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략적인 옥련선원과 백산 첨이대의 지도입니다.
부산 수영구 백산 아래쪽에 옥련선원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다보면 미륵불이 있는 절의 계단에 다다르게 됩니다.
계단을 오르고 포장된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거대한 미륵불이 보입니다.
미륵불이 앉아 있는 곳은 넓은 자갈터입니다.
미륵불의 왼편엔 2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왼편의 비석은 '백산 미륵대불 봉안 비명 및 백산 미륵대불 중창 불사 비명'입니다. 이 미륵불이 어떻게 지어졌고, 어떻게 다시 수리되었는지'에 대해 적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에 적어두겠습니다. 그 오른편의 비석은 '미륵대불 조성불사 동참명부'입니다. 이 미륵대불을 지을 때 도운 분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백산 미륵대불 봉안 비명 |
백산은 백두산 태백산과 더불어 백두대간의 종점이 되는 곳이니 민족의 뿌리이자 나라의 영산이 되는 곳이다.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나라에 국난이 있을 때 마다 천제를 지내던 곳이기에 백산이라 하였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하여 나라의 팔경 중에도 수승(殊勝)한 곳이 된다. 이러한 성지에 민족혼을 불어넣어 국운을 융성하게 하고자 이곳 백산에 미륵대불을 모시고 안으로 민족 통일을 염원하고 밖으로 외세를 막아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종주국이 되길 발원하면서 저 태평양을 향해 백산에 미륵대불을 봉안하게 되었다. 이 미륵대불은 높이가 50여 척이며 황등산 화강석으로 1500톤이 소요되었다. 이 불상을 조성하기 위하여 10,000일간 기도 발원을 하였고 1000일 간 공정 끝에 단기 4325년(서기 1992년) 임신 10월 3일 개천절에 봉불 점안식을 하게 되었다. 발원하옵건대 이 불사 인연공덕으로 현세 복혜(福慧) 이루옵고 내세 도솔천에 왕생하였다가 삼회설법(三會說法) 듣사옵고 함께 성불하여 지이다. 불기 2536년(서기 1992년) 10월 3일 벽암 근식 |
백산 미륵대불 중창 불사 비명 |
백산에 석조 미륵대불을 초창한지 4반세기만에 불신이 변색하여 중창불사를 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중창 4인위(四人委)를 위촉 그 위원들의 결정에 따라 불상 상호 외에는 모두 교체하기로 하고 최경교 석장에게 조성을 의뢰하였다. 기초지반부터 완전해체하여 복원하는데 다시 화강석 1500톤이 요하였다. 이에 안으로는 일오스님의 간절한 기도와 밖으로는 유연 사찰의 동참이 초석이 되었다. 이 불상에는 삼유별상(三有別相)하니 일왈(一曰) 관(冠)이니 현거(現居)도솔하시며 일생보처(一生補處)보살임으로 보살관을 쓴 것이요 이왈(二曰) 수인(手印)이니 미래세 하강성불하시고 삼회설법으로 도탈중생 할 것임으로 설법수인을 지으신 바요 삼왈(三曰) 집지물(執持物)이니 미륵불은 용수(용화나무 - 나가르주나)하에서 성불하시기에 용의 상징인 여의주를 지비하시었다. 미륵불은 미래 불연을 짓고자 용수(龍樹)보살로 화생하여 용궁에 들어가 해장(海藏)된 만법을 통달하고 세상에 삼론을 펴시며 다시 무착(無着) 세신(世親)보살이 되어 도솔천 내원궁에 매일 친견 문법하여 유식논을 남겨 상종(相宗)을 전하였다. 이에 중창을 마치고 불기 2561년(서기 2017년) 개천절에 점안하게 되었다. 벽암(碧巖) 지산(智山) 근식(謹識) |
이곳을 조금 내려가면 절의 불이문이 보입니다.
이 불이문 앞에 '미륵성지'와 '지장보살'이라고 쓰인 돌 기둥이 서있습니다.
불이문 아래의 길로 나오면 종무소인 래원정(來院亭)이 나옵니다. 래원정 부근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옵니다.
첫번째 계단을 올라가면 사천왕이 서 있습니다. 왼편엔 북방 다문천왕, 서방 광목천왕이 서있고, 오른편엔 남방 증장천왕, 동방 지국천왕이 서있습니다.
두번째 계단 왼편의 안내문을 보면 밤 7시 이후에는 관계자가 아니라면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계단을 올라가면 옥련선원 대웅전이 나옵니다.
