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ombia Was Named a Major Non-NATO Ally. As Qatar becomes a non-NATO ally, 최근 상황이 상황인지라, 영어 뉴스를 보다보면 MNNA에 대한 이야기 많이 나온다. 이 MNNA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
1. 한국전쟁 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 겸 미국 극동군사령관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다음날 16일, 인천을 탈환했다.
12일 뒤인 9월 28일,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수복했으며, 20일 평양을 탈환했고, 10월 26일에는 초산까지 점령하며, 남북통일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19일, 아시아 공산국가들의 대표주자였던 중화인민공화국이 명목상 민병대였던 중국 인민지원군(中国人民志愿军)을 조직시켜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이후 국군측은 공산군측에 밀려 38선 인근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전쟁이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한 미국과 영국은 12월에 평화적인 수단을 통해 한국전쟁을 종결짓기로 합의했고, 그에 따라 12월 14일, 유엔 총회(UNGA)에서 인도, 이란, 캐나다로 구성된 3개국협상단 구성안이 통과되었지만, 공산국가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1951년 3월, 한국 전쟁 정전 결의안이 다시 유엔에 상정되어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방적인 반대와 수락 요건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같은 해 6월 13일,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열린 조·중·소 회담에서 '38도선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조건에서 휴전이 유익하다'는 결론이 나 공산권에서는 협상을 할 준비를 해나갔다.
6월 23일, 유엔 주재 소련 대표 야코브 알릭산드라비치 말리크(Яко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алик, 1906~1980)를 통해 유엔에서 휴전협상을 제의했고, 미국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며 정식적인 협상 테이블이 준비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7월 12일부터 개성시 고려동 내봉장(來鳳莊)에서 소련과 미국 간의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시작되었다. 길고 긴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조인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협상 제159차 본회의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 중장(William Kelly Harrison Jr., 1895~1987)과 공산군측 대표 남일(1913~1976)이 3통의 휴전협정서와 부속협정서에 각각 서명한 뒤 유엔군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Mark Wayne Clark, 1896~1984), 북한군총사령관 김일성, 중공군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怀, 1898~1974)가 각각 그의 후방 사령부에서 휴정협정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대표는 최후까지 휴전에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끝내 본 휴전협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미,중, 북한 3국의 서명으로 약 3여 년간 지속된 한국전쟁은 북위 38도선 부근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며 휴전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직후인 8월 8일, 대한민국 서울 청와대에서 변영태 외무장관(1892~1969)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무장관(John Foster Dulles, 1888~1959) 사이에서 향후 있을 북한과 같은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한미 군사 동맹을 촉구한 한국측에 의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되었고, 1953년 10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 조약은 1954년 11월 18일 발효되었다.
왜 갑자기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냐고?
이 이야기가 바로 지금부터 할 MNNA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2. MNNA
MNNA 혹은 주요 비NATO 동맹국(Major non-NATO ally)은 미국 연방 정부가 지정한 미군과 전략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NATO국이 아닌 가까운 동맹국이다. 이 MNNA라는 지위는 자동적으로 상호방위협정(MDP, mutual defense pact)을 포함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 여전히 NATO국이 얻을 수 없는 다양한 군사적, 경제적 이점을 받게 된다.
2-1. 오스트레일리아
1951년 9월 1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미국 안전보장 협정(ANZUS)>이 체결되면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는 태평양 지역의 방위를 위한 군사적 협력을 강화했다.
2-2. 일본
1951년 9월 8일, 군대가 사라진 일본의 국내외를 돕기 위해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고 약 9년 뒤, 1960년 1월 새롭게 개정된 <신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일본과 미국은 동맹국이 되었다.
2-3. 이집트와 이스라엘
1978년 9월, 미국이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영토 분쟁(제2차 중동 전쟁 ~ 제4차 중동 전쟁)의 앙금과 향후 개선 방향, 물자 지원 등을 약속했고, 이로써 단교했던 이집트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제2차 중동전쟁부터 이스라엘을 눈여겨 보았던 미국은 프랑스와의 관계가 나빠졌음에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큰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주변국이 점차 공산진영으로 돌아서고 있었고 유대계 자본가들의 로비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모두를 중동의 중요한 동맹으로 여기게 되었다.
(b) 초기 지정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이집트(Egypt), 이스라엘(Israel), 일본(Japan), 대한민국(the Republic of Korea) (및 뉴질랜드(New Zealand))는 이 조항의 발효일에 대통령이 지정한 것으로 간주되며, 대통령은 상기 국가의 (MNNA) 지정을 의회에 통지할 필요가 없다.
