 여행자들 정말 다양한 꿈과 목적으로 조선을 찾은 많은 외국인들에 의해 작은 어촌이었던 부산 지역은 도시로 변화합니다.



부산, 원산, 인천의 강제 개항, 치외법권 인정 등 불평등 조약의 전형을 보이는 <조일수호조규(1876)>,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거주 지역 설정 등을 약속한 <조일수호조규부록(1876)>을 포함해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 1905)>에 항의해 의병을 일으켰다가 대마도에서 옥사한 면암선생의 시신이 부산으로 운구되어 오자 초량객주들이 설립한 초량학교 학생들이 그의 애국심을 애도하는 내용의 충혼가를 지어 부른 <면암선생충혼가(1906)>도 볼 수 있습니다.

개항과 근대의 물결 속에 부산의 전통적인 공간 구성에도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개항과 더불어 부산항은 근대의 문물이 유입되고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중심이자 제국주의 열강의 첫 도착지였습니다. 1877년에 맺어진 <부산구조계조약>으로 초량왜관이 있던 용두산 공원 일대에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 일본이 직접 관리하는 일본인 거류지)'가 만들어졌죠.
부산 구도심의 영원한 공원, 용두산공원
용두산공원을 간 적이 있습니다~입구에서부터 에스컬레이터나 계단를 타고 올라가면 처음엔 미타선원이 보입니다.미타선원 부산의 중심이자 상징인 용두산공원의 초입에 위치한 미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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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의 교두보였던 이 일본전관거류지에는 일제의 자치기구인 거류민단을 비롯해 각종 관청, 은행, 회사, 병원, 학교 등 근대적 시설들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일본전관거류지를 제외한 인근 초량 지역 또한 해관과 감리서, 그리고 열강들의 조계가 잇달아 설치됩니다. 이로써 부산 지역의 공간 구조는 오랜 중심지였던 동래부 읍내면과 새롭게 조성된 일본전관거류지, 그리고 개항과 함께 새롭게 재편된 초량 지역으로 분할확대됩니다.


1900년경 동래부와 부산부의 산수의 형상, 성곽 주변의 경물, 사원, 항만, 선박 등을 그린 지본담채(紙本淡彩, 맑은 채색으로 그린 종이 그림) 10폭 병풍인 <동래부산도병(東萊釜山圖屛, 동래·부산 그림 병풍)>입니다. 이미 동래부 읍내면이 부산 지역의 중심이었던 시절은 끝나갑니다.

일본전관거류지가 설치되고 일본인들의 거주가 늘면서 개항장 부산에서는 근대적 자유무역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무관세의 이점을 살려 적극적으로 일본 상품의 수입과 조선 상품의 일본 수출에 나섰으며, 조선 정부는 이러한 무분별한 수출입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식합니다. 그렇게 조선 정부는 두모진해관(1878.09.28.-1878.12.26.)과 부산해관(1883.11.03.-1907.12.16.)을 설치했죠. 1882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을 체결하고, 외국과의 통상이 더욱 본격화되었죠. 그래서 조선 정부는 넓은 의미의 지방 외교 관청을 세울 필요를 느껴, 1883년에 감리를 두고 이후 독립시킨 부산감리서(1890-1895, 1896-1906)를 두어 개항장의 일반 사무와 외국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등 노력을 하긴 했죠.