대웅전의 왼편엔 선방 심우전(尋牛殿)이 있습니다.
웅장한 범종각도 볼 수 있습니다.
대웅전 오른편엔 스님들이 계시는 요사채 보현당(菩賢堂)이 있습니다.
보현당과 범종각 사이의 길로 가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작은 못과 다리 그리고 석탑이 보입니다. 이 다리를 극락교(極樂橋)라고 하며 그 다리 건너 위치한 석탑을 극락교 석탑(極樂橋 石塔)이라고 합니다.
대웅전과 심우전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삼성각(三聖閣)이 있습니다. 거기서 더 뒤로 올라가면 마애지장보살좌상이라는 문화재가 있습니다.
뒤로 올라가면 마애지장보살좌상 혹은 마애미륵석불이 보입니다.
2개의 안내문이 이 마애지장보살좌상의 설립 시기를 각각 17~18세기 혹은 삼국시대로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유의깊게 읽으시고 이해하셔야 할 듯 합니다.
마애지장보살좌상 | 마애미륵석불 |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2001.5.16. 지정) | |
수영구 민락동 옥련선원에 있는 삼성각 뒷산에 있다. 거대한 돌에 새겨진 것으로 조선 후기인 17~1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좌상이 새겨진 바위는 거대한 바위 2개가 맞붙어 있었던 것인데 벼락을 맞아 깨지면서 거꾸로 박혀 보살좌상은 아래위가 거꾸로 되어 있다. 또한 상호(相好, 부처나 보살의 얼굴부분)와 머리 부분이 음각으로 표현되어 있고 부산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마애불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여기는 삼국시대부터 백산사(白山寺)가 있었던 곳이다. 이 마애불은 그 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불상은 미륵불의 좌상이다. 조각 수법은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으로 섬세하고 정치(精緻, 정교하고 치밀)했으나 지금은 마멸이 심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느 때에 벼락이 쳐서 돌이 거꾸로 누워 현재 위치로 놓이게 되었다. 원래 이 도량은 미륵부처님의 용화세계를 지향하는 사찰로 오래도록 전해져 온 것이다. |
돌이 거꾸로 떨어지고, 좌상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부처님의 얼굴 부분이 아래를 향한 모습으로 되어 있는 그림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마애지장보살좌상에서 내려다 본 옥련선원입니다. 현대 문명과 연결된 듯 해 조화로우면서도 산으로 일부가 막혀 그 신비함을 더해주는 풍경입니다.
그 아래에 이런 불상과 석탑도 있습니다.
래원정에서 스님들에게 허락을 맡고 길을 돌아 올라가면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와 백산 옥련선원 사적비를 볼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좌수영 무주망령 천도비가 있습니다.
비석 앞면 |
임진왜란좌수영무주망령천도비(壬辰倭亂左水營無主亡靈薦度碑) |
지나간 세월은 허허로이 흘러만 갔다. 좌수영(左水營) 고혼(孤魂)들이 가신지 어연간 400여년 우리는 이제 잃어버린 역사 속에서 천길 물길을 파고 만길 높은 산을 오르는 마음으로 그 때 아팠던 생채기를 되새기고 민족의 이름으로 옷길을 여미며 분향(焚香)한다. 장산(萇山)은 태고의 정적(靜寂)을 품고 저렇게 솟아 있고 수영강(水營江)은 만고의 회한(悔恨)을 안고 또 저렇게 흐르고 있다. 저 산과 저 물이 다 닳고 마르지 않는 한 이 강산의 창맹(蒼氓, 국민)들은 유구(悠久)히 이 영토에서 복록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다. 하느님이 백두(白頭)의 영지(靈地)에서 국기(國基)를 잡은 지 반만년 홍익인간의 이념은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대요(大要)가 되어 이 조국을 군자지국으로 숭상(崇尙)해 왔다. 세상에 어떤 흉물이 있어 이 신성한 예도지국(禮道之國)을 침범할 수 있겠는가. 