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구청 앞에 세워진 열녀비 - 김해김씨 열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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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금정구청 앞에 세워진 열녀비 - 김해김씨 열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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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정구청 앞의 김해김씨 열녀비

금정구청 앞 12번, 50번, 58번, 59번, 61번, 148번, 300번, 301번, 1002번, 1100번, 1200번, 1300번, 1500번 등 많은 곳으로 가는 버스들이 정차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내리는 '금정구청.부산가톨릭대 버스 정류장' 뒷 편 금정구청 앞 편에 보면 성인 허리만한 작은 비석이 하나 있다. 산책하다보면 이 쪽을 지나는데 항상 어떤 비석인지 봐야지 하다가도 그냥 지나간 경우가 많아 지나버리면 꼭 아쉬웠는데 이번에 날 잡고 어떤 비석인지 직접 확인해봤다.

금정구청.부산가톨릭대 버스 정류장을 등대고 찍은 비석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그렇게 커 보이진 않는다.

가까이 가보니 비석 앞면에 빨간색으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비문 내용 烈女學生金孝文妻金海金氏之閭
발음 열녀(烈女) 학생(學生) 김효문(金孝文) 처(妻) 김해김씨(金海金氏)의 려(閭)
직역 열녀 김효문씨의 부인 김해김씨의 정려(旌閭)
의미 여성 열사 김해김씨(남편 : 김효문씨) 표창 비석

 

그 비 우측 아래에는 그 비석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조선 정조시대 구불산(현 금정구  관내 윤산) 아래 살던 김효문이 어느날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평소 효심이 깊고 지아비 섬김이 극진하던 부인 김해 김씨가 끝까지따라가 구출했으나 남편이 곧바로 죽자 부인도 목숨을 끊었는데
후에 마을사람들이 귀감으로 삼고자 1789년 10월 열녀비를 세웠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지금도 기찰 동네 동쪽 골짜기를 호랑이로부터 남편을 구해 업고내려왔다하여 "업은골"이라 부르고 있다 합니다.

2004.10.
금정구청장

조선 정조시대(1776~1800) 때 동래의 기찰마을에 김효문이라는 선비가 부인 김해 김씨와 살고 있었다.

한여름 밤, 그들은 더위를 식히려 마당에 멍석을 펴고 모깃불을 피워두고 나란히 잠자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어디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남편 김효문씨를 물고 나가는데, 부인 김해 김씨가 잠에서 깨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잡았다. 꼬리가 잡힌 호랑이는 놀래서 남편을 입에 문 채로 마을을 벗어나 산속으로 뛰었지만, 그 부인이 '사람 살려!'하며 큰 소리를 지르며 계속 놓아주지 않자 호랑이는 윤산의 한 골짜기에서 김효문씨를 뱉어두고 도망쳤다.

호랑이가 도망간 걸 확인한 부인 김해 김씨는 남편을 업고 집까지 힘겹게 내려왔는데, 남편은 곧 사망하고 만다...

충격을 크게 받은 부인 김해 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심히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다. 성인 남성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걸 그 부인이 쫓아갔고, 중간에 남편을 뱉고 도망간 호랑이를 등지고, 부인이 남편을 업고 집까지 왔으나 남편도 사망하고, 부인도 따라 죽은 사건이었던 것...

 

결국 다음날 아침 사망한 남편과 부인을 본 마을 사람들이 부인 김해 김씨를 열녀로 추앙해 열녀 비각에 모셨고, 동시에 마을사람들은 호랑이로부터 남편을 구해 업고 내려온 골짜기를 '남편을 업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업은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김해 김씨는 남편 김효문이 전염병에 걸려 뒷바라지를 하였으나, 결국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고 어린 아들딸을 친정으로 보낸 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 이에 1789년(정조 13)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고, 이를 기려 비를 세웠다.

김효문씨가 전염병에 걸려 부인 김해 김씨가 그를 간호했으나 결국 사망했는데, 그녀는 자식들을 자신의 친정으로 보내고 자결해 정절을 지켰고, 이를 들은 정조대왕이 그 지역에 정려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다는 설이다. 사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호랑이에게 잡혀간 남편을 업고 온 이야기'가 더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이야기가 비석이 세워진 경위가 되었든 김효문씨와 김해 김씨가 결혼을 했고, 김효문씨의 사망으로 김해 김씨가 따라 죽었던 것으로 그녀가 열녀가 되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를 통해 몇몇 학자들은 지금 정서와는 어떻든 지역의 윤리 교육에 좋은 자료가 된다고 평가하기는 한다.

이 비석 앞면을 기준으로 좌측에는 비석이 세워진 날이 적혀 있다.

乾隆五十四年己酉十月日立 건륭 54년 기유(1789년) 10월 일 설립

여기서 건륭(乾隆)은 청 고종 건륭제(1711~1799)의 연호로 1736년을 원년으로 하고, 1795년(건륭 60년)까지 쓰였던 청나라의 연호다. 당시 조선은 시대 상황 상 청의 연호를 쓸 수 밖에 없어 이 비를 세울 때도 당시 청의 연호인 건륭을 쓴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말기에 동래 지역에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음을 알리며, 또 그 부인의 공덕과 절개를 지킨 것에 대한 것을 표하고자 이 '김해김씨 열녀비' 비석이 세워졌다. 누군가에는 한 편의 인터넷 기사처럼, 누군가는 그저 버스 정류장을 지나면 한 번 흘깃 해봤을 이 비석에는 한 부부의 슬픈 사연이 묻어 있었던 것이 느껴졌다... 다음에 또 보게 될 유적이나 비석은 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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