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의 탑골공원의 남문인 삼일문입니다.
이 탑골공원의 서쪽을 지나는 삼일대로의 일부 구간을 3·1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2019년 3월 1일부터 '3·1운동 대표길'이 조성되었습니다.
삼일대로 |
3·1운동은 삼일대로 일대에서 처음 시작하여 팔도로, 해외로 퍼져나갔습니다. 1919년(기미년) 만세운동을 통해 한국인은 새로 태어났습니다. 서울특별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 겨레의 거룩한 용기와 희생, 인류 평화와 독립을 외친 뜻을 기리고 또 현재화하기 위해 삼일대로를 새로 닦고 3천여 시민이 참여한 시민공간을 만들었습니다. |
2019.3.1. |
한 때는 원각사(圓覺寺)가 있던 사적 제354호로 지정된 대한민국 최초의 탑골공원에 대한 안내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탑골공원(Tapgol Park) |
지정번호 : 사적 제354호 시대 : 1890년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1번지 |
탑골공원은 서울에 최초로 만들어진 근대식 공원이다. 만들어진 시기를 두고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졌다. 이 공원은 고종 연간 총세무사로 활약한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 백탁안(柏卓安), 1835~1926)의 건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개장 당시에는 빈 땅에 울타리를 둘러 나무를 심고 의자를 놓은 정도였으나 1910년부터 점차 시설물을 늘려갔으며, 1913년부터는 매일 개방하였다. 탑골공원은 3·1독립운동의 점화지로 잘 알려져 있다. 1919년 3월 1일, 4~5천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이곳에 모여 1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이곳의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여기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79년 3·1독립운동 60주년을 맞아 공원을 정비해 넓혔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에 이름을 탑골공원으로 정했다. 이 일대는 세조 때 세운 원각사 터로서 이곳에는 현재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가 남아 있고, 3·1운동을 기념한 독립운동 부조판과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있다. |
삼일문으로 들어와왼편을 보면 관리사무실과 화장실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오른편으로 가면 3·1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구요.
그 기념탑 옆에는 손병희선생동상도 있습니다.
손병희선생동상 |
여기 서계신 이 어른은 민족의 스승이요,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이시다. 비록 일생을 풍운 속에서 지났으되 산같은 대의는 흔들리지 않았고 큰 뜻으로 역사를 움직여 이름을 천추에 드리운 이다. 선생은 1861년 4월 초8일 청주에서 탄생하여 22세에 동학에 들어 창생을 제도하려는 포부를 기르더니 34세에는 썩은 정치를 맑히려 혁명의 깃발을 들었고, 37세에는 교조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러다 국치의 날을 만나서는 10년 동안 투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더니 1919년 3월 1일 각계대표 33인을 결속하여 국민 전체의 피묻은 만세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역사민족의 의기를 세계만방에 널리 떨치고 그로 인하여 철창의 몸이 되어 신고하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1922년 5월 19일에 62세로써 환원하시었다. 우리는 정성껏 여기 이마 숙여 절하고 노래를 바친다. |
정의의 채찍을 쥐고 가시밭 헤치신 이여 자유의 횃불을 들고 길을 이끄신 이여 겨레의 역사와 함께 길이 사시오리다 |
화장실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걸으면 '탑골공원의 석재유구(Stone relies in Tapgol Park)'가 나옵니다.
탑골공원의 석재유구 |
탑골공원 내에 모아둔 여러 석물들은 이 일대의 도시개발과정에서 출토되었던 부재들이다. 이 중 대리석으로 된 인물상(3점)은 원각사탑의 주위를 호위하던 신장상(神將像)이나 보살상으로 추정되고, 연화문( 蓮花紋, 연화무늬)이 새겨진 난간석(欄干石)은 원각사 탑 외곽을 둘린 부재가 아닌가 여겨진다. "'복청교'(福淸橋)"라고 음각된 교명주(橋名柱)가 보이는데, 복청교는 원래 교보문고 뒷편인 광화문우체국 북측지점에 있었던 혜정교(惠政橋)인데, 탐관오리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던 다리로써 중학천(中學川)이 청계천으로 합류하기 전의 중학천 하류에 걸처져 있었다. 일제강점기하(1926)에 혜정교를 개축하면서, 다리이름을 '복청교'라고 새로이 개명하면서 만든 교명주로 보인다. 나머지의 여러 석재들은 도성 내에 가설되어 있었던 옛 돌다리의 부재(귀틀석 16점, 멍에석 1점, 엄지기둥 1점 등)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이곳에 모아둔 각종 석물들은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형편이나, 전통석조물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공원의 중간 지점인 팔각정쪽으로 가봅니다.
여기서 원각사비로 향합니다.
보물 제3호로 등록된 원각사비입니다.