그 순후(淳厚)했던 풍속은 세계 인류의 전범(典範)이 되고 정법(正法)의 예도 (禮道)는 인세(人世)의 귀감(龜鑑)이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여기는 백산(白山)이다. 내산국(萊山國)의 영산(靈山)이며, 장산국(萇山國)의 성지이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라 남녘에 다시 민족의 성산(聖山)을 점지하여 주었으니 바로 여기가 그 곳이다. 장산( 萇山), 내산(萊山), 황산(荒山)의 정기를 모아 수영강이 막내둥이로 만들어 낸 곳이 이 성산(聖山)이다. 1592년 4월 13일 밤이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달은 밝았다. 이 평화로운 나라의 관문(關門)인 부산포(富山浦)에 왜(倭)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전후 7년 동안 이 금수강산(錦繡江山)은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전쟁터로 변했다. 14일 부산진성(釜山鎭城)이 함락되었다. 첨사(僉使) 정발(鄭撥)도 함께 전사했다. 15일 동래성(東萊城)이 함락되고 다시 다대포성(多大浦城)이 함락되었다.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모두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다. 슬프다. 나라의 관문이 헐리고 근역삼천리(槿域三千里)가 이리떼에 짓밟혀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 백성들은 삶터를 잃고 임금은 몽진(蒙塵)했다. 대신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신하들은 뿔뿔히 흩어져 가니 나라는 불바다가 되었다. 오로지 남은 좌수영마저도 풍전의 등화가 되어 명멸(眀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산의 봉수대(烽燧臺)는 불을 피워 좌수영에 정황을 보고했고 백산의 첨이대(覘夷臺)는 바다의 정보를 좌수영으로 보내고 있었다. |
비석 뒷면 | |
이 때 좌수영 수사(水使) 박홍(朴泓)은 관영(官營)을 이탈하여 도망갔으나 수영강변 토민들은 고향을 지키자는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낫을 들고 호미를 메고 좌수영중으로 모여들어 적들과 상대했다. 장하다. 그들을 일러 우리는 25의용(25義勇)이라 한다. 지금 수영공원 서녘에 단을 모아 모시고 있다. 이 의용제인(義勇諸人)의 행적은 광해군 때 와서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에 의해 <정방록(旌傍錄)>이 만들어지고 순조(純祖) 때 와서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에 의해 후손들을 부역(賦役, 노동적 징용)이 면제되고 비로소 포상되었다. 철종(哲宗) 때 와서는 좌수사(左水使) 장인식(張寅植)이 의용단을 쌓고 매년 6월과 8월 말정일(末丁日, 마지막 정일)을 택하여 향제(享祭)를 올린다. 그러나 그 때 수 많은 백성들은 남녀 노소를 묻지 않고 이 싸움에 참가하여 고장의 명예를 걸고 항전하다가 모두 죽어 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한 사람도 모른다. 모두가 무주(無主)의 망령(妄靈)이 된 것이다. 재산(財產)은 재로 화하고 땅은 황무지로 변해 버렸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적의 나라로 부로(俘虜)가 되어 잡혀가고 남은 재물마저 모두 강탈당했다. 억울하다. 어찌 민족의 후예로서 이 참담(慘憺)했던 정황을 잊을 수 있겠는가. 죽은 시체(屍體)는 수천 수백 수영강은 선혈(鮮血)로 낭자(狼藉)했다. 수영만은 오늘도 말이 없다. 그러나 그 해저 깊은 바닥에는 원한에 사무친 원혼(怨魂)들이 추념 한 번 하지 못하고 우리를 향해 절규하고 있다. 그 누가 이 원혼들을 한 번이라도 달래 주었는가. 역사는 망각(忘却)하는 것인가. 아니다. 역사는 정사(正史)를 요구한다. 이제 우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선조들의 고귀한 발자취를 바르게 찾아 청사(靑史)에 길이 남겨야 한다. 좌수영은 원형을 잃고 성들은 땅에 묻혀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다. 