이곳에선 그와 관련된 <해은일록>, <민경호 이력 문서>, <통도일사>, <동래감리서리내왕간찰>, <동래감리서주사교지>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포산항견취도(浦山港見取圖, 1880')>, <대한제국 여권>, <동래상인 거래장부>, <홍보용 태극기 문양>, <부산영사관 제정규칙>, <부산이사청 법규집>, <부산거류민단요람>, <한국사진첩>, <조선풍속풍경사진첩>, 부산해관 직원 사진 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개항기 조선과 대한제국이 외국과 맺은 경제 및 무역 관련 조약 목록 | |
| 1876 | <조일수호조규(1876.02.)>, <조일수호조규부록(1876.08.)>, <조일무역규칙(1876.08.)> |
| 1882 | <조미수호통상조약(1882.05.)>, <조독수호통상조약(1882.06.)>,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1882.08.)> |
| 1883 | <조일통상장정(1883.07.)>, <조영수호통상조약(1883.10.)> |
| 1884 | <조이수호통상조약(1884.06.)>, <조로수호통상조약(1884.07.)> |
| 1886 | <조불수호통상조약(1886.04.)> |
| 1889. | <조일통어장정(1889.11.)> |
| 1892 | <조오수호통상조약(1892.06.)> |
| 1899 | <한청통상조약(1899.09.)> |
| 1901 | <한백수호통상조약(1901.03.)> |
| 1902 | <한정수호통상조약(1902.07.)> |
일본전관거류지 설치 이후 각국 조계가 외국과의 조약 체결과 함께 속속 부산항에 설치되었습니다. <조독수호통상조약(1882)>과 <조영수호통상조약(1883)>에 따라 영선현((현)중구 영주동) 일대에 독일 조계와 영국 조계가, 1884년에는 초량동 일대에 청국 조계가, 1892년에는 러시아 조계가 설치됩니다. <조영수호통상조약>에서 외국인의 100리 이내 통행 제한 조치가 해제되며 각국 조계의 서양인들은 자유롭게 부산과 인근 지역을 유람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선교사들은 서구 문화와 문물을 소개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구요. 그들이 일반 조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의료와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적 흔적을 남겼으며, 그들이 보고 느낀 부산의 모습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마주한 서구 근대화에 대한 시선도 그들의 눈 속에 담겼죠.



사보담 부부가 가지고 있던 태극기, 포켓성서연합멤버쉽카드(pocket testament league membership card), 부산선교활동증명서, <더어셈블리헤럴드(The Assembly Herald)>에 실린 조선 선교 기사도 볼 수 있구요.



사보담 목사의 명함, 한국소개 그림책, 여아용 색동저고리, 소아용 타래버선, 입체경, 부산항의 어선 사진, 부산항 사진 유리 원판, 부산항 해안가 전경 사진, 어을빈 제약주식회사 봉피, 어을빈 약품 선전 팜플렛 등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외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확장되면서 좋은 일만 있던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일제는 개항 직후 일본전관거류지를 발판 삼아 식민지 수탈을 위한 시설을 확대해 나갔고요. 값싼 일제 공산품 수입과 대일 미곡 수출, 조선인에 대한 토지 수탈 등을 통해 재력을 축적해 나갔습니다. 한편, 조선인들은 신교육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와 민족주의교육을 활성화하는 한편, 상업 조직을 만들고 은행을 설립하면서 일본의 경제 침략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합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항만매립공사, 시가지계획, 도로망 정비, 전철 개설 등을 통해 부산을 '식민지화'합니다.

1909년 10월, 부산 우암동에 일본으로 수출하는 소를 검역하는 수출우검역소(輸出牛檢疫所, 1909.10.-1910.)가 세워집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자국 내의 이동을 강조하며 이출우검역소(移出牛檢疫所, 1910-?)로 이름을 바꾸었죠. 전국에 6곳이나 있었던 이출우검역소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부산항의 이출우검역소였습니다. 이곳에 끌려온 소들은 전국 소의 70%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죠... 이곳에서 검역을 마친 소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주로 식용과 사역용으로 쓰였으며, 1930년 이후 전시체제로 돌입하며 더 많은 수의 소들이 수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1월에 부산의 초량역과 서울의 영등포역을 잇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그 해 9월에는 부산항(釜山港)과 일본의 시모노세키항[下關港]을 잇는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1905.09.-1945)이 취항합니다. 관부(關釜)라는 이름은 '시모노세키-부산'이란 뜻입니다. 이키마루[壹岐丸]를 처음으로 여러 종류의 연락선이 1945년까지 취항합니다.



경부선과 함께 대륙 침략과 물자 운송 수단으로 자리매김된 이 관부연락선에는 농촌에서 땅을 잃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 노동자나 유학생들, 대륙 침략을 위해 동원된 일본군과 조선인 징용자와 징병자들도 타게 됩니다.



