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있어 엄마와 초량동에 갔다가, '니 이거 진짜 오래된 건축물인거 아나? 나보다 더 됐디'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그럼 들어가봐요!'라고 응했다. 그리고 이 구 백제병원에 발을 내딛었다. |
1. 최용해, 백제병원을 개업하다.
오카야마의학전문대학(岡山醫學專門大學)을 졸업한 의사 최용해(崔鏞海)는 1922년, 현재 (구)백제병원이 있는 자리에 개인종합병원인 백제병원을 개업했다.
당시 백제병원은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부산 3대 병원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독일인 의사와 일본인 의사도 있었으며, 간호사도 30명 정도 있었고, 병상도 40개가 넘을 정도 당시 부산에서는 매우 큰 개인 종합 병원이었다.
최용해는 남일에 관심도 많고 사교성은 좋은데 일을 잘 벌리는 타입이었다. 이런 호사가적인 타입이 나쁘다곤 할 순 없지만, 일에 잘못 얽히면 크게 힘들어지는 게 부지기수다. 어느날, 그는부산경찰서 간부에게 한 연락을 받게 되었다.
여기 떠돌아다니다가 병이 난 사람이 한 분(행려병자) 계시는데 어떻게 치료 가능하겠습니까?
- 당시 부산경찰서 간부
이 제안을 최용해는 수락했고, 그 환자를 정성스럽게 돌봤지만, 결국 그 행려병자(떠돌아다니다가 병이 든 사람)는 사망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큰 실수 아닌 실수를 했다. 바로 그 무연고자의 시신을 해골표본으로 만들어 5층 병실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
저 백제병원에선 사람 가죽과 살을 벗긴 해골을 보관하고 있대!!
그 해골이 사실 백제병원에서 죽은 사람이라던데??
- 당시 백제병원과 관련한 소문들
그 사실이 소문에 소문을 타서 여론으로 들끓자 백제병원에는 손님이 뚝 끊어졌고, 경찰 심문까지 받게 되었다.
당시 의사들은 경험적 지식을 쌓기 위해 사형수의 몸을 주로 썼는데, 사회가 성장하고 인권의식이 높아지며 사형수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묘지에서 시신을 도굴하거나, 행려병자나 무연고자의 시신으로 해부 실습을 했다. 이러한 당시 사회적 상황에 따라 이미 1910년에는 경성부사(현 서울시장)이 행려병자의 시신을 해부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는 당시 경성부에 한정했을 뿐, 부산은 아직 아니었다. 즉, 당시의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을지라도, 그 사회에 있었던 사람들의 민심을 달라 병원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결국 1932년, 최용해는 일본인 부인 오오이소(大磯)와 같이 밤에 일본으로 몰래 도망간 뒤 영영 조선땅에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2. 병원에서 중국집, 장교 숙소, 치안사령부 사무실, 대사관, 예식장, 카페로
소유주 | 건물명 | 용도 | 소유기간 |
최용해 | 백제병원 | 병원 | 1922~1932 |
동양척식주식회사 | 1932~1933 | ||
양모민(楊牟民) (국적 : 중국인) | 봉래각 | 중화요리점 | 1933~1942 |
아카츠키부대(暁 部隊) | 장교 숙소 | 1942~1945 | |
부산치안사령부 | 부산치안사령부 | 사무실 | 1945 |
중화민국 대사관 | 중화민국 대사관 | 임시 사무소 | 1950~1953 |
동화백화점 (현 신세계백화점) |
부산 동화예식장 (->부산 신세계예식장) |
예식장 | 1953~1972 |
(구)백제병원 | 일반 상가 | 1972~ |
최용해가 그의 부인과 함께 야반도주하자 채권자인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중국인 양모민(楊牟民)에게 그 5층 건물을 공매입찰로 팔아 빚을 회수했다. 그 건물을 사들인 양모민은 봉래각(蓬萊閣)이라는 중화요리점을 차려 큰 성황을 이뤘는데, 2차 세계대전이 격렬해지자 그는 일본인 세력을 피해 1942년 봉래각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봉래각이 문을 닫은 직후 부산에 주둔했던 일본 해군 아카츠키부대(曉部隊)가 그 건물을 장교숙소로 삼았는데, 45년 광복 이후, 일본학병으로 갔다 돌아온 한국인들이 남아 있는 아카츠키부대 장교와 총격전을 벌이면서까지 그 건물에서 일본장교를 쫓아냈다.