이러한 민족의 성지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문화민족의 수치이다. 이제라도 좌수영이 복원되어 우람하게 우리 앞에 섰을 때 돌아가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길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넋을 바다 밑바닥에서 구원(救援)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해야 한다. 여기에 세운 이 돌이 하나의 생명체로 다시 태어날 때 망령들의 혼백은 재생의 길을 밟아 승천할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모든 정성을 다하여 이 돌을 깎아 이곳에 세운다. 그들을 찬양하여 노래 짓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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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수영 성돌이 청태(靑苔) 끼어 400년 임진 정유 7년 동안 민초(民草)들이 지켜왔네 오늘도 그들의 한이 눈물되어 수영강 |
장산의 봉수대는 이 세월을 헤아리고 백산의 첨이대는 섬나라를 잊지 못해 우리도 신원(伸冤)을 위해 두손모아 천도재(薦度齋) |
1998년 8월 25일 | 글지은이 토향회(土鄕會)회장 문학박사 의성(義城) 김성ㅇ(金成ㅇ) 글쓴이 부산시문화재전문위원 창녕(昌寧) 조영조(曹寧助) |
그 서쪽편엔 백산옥련선원사적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비석 오른쪽면 | 옥련선원사적비 이곳 백산은 하늘의 영기와 민족의 정기가 어린 산이다. 우리나사 상고사 기록을 보면 태초 하늘나라 옥황상제(제석천왕)께서 아들 환웅을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보내 신시를 만들어 삼환태백에 홍익인간정신으로 나라를 세우고 재세이화로 나라를 다스리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며 그의 아들이 단군한배검이시다. 그 후 하늘의 영기가 있는 곳을 흰 백 자를 넣어 산 이름을 부쳤고 민족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산에 천제(天祭)를 올렸다 한다. 백두산, 태백산, 이곳 백산 등이다. 민족이 숭배하던 영산이자 나라의 근산(根山)이다. 일찌기 이 백산에도 신라고승 원효대사가 작은 가람을 짓고 백산사(白山寺)라 칭하며 수도하였다는 전설이 있고, 신라말기 한림학사 고운선생도 이곳에 공부하시다가 동백섬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노라니 마치 하늘의 구름과 땅의 바다가 개합(開合)하는 신묘경(神妙境)을 관(觀)하고 그곳에 나아가 해운대라 이름부치셨으니 과연 이곳이 백산 가운데 하늘의 단기(端氣)가 감도는 백산이요, 나라의 절승(絕勝)지며 또한 한국팔경 중의 한곳이다. 이조(李朝, 이씨 조선)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는 좌수영의 보루(堡壘)로 국난에 힘이 되었고 근세에 들어와 금봉해월선사(錦峰海月禪師) 등 고승들이 토굴정진(土窟精進)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리를 숙세선연(宿世善緣)으로 한 비구니 선사가 개창(開創)의 당간(幢竿)을 세웠으니 그 분이 곧 현진선사(玄真禪師)다. 사(師)의 속명은 박갑술(朴甲戌)이며 현진(玄真)은 법호이다. 사(師)는 적선거사(積善居士)와 평산 중씨(平山中氏)를 부모로 세상에 태어났다. 선사(禪師)가 입태(入胎)할 때 적선거사의 꿈에 태양이 솟아 올라 입속에 들어오는 태몽을 얻고 영천(永川) 땅 보현산(普賢山) 아래 대황리(大皇里)에서 갑술년(1934년)에 출생했다. 11세에 자친(慈親, 어머니)을 여의고 편부슬하(片父膝下)에 자라면서 인생의 무상을 느껴 14세에 입산출가하게 되었다. 떄로는 제방선원(諸方禪院)을 찾고 때로는 토굴에서 용맹정진(勇猛精進)하다가 한 때 광양(光陽) 백운산(白雲山)에서 돈발정진(頓發精進) 중 홀연(忽然)히 한 소식(消息)을 얻고 인연지(因緣地)를 찾아 이곳 백산 옥련암(玉蓮庵)에 오게 된 것 |
비석 뒷면 |