바다도 매우고, 전차도 들이고, 용두산에는 신사도 세우고...그렇게 일본은 1914년 일본인 거류지역과 부산 지역을 묶어 부산부라고 부르고 나머지 부산 지역을 동래군으로 분화시킵니다. '근대화', '도시화'라는 이름의 식민지화를 진행합니다.
용두산 신사, 왜관 부근에 신사(神社)가 들어서다.
1. 용두산 신사의 연혁1678년 4월, 두모포왜관이 용두산이 있던 초량으로 이전하면서 용두산 주위로 5개의 신사(神社)가 만들어졌다. 이들 신사 중 가장 중심은 쓰시마 후츄번(対馬府中藩)의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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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이후 반일의식을 잠재우고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 술책으로 문화통치로 지배 방식을 바꿉니다. 그러다 1930년 이후 전시체제로 돌입하자 일본은 징병, 징용의 이름으로 강제 징발하거나 정신대로 동원했고, 각종 물자를 수탈합니다. 그러면서 황국신민화정책으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없애고, 친일파를 육성해 그들의 지배와 수탈에 이용했는데요.
그와 관련된 <토지조사사업 공로상금증서>, 미곡 자루, <동척10년사>,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조선의 미곡 통제 경과>, <육군 소년병 모집 포스터>, 일본군 모자, 완장(종군기자, 헌병), 기념품잔, <징용령서>, <대일본부인회원입회 권고문>, <결전생활 포스터>, 공출보국 식사발, <공동작업 공출 벽보>, 전시보국채권, 대일본제국정부저축권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조선인들은 이런 상황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1907년에는 초량 객주, 지역 유지, 부인회 등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 전후로 대동청년단(1909-?)과 조선국권회복단(1915-1919) 등의 다양한 조직이 결성되어 부산의 3.1운동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죠. 3.1운동 이후 부산의 독립운동은 기미육영회(1919-?), 부산예월회(1919-1921), 부산청년회(1920-?), 동래청년회(1922-1925)와 같은 문화운동과 각종사회단체들의 사회운동계열로 분화되었죠. 한편, 신간회(1927-1931), 근우회(1928-1931)의 부산 지부 창립은 부산의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이 더욱 광범위해지는 계기가 됩니다.그러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사상 통제가 강화되며 학생운동과 대중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됩니다.

1919년 3월, 3.1운동의 물결이 부산에 다다릅니다. 3월 11일 일신여학교 의거를 시작으로, 동래고보 장터의거(1919.03.13.), 동래범어사 학생의거(1919.03.18.1919.03.19.), 구포장터 의거(1919.03.29.), 기장읍 장터 의거(1919.04.05.)와 일광 의거(1919.04.05.), 좌천시장 의거(1919.04.08.), 명호시장 의거(1919.04.10.), 가덕진 의거(1919.04.11.)의 순서로 확산되었죠.


그 외에도 비밀결사운동(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 대붕회, 구세단, 조선청년독립당, 순국당), 국채보상운동도 진행되었으며, 개성학교(1895-1909, (현)봉래초등학교, 개성중학교, 개성고등학교), 일신여학교(1895, (현)동래여자중학교, 동래여자고등학교), 명정학교(1906-1919, (현)청룡초등학교, 금정중학교), 동명학교(1907-1915, (현) 동래중학교, 동래고등학교) 등 많은 학교가 세워지며 민족 각성과 단결을 위한 민족교육도 확립됩니다.

그리고 부산 부두 총파업(1921), 가락 하자마 농장 소작 쟁의(1929-1932), 노다이 사건이라고도 부르는 부산항일학생의거(1940)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부산의 조선인들은 일제에 항거를 합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부산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항거들도 소개합니다.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를 포함해 <대한독립선언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일제의 감시망 아래에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부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다섯 분을 소개하는 자리에 도착합니다.
교육과 산업으로 민족 자강을 꾀하면서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한 안희제(1885-1943), 부산경찰서폭탄투척의거를 감행한 박재혁(1895-1921), 여성운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하며 항일운동을 감행한 박차정(1910-1944), 언론과 정치, 사상운동을 통해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한 김약수(1899-1964), 음악과 예술을 통해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 광복군에도 참가했던 한형석(1910-1996). 모두 부산 경남 출신으로 부산을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치신 분들입니다.