- 2321k조. 주요 비NATO 동맹국(Major Non-NATO Ally) 지정
1987년 2월, 미국 법전 10조(미군)에 미국 국방장관이 비NATO 동맹(non-NATO ally) 협력적인 연구개발(R&D) 협정을 제정할 수 있도록 규정한 <2350a조항>이 추가되면서 MNNA, 즉 주요 비NATO 동맹국(Major Non-NATO Ally)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 때 법령이 발표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이집트, 이스라엘, 일본, 대한민국'이 초기 MNNA로 지정되었다!
1996년, 수정된 <1961년 대외원조법(FOREIGN ASSISTANCE ACT OF 1961)>에 MNNA가 추가되면서 해당 국가들은 NATO 국가들이 받던 추가적인 군사적, 재정적 혜택을 같이 받게 되었다.
(c) 방위물자 비축 위치 -
(1) 제한사항 - 방위물자 비축은 주로 미국이 사용하는 미군기지나 군사기지의 경계 밖에 배치할 수 없다.
(2) 예외 - MNNA 및 미국 대통령이 지정하는 국가
- 1961년 대외원조법
(c) 이전 조건 -
(1) 수취국에 대한 비용 없음 - 초과 방어 물품은 본 조에 따라 수취국에 비용없이 이전될 수 있다.
(2) 우선순위 - NATO 국가 및 MNNA 국가
- 1961년 대외원조법
(a) 금지 -
(b)항에 규정된 경우를 제외하고, 이 법률 또는 다른 법률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은 아래 대상 이외의 국가에 대한 M-833 대전차 포탄(antitank shells) 또는 이와 유사한 대전차 포탄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사용할 수 없다. (이하는 대상 국가를 말한다.)
(1) NATO 국가
(2) MNNA 국가
(3) 타이완(Taiwan)
- 1961년 대외원조법
빌 클린턴 시대에는 3개 국가가 MNNA로 지정되었다.
1996년에는 요르단 하심 왕국, 1997년에는 뉴질랜드, 1998년에는 아르헨티나 공화국이 MNNA에 지정되었다.
2-4. 요르단
요르단 하심 왕국은 기본적으로 아랍국가 중에서도 손에 꼽는 친서방 국가였으며, 미국은 1952년부터 지금까지 100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사회적 지원 및 군사적 지원을 해왔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1996년 요르단은 MNNA로 지정되었다. 요르단과 미국의 관계가 2000년대까지 얼마나 좋았냐면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로 미국은 특히 중동지역에 대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이 지역만큼은 민주주의 향상 운동, 인권 개선 사업 등을 벌여왔을 정도였다.
2-5. 뉴질랜드
원초, 1951년 <ANZUS 조약>이라는 군사 조약을 체결했던 뉴질랜드와 미국은 뉴질랜드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미국의 강제적 행동으로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갔다.
1984년, 당시 뉴질랜드 총리 데이비드 러셀 롱이(David Russell Lange, 1942~2005)는 핵추진함이나 핵무장함이 뉴질랜드 항구 혹은 뉴질랜드 영해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1985년 2월, 미국은 핵추진 구축함 USS 뷰캐넌(DDG-14)을 뉴질랜드로 보내려고 했으나, 뉴질랜드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서로에 대한 이해 관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미국은 뉴질랜드와의 관계를 동맹(ally)에서 친구(friend)로 격하시켰다.
이렇게 서로의 상황이 점점 안좋아졌지만, 1997년, 미국은 이 뉴질랜드와의 관계를 친구(friend)에서 동맹(ally)으로 격상시키며 MNNA로 지정되었다. 대신 뉴질랜드법(<1987년 뉴질랜드 핵자유구역, 군축 및 군비 통제법>)에 따라 핵추진함을 지금까지도 뉴질랜드 영해로 보내진 않았다.
2-6.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는 역사적으로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아메리카 대륙에 있다는 이유로 미국과 1947년 <미주상호원조조약(TIAR)>에 서명하기도 하며 협력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1년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1981~1989)가 들어서면서 아르헨티나와의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었다. 특히 아르헨티나가 자체적으로 마약 문제와 대테러 및 반인신매매 정책을 강경히 진행시키면서 국제 안보와 평화 유지를 인정받아 1998년에 미국은 아르헨티나를 MNNA로 지정했다.