일본장교가 쫓겨난 그 자리에는 학병출신이 중심이 되어 부산의 치안을 담당하던 치안대들이 모인 부산치안사령부의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의 건준 해체로 인해 1년도 안되어서 사라졌다. 이후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서울에 있었던 중화민국 대사관이 부산으로 내려오며 이 건물에 위치했고, 이 건물은 1953년 종전할 때까지 중화민국 대사관 임시 사무소로 쓰였다.
중화민국 대사관이 다시 서울로 복귀하고, 이 건물이 개인에게 불하되었는데, 당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이 구매해 예식장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이는 학교나 공회당을 빌려 결혼하던 당시 '결혼 전문 건물'이라는 파격적이고 새로운 결혼계의 패러다임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은 당연히 '결혼은 예식장'이라고 한다지만,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신기해했으며, 예식장업이 성황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2년 화재로 3,4,5층 내부가 불타면서 5층은 철거하고 3~4층은 개조해 다양한 시설이 들어섰으며, 1~2층은 지어진 그대로의 구조로 안전하게 남아 이곳에도 여러 업체들이 들어서고 나갔다.
그리고 지금 2022년 10월에는 1층에는 브라운핸즈 백제점이, 2층에는 창비 부산이 들어섰다.
3. 건물 풍경
건물 외관은 지어질 당시와 거의 그대로라고 한다. 딱 봐도 20세기 초중반에 지어졌을 그런 근댖벅인 벽돌 구조와 입구가 눈에 띈다.
입구를 보면, 당시 병원, 교도소같은 건물에서 주로 썼던 지금은 녹슨 창살형 문이 활짝 열려있다. 이 문을 지금껏 얼마나 많은 환자들, 중화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 군인과 치안대, 예식하러 온 사람들이 드나들었을까 떠올리며 들어갔다.
들어가면 당시 부산백제병원과 관련된 신문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읽을 수 있는 한자들이 조금 있어 당시 개업 분위기, 사회 이야기들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1층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오른쪽에는 브라운핸즈 백제점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있다. 이곳 좌측에 화장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장실 통로로 보인다.
통로를 올라가면 창비 부산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그 위 3층 이상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 대신 창비 부산에 들어가기 전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이쪽에는 4개의 열수 없는 문이 있는데, 맨 왼쪽 앞 '200'이라고 적힌 것에서 이곳이 과거 병원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낡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는 조용한 복도가 되었다.
200호 문이다. 당연히 열 수 없으며, 열어도 창비 부산으로 연결될거다. 저기 작은 구멍에는 읽기 좋은 시 한구가 작게 빛나고 있다.
창비 부산 안에 들어가면 책방에서 일하시는 분이 어떤 곳인지 가이드를 해주신다. 그러면서 창비 소개와 다양한 스티커, 명구, 소설 부분 채록집이 들은 파일을 하나 준다. 여기서 맨 앞에 있는 신청지에 이름, 휴대폰, 이메일을 적고 투명 상자에 넣어두면 창비와 관련된 소식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껏 창비와 함께 걸어왔던 작가들의 원고나 창비에 관한 옛 신문 기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찍을 수 있어 찍었다.
(구)백제병원을 나오면서 찍은 외관모습이다. 수많은 역사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속에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던 이 (구)백제병원이 오래도록 기억되어 그 역사를 이어갔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옆에 적힌 설명비의 내용을 기재하며 글을 마치겠다.
부산 구 백제병원 국가등록문화재 제647호 부산 구 백제병원은 1927년 서약식 벽돌 건물로 지어진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으로, 당시 부산부립병원, 철도병원과 함께 지역의 중요한 의료기관이었다. 1932년 병원이 문을 닫은 후에는 중국 요리집인 봉래각으로, 1942년에는 일본 아카즈키 부대의 장교 숙소로, 해방 후에는 부산치안사령부와 중화민국 임시 대사관 등으로 사용하였다. 1953년에는 신세계 예식장으로 사용했다가 1972년 화재로 건물의 5층 부분을 철거하였으며, 현재는 4층 건물의 일반 상가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1,2층의 벽,문,계단 등은 개화기 근대식 건물의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어 근대시기 병원 건축의 공간 구성을 엿볼 수 있느 중요한 건축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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