1915년 전차가 개통되며 한나절이나 걸렸던 부산과 동래 간 거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전차를 타고 부산 시내로 놀러 갔던 조선인들을 각종 서양식 의류, 한 홉의 석유로도 며칠 밤을 밝히는 등잔, 불을 켜는 자기황(自起磺)이라고 불렸던 성냥, 만병통치약으로 애용된 어을빈약, 얼굴도 안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전화기 등 그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한 물건들이 맞이합니다. 그렇게 짧은 궐련을 물고, 다방에 앉아, 유성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엔카(演歌, 일본적 애수를 띈 곡)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풍경이 점차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신분에 대한 차별도 전차를 이용하면서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고, 하늘과 사람을 기준으로 한 시간과 속도에 대한 관념도 자동 기계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선인은 근대인이 되어갑니다.

이곳에서는 술병, 술독, 월섬워치(waltham watch)의 시계와 광고지, 이발도구, 카메라, <부산오산사진기점상보>, 담배 간판, 경성 라디오 세트, 영사기, 성냥갑, 세창양행 담배감, 성냥 라벨 광고지, 석유 등잔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갈아 말려 종이에 붙인다고 오인받았던 사진, 사람의 혼을 빼앗아간다는 마술상자라고 생각된 사진기도 점차 조선인들에게 익숙해졌죠.

조선최초의 주식회사 첵제의 영화제작사 조선키네마주식회사(1924.07.11.-1925)가 1924년 7월에 부산부 본정5정목19((현)부산 중구 대청동 1가 중구청사 아래)에 위치했고, 복병산 일대의 옛 러시아영사관 2층 건물을 사옥 겸 촬영소로 사용했습니다. <해의 비곡>, 나운규의 데뷔 작품인 <운영전(총희의 연)> 등을 제작상영했습니다. 이 회사는 곧 망했지만, 영화인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한국 영화 산업이 시작되었으며, 부산의 한국 영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중요한 의의를 가지죠.


극광영화사에서 제작한 안철영 감독이 연출을 맡은 한국영화인 <어화(漁火, 1939)>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선 박학, 나웅, 박정경, 윤비양 등의 배우가 출연했는데요. 어촌을 떠나 서울로 상경해 풍파를 겪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2-3. 현대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한민족은 곧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만전을 기합니다. 이때 건국준비위원회가 들어섰으나, 미국과 소련의 논의를 통해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최대 3년간 군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평등과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좌익과 개인 재산권과 시장 경제를 중시하는 우익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렇게 1946년 북조선림시위원회(1946-1947)의 설립과 1948년의 5.10총선거로 남과 북은 각각 정부를 세워 분단됩니다.
건준이 걸어온 길, 조선인민공화국의 건설과 폐망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건준)는 나라를 세우지 못했나요?' 한 중학생이 내게 쪽지를 보내왔고, 그에 대한 답변을 정리해서 기록한다. 1. 건준의 성립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 혹은 건준. '조선'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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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반대전단(1946), <미소대립과 국제위기(1947)>, 조선건국준비위원회출입허가증(1946)와 같은 정치와 관련된 문서들도 전시되어 있고, <대한민국 헌법(1948)>, <우리말도로찾기(1948)>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북한은 암호명 '폭풍'이라는 이름으로 기습남침을 개시합니다. 그렇게 3일 만에 서울은 점령당했으며, 7월 20일 대전과 전주 점령에 이어, 7월 23일 광주, 7월 26일부터 27일까지 여수를 점령하며 남한 일대를 장악해 갑니다.

당시 전쟁을 전했던 런던뉴스(1950)와 미국 사진작가 호레이스 브리스톨(Horace Bristol, 1908-1997)의 작품이 담긴 <한국화보>도 볼 수 있습니다.