조지 W. 부시 시대에는 전체적으로 7개, 확실한 것만으로는 6개가 MNNA로 정해졌다. 왜냐면 타이완이 사실상 MNNA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MNNA라고 말하진 않지만, 미국 법령에는 이미 타이완이 MNNA로 표시되어 있다.
Taiwan shall be treated as though it were designated a major non-NATO ally,
타이완은 MNNA로 지정된 것처럼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 22 USC 2321k: Designation of major non-NATO allies
그렇게 2002년에는 바레인 왕국이, 2003년에는 필리핀 공화국, 타이 왕국 그리고 사실상(de facto) 타이완(중화민국)이 MNNA에 지정되었고, 2004년에는 쿠웨이트국, 모로코 왕국,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MNNA로 지정되었다.
2-7. 모로코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776년 7월 4일, 미국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했고, 약 1년뒤인 1777년 12월 20일 모로코는 미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모로코는 미국의 독립을 인정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 이러니 당연히 미국과 사이가 좋을 수 밖에 없다. 이후 모로코가 조금 강압을 주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1786년 6월, 양국은 <모로코-아프리카 우호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은 이 조약은 미국이 최초로 무슬림 국가, 아랍 국가, 아프리카 국가와 맺은 조약으로서 상징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모로코도 유럽에서 가장 가까웠던 만큼 제국주의의 시련을 피해나갈 수 없었다.
모로코가 프랑스령 모로코(1912~1956), 에스파냐령 모로코(1912~1956)라는 이름으로 식민지가 되었을 때, 미국은 식민제국에게 모로코에 더 많은 자치권을 부여하게 했으며, 인종적 관용과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는 식민통치를 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후 모로코가 독립을 하고 몇몇 군사 협정을 맺으며 양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져갔다. 그렇게 2004년, 미국은 모로코 왕국을 MNNA로 지정했다.
2-8. 필리핀
1898년 미국의 승리로 끝난 스페인-미국 전쟁(1898.04~1898.08)으로 미국이 필리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약 4년간 군정기(1898~1902)를 실시하곤, 약 35년간 섬정부(1901~1935)를 건설해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시켜갔다. 그러다 1946년, 드디어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지만(필리핀 제3공화국), 미국은 필리핀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1년 8월, 양국은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으며, 이러한 상호 원조의 연장선으로 2003년, 미국은 필리핀 공화국을 MNNA로 지정했다.
2-9. 타이
1920년 12월, 타이와 미국은 워싱턴 D.C.에서 양국 관계에 대한 협정을 조인했으며, 1954년, 타이는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에 가입해 냉전 시대에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1962년에는 <러스크-타낫 협정(Rusk-Thanat Agreement)>을 맺어 미국이 타이를 방어하고 군사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1966년에는 <타이-미국 우호 밎 경제 관계 조약>을 맺어 양국의 기업들이 상대국의 시장에 진출할 수 있게 했으며, 원자력의 민간 사용과 같은 파격적인 제안도 합의하게 되었다.
지속적인 우호 관계와 협력 속에서 미국은 2003년, 타이를 MNNA로 지정했다.
2-10. 파키스탄
1947년 8월 14일, 인도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영국의 파키스탄 자치령(1947~1956)이 설립되며 파키스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1956년 3월,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며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건국된다. 건국된지 약 2달이 지난 뒤 미국과 파키스탄 양국이 관계를 맺게되는데, 이로써 미국은 파키스탄과 관계를 맺은 최초의 국가 중 하나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이 관계는 동유럽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미국 정부의 전반적인 정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한마디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1956년, 미국은 파키스탄에 소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페샤와르 공군기지(Peshawar Air Station)의 임대 허가를 요청했고, 파키스탄 측은 냉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점차 사이가 좋아졌던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에서도 앙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이 파키스탄이 도와주자, 바로 옆에 있던 인도는 소련측에 붙게 되었다. 아무리 파키스탄이 미국편이라지만, 거대한 대륙에 핵개발 의지까지 보인 인도가 소련에 붙어버리면 큰 골칫거리 하나가 더 생기는 셈이었다. 그로 인해 미국은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파키스탄이 미국에게 등을 돌리고 중국 공산당과 가깝게 지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중국과 가까이 지냈던 파키스탄은 의외의 결과를 도출하기도 했다. 1971년 7월,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앨프리드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는 파키스탄에 방문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비밀 접촉을 시작했고, 이를 통해 1972년 2월, 리처드 밀허스 닉슨(Richard Milhous Nixon, 1913~994)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킨 것이다!
