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동의 심능섭 수덕불망비와 구포동 화재 의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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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동의 심능섭 수덕불망비와 구포동 화재 의연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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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성산 앞 육교에 있는 비석 2기

 

 

구포왜성과 구룡사, 수월사, 락천사 등이 있는 의성산으로 가는 육교입니다. 이 아래로 남해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죠.

이곳 오른편에 비석 2기가 보입니다.

행군수 심후능섭 수덕불망비
(行郡守沈侯能燮樹德不忘碑)
구포동 화재 의연 기념비
(龜浦洞火災義捐紀念碑)
행군수심후능섭 수덕불망비심능섭(자(字) 명언(明彦), 1767~?)이 양산군수(1826.07.11.~1827.06.24.)로 재임하면서 주민들에게 군정과 부역을 공정하게 배풀어준 공덕을 기리는 비석으로, 1827년 지역 유림을 대표한 김유의(金有儀) 선생과 오씨 문중의 구포 입향조(入鄕祖)인 오석국(吳錫國) 선생이 앞장서서 박석골의 암반 위에 세웠다.

비신(碑身)은 가로 350cm, 세로 700cm, 두께 135cm이며, 비깃은 없으며, 받침대[壟臺]는 신축하였다.

앞면[表題]은 '行郡守沈侯能燮樹德不忘碑(행군수심후능섭수덕불망비)'와 '軍政旣修(군정을다스리고) 賦役公平(부역을 공정히 하셨네) 朞年遄歸(한 해 만에 갑자기 떠났지만) 百世難忘(오랜 세월 잊혀지지 않으리라)', 뒷면[陰記]은 '道光 七年 丁亥 八月 日 境內立(도광7년(1827년) 8월 일 경내에 세우다) 尊位 幼學 金有儀 知事人 幼學 吳錫國(존위 유학 김유의, 지사인 유학 오석국)'으로 음각되었으며, 2014년에 근대역사관 앞쪽으로 옮겨졌다가, 2021년 이곳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1914년 구포의 옛 장터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점포와 주택 등이 전소되었다. 새로운 시장의 건립과 이재민을 위해 개인 자격으로 구포 사람들과 구포 거류 일본인 및 구포은행, 낙동학교조합 등에서 의연금을 갹출한 명단과 금액이 기록되어 있는 비석이다.

이 비석은 비신(碑身)이 가로 460cm, 세로 970cm, 두께 165cm로 6각형이고, 비깃은 없으며 받침대는 신축하였다. 비신 앞ㅕㄴ에 '허섭 정160원'을 비롯한 26명의 의연명단과 금액이 음각되어 있다.

구장터에서 선창으로 넘어가던 박석골 암반 위에 있었는데, 2014년 근대역사관 앞쪽으로 옮겼다가, 2021년 이곳으로 이전, 설치하였다.

1-1. 행군수 심후능섭 수덕불망비

아래 비석 기단에는 상단의 비석의 내용을 한국어와  함께 적어두어 읽기 편합니다. 조선 말기 양산 군수를 지냈던 심능섭의 군역과 부역을 공평하게 한 선정을 기리기 위해 양산군 사람들이 세웠죠. '왜 갑자기 부산에서 '양산'이 튀어나오는 걸까, 비석을 양산에서 가져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사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북구와 사상구는 양산군 관할이었지 동래군(현 부산광역시)의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비석 앞면 비석 뒷면
 行郡守沈侯能燮樹德不忘碑(행군수심후능섭수덕불망비)

'軍政旣修(
군정을다스리고)
賦役公平(
부역을 공정히 하셨네)
朞年遄歸(
한 해 만에 갑자기 떠났지만)
百世難忘(
오랜 세월 잊혀지지 않으리라)
道光 七年 丁亥 八月 日 境內立
(
도광7년(1827년) 8월 일 경내에 세움)
尊位 幼學 金有儀 知事人 幼學 吳錫國
(존위 유학 김유의, 지사인 유학 오석국)

 

1-2. 구포동 화재 의연 기념비

비석 앞면 비석 뒷면
구포동 화재 의연 기념비(龜浦洞火災義捐紀念碑)

허섭(許攝)160엔, 구포은행(龜浦銀行) 150엔, 김용태(金容台) 300엔, 장우석(張禹錫) 50엔, 윤상은(尹相殷) 40엔, 허봉(許鳳) 40엔, 평전행치랑(平田幸治郞)  30엔, 소궁귀개(小宮龜介) 30엔, 배경화(裵敬和) 30엔, 서납규(徐衲圭)  20엔, 정용직(鄭容直)  20엔, 강신호(姜信鎬)  20엔, 이규직(李圭直)  20엔, 윤상팔(尹相八)  20엔, 김용채(金龍采)  20엔, 김용근(金溶瑾)  20엔, 김두호(金斗昊)  20엔, 목하진차(木下辰次)  20엔, 낙동학교조합(洛東學校組合)  15엔, 김희권(金喜權)  15엔, 김영권(金永權)  13엔, 식전의(植田義)  10엔, 미본의ㅇ인(米本義□人) 10엔, 팔목무일ㅇ(八木茂一□) 10엔

(해당 면에도 기부자와 기부금이 적혀 있음)

정면 기준 비석 왼편 정면 기준 비석 오른편
다이쇼 3년(大正三年) 갑인(甲寅) 3월 16일 회록(回祿)ㅇㅇ  다이쇼 3년(大正三年) 갑인(甲寅) 8월 일 세움

발기인(發起人) 최ㅇㅇ(崔□□) 외 70?(七十□)

1914년(다이쇼 3년) 3월 16일, 구포동 구포장터에 화재가 나 연립했던 상가와 주택들이 모두 타버립니다.

그 모든 것과 장터를 재건하기 위해 당시 구포동에 살던 여러 조선인과 일본인이 돈을 갹출해 새로 지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14년 8월에 이 비석을 지었다고 합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었겠지만, 시장과 동네를 살리기 위해 조선인과 일본인 몇 명이 돈을 모아 재건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어쨌든 요즘 환절긴데 모두 불조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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