남한으로 귀순을 허가하는 <귀순허가증>, 1952년 11월 10일에 발간된 전쟁의 진행상황을 묘사한 <주간화보>, 1950년 8월 17일에 찍힌 낙동강 전선의 M24 탱크와 함께 찍힌 미군 사진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역 광장과 영도다리 그리고 40계단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원래 1950년 8월 24일에 <피란민구호대책요강>을 통해 부산 지역에 피란민을 위한 약 30만 명 수준의 공간을 지었으나, 1951년 1.4 후퇴로 피란민은 60만 명을 웃돌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은 영도다리 아래에서 점을 보거나, 달러를 몰래 거래하거나, 구호물품을 매매하거나, 판잣집을 지어서 살았다고 합니다.


1950년 8월 18일부터 1953년 8월 15일까지 서울 수복 기간을 제외한 1023일 동안 부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가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주요 정부기관과 교육기관, 상업금융기관, 국방의료기관, 문화언론기관 등이 부산으로 내려왔죠.

한국전쟁 이후 부산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정부 기관들의 서울 환도와 취약한 인프라 상황과 함께 일시적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전쟁 직후라 힘든 중앙정부에게 도움 받기 힘든 상황에서 부산은 자체적으로 도시 정비를 시작합니다. 다행히 전쟁으로 인한 산업 시설의 피해가 다른 곳보다 적었으며, 원조 물자가 들어오는 곳이었기에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부산은 제조업의 성장과 함께 점점 더 빠르게 재건되어 갑니다. 특히 원조 원료(밀가루, 설탕, 면직물)를 바탕으로 한 삼백산업이 두각을 나타냈으며, 목재, 화학, 조선 산업 등이 동반 성장하여 한국 경제의 토대를 구축해 갑니다.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수출 주도의 경제정책이 본격화되며, 부산은 경공업 수출산업의 최적지가 됩니다. 이 때 한국수출의 주도 품목인 신발, 섬유, 합판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부산의 전통적인 산업 분야였습니다. 또 수입원자재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라는 특징도 유리한 조건이 되어 1970년대까지 부산의 공업은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중화학육성정책으로 중앙정부의 산업구조조정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부산은 점차 하향세로 접어듭니다.



산업이 성장하던 그 시절, 부산화력발전소(1964-)도 지어졌고, 대한도기주식회사(1950-1972)의 고급재떨이나 도자제품들도 판매되었으며, 보생, 대양고무, 국제상사, 삼화고무 등 다양한 부산향토기업에서 만든 신발들도 판매되었죠.

이런 성장세에 맞춰 부산시는 1963년 1월 1일 부산직할시로 전국 최초로 승격됩니다.이는 갓 출범한 군사정부의 입장에서도 경제 개발 및 수출 위주의 정책을 도모하기 위했던 것도 작용했죠. 그렇게 부산은 30여 년 동안 행정구역이 약 1.5배 늘었고, 인구 또한 약 3배나 증가합니다. 그러나 부산직할시 시절의 성장은 경제와 토건에 집중되어 경제 평등과 부의 재분배, 도시 환경 및 재생 분야에서는 소홀했죠.



부산은 정치적으로도 민주화의 움직임이 거셌던 곳이기도 합니다. 4.19혁명(1960.04.), 부마민주학생(1979.10.), 6월민주항쟁(1987.06.) 모두 부산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죠.

그 중 흥미로운 부분은 1978년 4월 11일 보수동 책방골목에 1000원의 출자금을 내면 누구나 조합원이 되어 책을 빌려 볼 수 있는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1978.04.11.-1979.11.19.)입니다. 여기서는 부산의 진보적인 시민들과 학생들이 모여 어학연구, 지역사회개발, 학술연구, 강연회를 진행했는데, 다양한 사상의 책들을 공부하다보니 정부 당국의 감시가 심해지고, 부마민주항쟁의 배후로 지목되며 조합은 1979년 11월에 강제 해산됩니다. 해산 후에도 전 조직원들에게 부림사건(釜林事件, 부산학림사건, 1981) 등으로 탄압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조합은 후에 2015년 9월 15일 북카페로서 부산양서협동조합으로 부활했으나, 달라진 독서문화와 코로나19 등으로 2023년 8월 28일에 해산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동래와 부산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내려갑니다. 이곳에서는 2025년 지금 한국 다큐 사진 1세대 대표 사진작가 최민식(1928-2013)의 사진전 <부산 그리고, 부산의 얼굴들>이 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대가인 그의 시선으로 본 부산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