1971년 12월에 진행된 파키스탄의 망언으로 시작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고, 이슬람 독재 체제를 유지했으며, 1998년에는 핵개발을 진행하는 등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며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고, 결국 미국은 경제 제재를 가하며 양국 간의 관계는 악화된다.
이후, 2001년 9.11테러로 인해 미국이 선포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2001.10~2021.08)으로 지역 지원군이 필요해지자, 미국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강압적으로 경제 제재를 풀며 동맹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렇게 2004년 미국은 파키스탄을 MNNA로 지정했다.
2-11. 타이완
1949년 8월, 미국은 <미국과 중국 관계>라는 백서를 발표해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의 무능을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중국에서의 내전은 더 이상 미국 정부의 통제범위를 벗어 났으며, 따라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쉽게 말해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겠다는 말이 된다.
이런 한편, 중국 국민당은 점점 밀리며 1949년 12월, 중국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국부천대(國府遷臺)를 하게 되며, 중국 대륙에서의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1950~1953)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는 타이완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재개하고 미국 제7함대(Seventh Fleet)의 타이완 해협을 무력화시켜 중국 국민당의 북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타이완 침공 가능성을 사전에 막으며 미국은 다시 한 번 타이완에 다가왔다.
이후 <상호안보법>(1951), <1961년 대외원조법>, <국제개발법>(1961) 등의 법적 근거로 타이완에 재정적 지원을 시작했으며, 1954년 12월,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1955~1979)을 체결하며 미국은 타이완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1979년 1월 1일부터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를 하면서 자연스레 중화민국(타이완)과의 외교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아직 타이완을 버릴 수 없었던 미국은 1979년, 4월 10일, <타이완 관계법(TRA)>에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미국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비공식적인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결국 미국은 2003년에 사실상 타이완을 MNNA로 지정했다.
2-12. 쿠웨이트
1951년, 쿠웨이트가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을 때부터 미국은 이미 그 지역에 영사관을 설치했을 정도로 쿠웨이트는 미국이 눈여겨 보던 곳이었다.1987년, 쿠웨이트의 대형 선박 11척이 페르시아 만에서 선적을 미국으로 변경한 일을 계기로, 미국과 쿠웨이트는 각국의 페르시아 만에서의 항해의 자유를 보장하는 해상 보호 체제를 실시하면서 양국의 협력이 시작됐다.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강제 합병하고 괴뢰국인 쿠웨이트 공화국(1990)을 세웠다. 이후 이라크는 그 점령지에 쿠웨이트주(1990~1991)와 사드다미야트 알 미트라 주(1990~1991)을 세웠지만, 미국 등의 전폭적인 지지로 벌여진 걸프 전쟁(1990.08~1991.01)로 인해 왕정 복고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미국과 쿠웨이트는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이후에도 미국이 선포한 테러와의 전쟁에서 테러 단체들에 대한 자금 지원 차단 등의 노력을 하며 미국을 도왔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2004년 미국은 쿠웨이트를 MNNA로 지정했다.
2-13. 바레인
1971년 영국에서 독립한 바레인 왕국은 1991년 10월, 미군에게 바레인의 군사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명시한 <바레인-미국 방위 협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두 국가는 점차 군사적으로 가까워졌다. 그 결과 1997년부터 미국 해군 제5함대가 바레인에 사령부를 설치할 수 있었고, 이윽고 2002년 미국은 바레인을 MNNA로 지정했다.
버락 오바마 시대에는 2012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2015년에는 튀니지 공화국이 MNNA로 지정되었다.
2-14. 튀니지
이미 1797년부터 <튀니지-미국 우호 조약>을 체결한 양국은 오랫동안 사이가 좋았다. 중간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관련 사건들로 문제가 있었으나, 1957년 3월, <튀니지 경제 및 기술 원조 조약>을 체결하고, 또, 미국-북아프리아 경제 파트너쉽(USNAEP)과 중동 파트너쉽 계획(MEPI) 맺으면서 양국의 관계는 더 좋아진다. 그러면서 2015년 미국은 튀니지를 MNNA로 지정했다.