이다. 당시 선사는 34세요, 단기 4300년(서기 1967)이다. 이곳 옥련암에 와서 보니 퇴락(頹落)한 토단(土坍)집 2동(棟)과 몇 평의 토굴에 불과했다. 그러나 보현보살이 1000년의 세월을 지켜온 수승(殊勝)한 보현도장(普賢道場)이자 민족정기마저 어린 곳이라 직관하고 이곳에 일생을 바쳐 대작불사(大作佛事)를 일으킬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세웠다. 불교가 중흥되면 나라도 흥왕(興旺)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약 6년간 대찰(大刹) 건립 1000일 기도(祈禱)를 올리면서 토담집을 헐고 부지(敷地)를 확보한 뒤 대웅전을 먼저 세우게 되었다. 이 금당(金堂)은 목조9간에 외3내4출목다포건물로 목수 이종문(李鍾文) 거사의 설계에 의하여 2년여 공사 끝에 단기 4308년(서기 1975년) 10월 6일에 준공하면서 내부 석가모니본상과 문주보살상을 모시고 첫 불사를 성공리(成功裏)에 이루었다. 여기에 힘을 얻어 25년의 장구한 불사가 계속되었으니 13년도에는 선방(禪房)(심우전(尋牛殿)) 10간과 6각 범종각에 대혜범종(大慧梵鐘)1200관을 주조(鑄造)하였고 삼성각 3간, 수복전(壽福殿)(지하식당) 80평, 요사체(寮舍體) 9간, 보현당(菩賢堂) 8간을 지어 그 해 10월 18일에 범종 타종식과 함께 2차불사를 낙성(落成)하게 되니 불자가 원근에서 구름처럼 모여 성대한 봉축행사를 하게 되었다. 이제 가람의 규모가 대찰로 드러남으로 사명(寺名)을 옥련선원(玉蓮禪院)이라 명명하였으니 옥(玉)은 옥황상제(玉皇上帝)께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하여 구술 옥 자를 따고 연(蓮)은 백산이 연화형(연꽃모양)이라 하여 연꽃 연 자를 땄으며 장차 수도정진도장으로 많은 선사를 배출시키기 위하여 선원이라고 명명하였다. 18년도에는 2세 유아교육을 위하여 옥련유치원을 300평 규모에 2층으로 건립하고 1층은 유아원을 시설하여 5학급의 어린이를 교육하고 2층은 1000여명 신도가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법회회관으로 구조하여 정기법회와 각종 문화행사를 유치(誘致)하게 되었으며 24년도에는 조국통일과 민족정기가 회복되고 광명정대한 용화세계(龍華世界)가 이 땅에 실현되길 발원하면서 석조미륵대불을 석공 박찬태(朴贊泰) 거사에 의하여 3년여 공사 끝에 조성하니 높이가 50척이요 황등 화강석(花崗石)이 1500톤이나 소요되었다. 이 석조좌불상은 웅장한 모습이나 우아한 예술성으로 보아 국내에서 최대최고의 작품을 이루어 놓고 3차불사를 완료하게 되었다. 4반세기동안 옥련선원의 불사를 회향(回向)한 결과 사찰 경내지가 1만여평이요. 전각이 9동이며 현재 보물급문화재(보살상)가 1점이요. 미래문화재가 수점(석조대불, 범종, 불상)이며 불사리탑이 일좌(一座)요 석등이 다수이다. 상주하는 대중이 20여명이요. 산하단체(傘下團體)가 5종이며 신도수는 5만에 이른지라. 이를 종교법인 옥련선원으로 인가받아 한 성역을 갈무리하게 된 것이다. 영산회(靈山會) 상(上)에 수달(須達) 장자(長者)와 같은 보시(布施)자는 없어도 신도회 임원과 화주(化主), 그리고 동참자의 눈물 어린 정성이 수(繡)를 놓았다. 이에 보답이이라도 하듯 사리탑을 모심에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삼과(三顆)이던 것이 오과(五顆)로 불어나는 영험을 보이셨다. 신심과 감응이 이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하니 얼마나 기적같은 감응인가. 이제 백산의 정기가 도솔천에 승화되니 이 땅이 바로 불국토 용화정토 일네. 이에 사적비를 새겨 천추만세에 전하고저한다. |
아 하늘의 영기어린 백산에 불심의 영험함이 꽃피어 진토(塵土)에 옥련으로 수놓으니 향기여 무변계(無邊界)를 덮어라 장산이 시립(侍立)하니 대륙 열리고 일월이 상공(上供)하니 대양 읍(揖)하네 자씨(慈氏, 미륵보살)여 감로묘법 펴소서 단기 4325년 불기 2536년 서력 1992년 3월 일 세움 지산(智山) 짓고 추정(秋頂) 박기열(朴基烈) 쓰다 |
불이문 밖으로 나와 절쪽으로 돌아봤습니다. 이곳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면 볼 수 있는 절의 입구입니다.
절 입구에는 '백산 옥련선원(白山 玉連禪院)'이라 쓰인 비석과 '금일ㅇ 혹은 김일ㅇ(金日ㅇ)'이라 적힌 비석도 볼 수 있구요.