대원각사비(Monument of Wongaksa Temple) |
지정번호 : 보물 제3호 시대 : 1471년(성종 2)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3번지 |
대원각사비는 1471년(성종2)에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이다.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11) 흥복사(興福寺)터에다 원각사를 지었다. 이어 1467년(세조13)에 13층 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을 만들고 그 등 위에 연잎을 새겨 비석 몸돌을 세울 자리를 만들었다. 몸돌은 머릿돌인 이수(螭首)와 한 돌로 만들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494cm이며, 거북은 화강암으로, 몸돌과 머릿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당대 문장과 글씨로 이름난 사람들이 비문을 맡았다.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앞면의 글을 짓고, 성임(成任, 1421~1484)이 그 글을 썼으며,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뒷면의 글을 짓고, 정난종(鄭蘭宗, 1433~1489)이 그 글을 썼다. 연산군 대 궁궐에 인접한 민가를 철거하면서 원각사는 빈 절이 되었다. 근대에 들어 공원으로 변모한 이곳에는 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이 비석만 남아 원각사의 옛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
원각사비 동쪽에는 발굴출토 우물이 있습니다. 대한제국기에 지어져 일제강점기까지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입니다.
발굴출토 우물 |
2001년 탑골공원 재정비(성역화) 사업으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시행한 시굴조사 때 발견된 우물 가운데 하나이다. 우물은 원통형으로 직경 1.3m이며, 잔존 깊이는 5.2m에 달한다. 내부는 회색을 띤 직사각형 벽돌을 사용하여 면을 고르게 축조하였다. 발견 당시 우물 내부는 바닥까지 모래와 마사토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일시에 폐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에서 일본 동전과 상평통보, 일본산 맥주병 등이 발견되고, 벽돌이란 사용재료, 그리고 축조방법으로 미뤄 조선말기(대한제국기)에 조성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사용된 우물로 판단된다. 시굴조사 전에는 우물 상부에 보호용으로 추측되는 장대석으로 사각형 틀을 짜서 올려뒀었는데 수리하면서 지금 모습처럼 만들었다. 서울 4대문 안에서 민간용 우물이 발견된 사례가 드문 사정에 비출 때 이 우물은 조선후기 한양의 생활사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가 최초로 대중들에게 낭독된 탑골공원 팔각정입니다.
탑골공원 팔각정(Palgakjeong Pavilion of Tapgol Park) |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3호 시대 : 1902년(광무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1번지 탑골공원 |
팔각정은 1902년(광무6)에 탑골공원 안에 지은 팔각형 정자다. 이곳은 1919년 3월 1일에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팔각정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 부분은 물익공을 짠 후 기와지붕을 덮었다. 전통과 근대의 건축 기술을 두루 사용했던 건축가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주도하여 공사를 진행하였다. 탑골공원은 서울에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이 공원이 만들어진 시기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1890년대로 알려졌다. 이 공원은 고종 대 총세무사로 활약한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 백탁안(柏卓安), 1835~1926)이 건의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다가 1991년부터 공식적으로 탑골공원이 되었다. |
동문쪽을 바라봅니다. 동문에서 북쪽으로 쭈욱 만해용운당대선사비, 3·1운동 찬양비, 3·1운동 기념부조, 탑골공원사적비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팔각정 뒤로 1467년 당시 원각사 경내에 세워졌던 원각사지 십층석탑입니다.
원각사지 십층석탑(Ten-story stone pagoda of Wongaksa Temple site) |
지정번호 : 국보 제2호 시대 : 1467년(세조13)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38-2번지 |
이 탑은 세조가 세운 원각사터에 남아 있는 높이 12m의 십층 석탑이다. 원각사는 1465년(세조11)에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흥복사터를 확장하여 세운 사찰인데, 이 탑은 2년 뒤인 1467년(세조13)에 완성했다. 세조는 사리분신(舍利分身)하는 경이로운 일을 겪은 뒤 원각사를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공사 도중에도 사리분신하고 서기가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지금 견해로는 십층석탑이지만 사료에는 13층의 탑[솔도파(率堵婆)]을 세워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을 모셔 두었다고 한다. 亞[아]자 모양의 기단은 세 겹인데, 아래에는 용과 연꽃같은 무늬를 새겼고, 중간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佛法)을 구해 오는 과정을 그려 새겼다. 위에는 부처님의 전생 설화와 일생을 조각하였다. 법회 장면을 새긴 탑의 몸체에는 현판, 용을 휘감은 기둥, 목조구조, 지붕을 두었는데, 마치 하나의 건물 같다. 탑을 만든 재료는 흔치 않은 대리석이며, 독특한 형태와 조각 솜씨는 조선시대 석탑의 백미로 꼽힌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제작한 경천사 십층석탑(국보 제86호)과 여러 면에서 매우 비슷하다. |
이 탑골공원 북쪽에는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거나, 담소를 나누는 노인 모임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엔 무료급식소도 있어 어르신들이 식사 하려고 많이 찾아오고, 어르신들끼리 중고거래도 하고 그런다고 하네요.
오랫동안 불교의 땅이었다가 근대로 넘어오며 공원이 세워졌고, 3.1운동의 발화지기도 했던 이 민족 공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어원과 표로 보는 역사 시리즈 > 어원과 표로 보는 한국사, 한국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양 도성의 남문, 숭례문 (1) | 2024.12.31 |
---|---|
서울의 철도 관문으로 이름 높았던 (구)서울역 (1) | 2024.12.31 |
경사스런 큰 연회를 베풀던 서울 경복궁 경회루 (0) | 2024.12.31 |
1950년대 이승만 정부 시절 지어진 경회루 뒷 경복궁 하향정 (0) | 2024.12.31 |
부산 구도심의 영원한 공원, 용두산공원 (2) | 2024.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