2-15. 아프가니스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1979.12~1989.02)이 일어나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소련에 저항하는 무자헤딘(مجاهدين)에 돈과 무기를 지원했고, 결국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땅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1992년 4월, 소련의 지원을 받던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나지불라 정권(1987~1992)이 망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1992~1996)이 건국되며 미국의 지원을 조금씩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승리의 주역이자 자국과 미국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군사력이 강한 무자헤딘 세력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을 멸망시키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호국(1996~2001)을 건국했다. 당연히 미국은 이런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세운 나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국 대사관이 알카에다 등이 던진 폭탄으로 테러를 당한 1998년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가 일어나며, 미국 정부는 대대적으로 빈 라덴을 축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알카에다의 빈 라덴을 포함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2001.10~2021.08)으로 탈레반 정부를 축출한 미국은 그곳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2001.11~2021.08)을 건국시켰다. 그러나 탈레반은 숲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투를 이어왔고, 그에 응징한 미국에 의해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었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과정 중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MNNA로 지정했다.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는 2019년에 브라질 연방공화국이 MNNA로 지정되었다.
2-16. 브라질
포르투갈령 브라질국(1621~1815)에서 포르투갈령 브라질 왕국(1815~1822)를 거쳐 브라질 제국(1822~1889)로 독립한 역사를 지닌 브라질에 이미 식민지 시절인 1815년부터 미국은 영사관을 설치했었다.
1890년 열린 제1차 아메리카 국가 국제 회의(1890.01~1890.04)를 시작으로 미국은 남미 국가들과 관세 동맹을 맺으려고 할 정도로 남미의 경제적 성장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브라질이 미국을 필요하게 된 건 20세기 초부터 아르헨티나가 강성해지고, 반미 성향이 커짐에 따라 브라질은 친미 성향을 뛰게 되었다. 이러한 연장선으로 1947년 <미주상호원조조약(TIAR)>에 브라질도 같이 서명했다. 역시 적의 적은 나의 친구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정부는 지역 문제와 세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파트너로 여겼고, 2005년에는 상호 협력을 강화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양측에서 나왔으며, 이런 흐름 중 도널드 존 트럼프(Donald John Trump, 1946~) 미국 대통령은 2019년, 브라질을 MNNA로 지정했다.
조 바이든 시대에는 2022년 5월 21일 글을 쓰는 현재까지 2개국이 MNNA로 지정되었고 1개국이 퇴출되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이 퇴출되었고, 2022년에 카타르국과 콜롬비아 공화국이 지정되었다.
2-17. 콜롬비아
1824년, <앤더슨-괄 조약>을 통해 향후 12년간 양국이 서로 무역에 있어서 최혜국(most-favored-nation) 대우를 해준다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미국이 다른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양자 조약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1846년, 미국은 콜롬비아의 파나마에 대한 주권을 보장하는 대신 파나마 지협에 철도와 운하를 건설한다는 조약을 체결했고, 이후 1855년 1월에는 파나마 운하 철도(Panama Canal Railway)가 개통되었고, 1881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건설이 시작(완성은 1914년)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미군은 파나마 지역의 공사 현장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6번이나 파나마에 상륙했다... 이렇게 양국의 사이는 좋았다가 나빴다가 했었다.
1903년 1월, 양국은 <헤이-에란 조약(Hay-Herrán Treaty)>을 맺었다. 이로써 미국은 당시 콜롬비아의 영토였던 파나마 지협을 가로지르는 일부 지역을 선금 1천만 달러에 매년 25만 달러씩 100년간 갱신가능한 임대차 계약을 맺을 뻔 했다. 왜 '할 뻔'이냐면, 이 조약이 미국 상원에서는 비준되었으나, 콜롬비아 상원에서는 비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격분한 미국은 콜롬비아에 속한 파나마인들을 부추겨 파나마를 독립시키는데 성공한다. 진짜 ㅎㄷㄷ한 국가...
1928년, 콜롬비아에 있던 미국 회사 유나이티드 푸르트 컴퍼니(United Fruit Company, 1899~1970)의 노동자들이 처우 개선과 정규직 채용을 요구하며 파업하자 회사는 '미군이 쳐들어갈 수도 있다'며 콜롬비아 정부를 압박했다.... 그로 인해 콜롬비아 군대는 자국 노동자 가족을 광장에서 기관총을 난사해 1천명 넘게 죽여버린 일이 있었다... 점점 양국의 사이는 나빠지기 시작한다. 정확하게는 콜롬비아 정부가 미국 정부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라 비올렌시아(La Violencia, 1948~1958) 동안, 미국은 콜롬비아 보수당을 지지했으며, 이윽고 벌어진 콜롬비아 분쟁(1964~)에서도 반공산주의적 성향을 가진 콜롬비아 정부를 지지했다. 어느 순간 정부와 정부끼리 사상을 통해 친해지게 된 것이다. 미국은 공산세력을 축출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콜롬비아 내 마약 카르텔을 무너뜨리려고 미군 및 CIA, DEA 파견과 같은 여러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미국은 콜롬비아를 MNNA로 지정했다.