입구에서 더 내려오면 '임선열김보현화공덕비(林禪悅金菩賢華功德碑)'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절이 흥하는데 많은 공덕을 세운 임선열씨와 그 부인 김보현화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임선열 김보현화 공덕비(林禪悅金菩賢華功德碑) |
대저 명찰(名刹)의 창건(創建)에는 필시(必是) 부처님 인연(因緣)이 있고서 천(天)과 인(人)이 합치(合致)하여 대인(大人)의 공덕(功德)으로 성사(成事)되리니 백산(白山) 옥련선원(玉連禪院)의 신도회장(信徒會長) 처사(處士) 임선열(林禪悅)과 대시주(大施主) 겸(兼) 도화주(都化主) 김보현화(金菩賢華)가 실(實)로 기인(其人)이라 이에 늑석(勒石, 돌에 새김)하여 후래(後來)에 소시(昭示)하고자 한다. 처사 임선열의 속적(俗籍)은 전주 임씨 분돌(粉突)이니 고(考, 고 부친)는 석술(碩述)이요 비(妣, 고 모친)는 월성 박씨 영춘(永春)으로 법휘(法諱, 불교의 휘(이름))는 실상화(實常華)다. 실상화(實常華)가 불심이 돈독(敦篤)하여 백산(白山) 옥련암(玉連庵)에 시주(施主)요 화주(化主)로 불과 승을 경공(敬恭)하고 삼귀지심(三歸之心)을 함양(涵養)하며 이류(爾類)를 원득(願得)함에 정신(仃娠)이라 1939년 3월 12일 부산 민락동 사제(私第, 사저)에서 처사를 생하니 품성(稟性)이 순독(淳篤)하고 시혜(施惠)함을 일호(逸好)하더니 부산수산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김보현화(金菩賢華)와 혼인하면서 공히 불가에 심취하여 불조(佛祖)의 신교에 의체(疑滞)함이 없이 평생을 옥련선원 불사에 투신하고 신도회장으로 중인을 신(信)으로 대하고 사물을 성(誠)으로 접(接)하였으니 가위(可謂) 불제자요 은군자(隱君子)라. 김보현화의 속적은 김해 김씨 복연(福連)이니 귀도(歸道)를 봉행하고 모의(母儀)를 신수(愼守)하는 일방(一方, 한 편)으로 박실상화(朴實常華)를 승습(承襲)하여 불사를 추진함에 2011년 12월 6일에 입적(入寂)하기까지 옥련선원의 시주요, 화주로 부운(浮雲)같은 부귀(富貴)보다 검약(儉約)과 청정(淸淨)으로 약을 삼고 순량함은 화기(和氣)의 춘풍이요, 자애함은 사시(四時)로 장춘(長春)이라. 창해(滄海)같은 심(心)이요, 태산같은 정으로 종신(終身)한 고촉불제자(高躅佛弟子)였다. 백산은 아국의 남요(南徼)요, 망양(望洋)의 절승이라. 고래로 소난야(小蘭若, 작은 절)가 있었더니 중엽에 현진스님이 식래(寔來)하여 옥련선원이라 개칭하고 1976년부터 대중창불사를 시작하였는바 처사가 중창도감으로 설계시공과 조경을 담당(擔當)하고 김보현화가 대시주 겸 도화주로 28인화주 협찬(協贊)을 기반으로 대웅전과 종각과 선방과 래원정과 지장전과 일주문과 공양간(供養間), 보현당, 주차장을 차례로 건립하고 부설유치원과 미륵부처님상을 세우는 등 실(實)로 세월은 장구하고 공역은 거대한 장엄불사를 완수하였으니 장재(壯哉)라. 불(佛)의 가호와 임선열(林禪悅) 처사의 열정과 김보현화의 헌신적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대역사(大役事)였다. 단심의 불심은 송죽보다 불변이라 심로(心勞)와 신로(身勞)는 언제나 사찰에 있었구나. 불전공덕이 산해에 전하고 3대에 긍(亘)하니 영세불망이 가당하다. 명(銘)하리라. |
서기2012년 임진 춘 동래향토문화연구소장 신준성(愼俊晟) 찬(撰) 불기2556년 백산 옥련선원 원중(院中) 립(立) |
조금 더 내려오면 절에서 운영하는 '옥련유치원' 입구도 볼 수 있습니다.
'백산 옥련선원'이라 쓰인 거대한 일주문을 보세요. 정말 압도되었습니다. 제가 다녀본 부산 사찰 중에 가장 웅장하고 불교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일주문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주차장이 있습니다. 사장님께서 주차요금은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시간 상관 없이 그 하루 당일 금액만 현금 위주 청구를 하시는데요. 이용료는 5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면에 '나무관세음보살'이라 적힌 절 표지석이 보입니다. 이 옆에는 '옥련선원 단기 4330년(서기 1997년) 4월 29일 건립'이라 쓰여 있어 절의 건립일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절 입구에는 절의 대략적인 지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적비'가 다른 위치로 옮겨진 것처럼 조금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큰 틀에서 이 지도를 보시고 절 답사를 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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