2-18. 카타르
1972년, 카타르와 미국이 수교하면서 가까워졌다. 양국은 페르시아만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외교적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갔는데, 특히, 탄화수소 분야에서 넓은 경제 관계를 맺고 있다.
2017년 6월,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아랍 에미레이트 연합국, 바레인 왕국, 이집트 아랍 공화국, 예맨 공화국, 리비아국 등이 이란과 극단주의 세력과의 단교 및 단절을 요구하며 카타르와 단교한 카타르 외교 위기가 일어났다. 이 때 처음엔 미국도 이란과의 단교를 강력히 주장하며 카타르에게 비난을 퍼부었지만 이윽고 2018년에는 카타르와 <카타르-미국 안보협력 공동선언>을 해 카타르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다면 저지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이어 2021년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의 화해를 중재하면서 다시 사이가 완만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2022년, 미국은 카타르를 MNNA로 지정했다.
2-19. 아프가니스탄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알카에다의 빈 라덴을 포함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2001.10~2021.08)으로 탈레반 정부를 축출한 미국은 그곳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2001.11~2021.08)을 건국시켰다. 그러나 탈레반은 숲으로 들어가 게릴라 전투를 이어왔고, 그에 응징한 미국에 의해 2011년 오사마 빈 라덴이 죽었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과정 중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MNNA로 지정했다.
2019년 발표된 <아프가니스탄 문서(Afghanistan Papers)>에서는 '미국 원조의 40%가 부패한 관리, 군인, 범죄자, 반란군 등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라는 분석을 했다.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부패와 탈레반의 지속적인 공격에 진저리를 느낀 미국은 2020년 2월, <미국-탈레반 평화 조약>을 맺어 '탈레반과 파키스탄의 승리'를 공언해주었다. 그렇게 미군은 점차 아프가니스탄에 배치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2021년 8월 15일부터 미군은 대사관 철수를 시작해 여러 기구와 인원들을 대규모 철수시켰고, 8월 30일 공식적으로 모든 미국 관련 인물을 철수시켰다. 그렇게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과의 인연은 끝났고, 2021년 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MNNA에서 퇴출시켰다. 이는 MNNA가 무한적인 미국의 동맹 국가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물론 나라가 망해서 자동퇴출 된 것이긴 하지만 퇴출도 퇴출이다.
3. 그래서 이 MNNA에 지정되면 무엇이 좋은거야?
한마디로 말해서 MNNA는 '저 나라는 진짜 우리 미국에게 중요한데, NATO에는 못넣어주니까 NATO급에 준하는 동맹으로 여기자'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NATO가 받는 대부분의 대우와 또 지역에 맞춘 각종 지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좀만 나열해보겠다.
1. 미 국방성(DoD)와의 협력적 R&D 프로젝트 참여 2. 특정 대테러 계획에 대한 참여 3. 열화우라늄 대전차탄 구매 가능 4. 배급(ration)에서 함선(ship)까지의 다방면의 범위에 대한 군사 잉여 자원의 우선적 인도 5. 미군 기지 외 보관중인 미 국방성 소유 장비의 전쟁비축물자(WRS) 소유 6. 협력적 R&D 프로젝트 및 평가용 장비 및 재료 대여 7. 특정 방위 장비 구입 및 임대(lease)용 미국 자금 사용 8. 상호 훈련 9. 우주 기술에 대한 신속한 수출 처리 10. 해당국의 기업이 미국 외 지역의 군사 장비 수리 및 유지보수를 위한 특정 미 국방성 계약에 입찰할 수 있는 허가 |
꽤 파격적인 조건이지 않는가? 어떤 나라는 미국 전투기 하나 빌리는데도 몇십년 걸린다는데, 이건 MNNA에 선정되기만 하면 미국의 최신기술과 무기, 각종 선진 전투 방식 등을 더 싸고, 더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에 훈련도 같이 해준다는 뜻이니 대단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현재 대한민국은 미국과 MNNA라는 관계에 있으면서 다양한 이득을 보았던 것은 사실이다. 상기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과 같이 영원히 같이 있을 순 없지만 지금 미국이 우리를 믿어주는 이 상황을 잘 이용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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