Город федерального значения [고러ㅌ 폐데랄노보 즈나쳬니야]는 중요연방시라는 뜻이다. 러시아에는 총 3개의 연방시가 있는데, 각 도시의 어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Москва [마스끄바] : 모스크바
모스크바는 러시아 연방의 수도 역할을 하며, 러시아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모스크바라는 도시명은 먼저 그 도시를 끼고 흐르는 모스크바강에서 나왔다.
그럼 그 강의 어원은 무엇일까?
아직 명확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흔히 알려진 어원 2개를 가져왔다. 이 어원들만 보면 모스크바는 축축한 곳이면서 검은 강이라는 의미이다. 축축하고 검은 강 옆에 지어진 모스크바는 현재 동유럽과 북아시아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거대한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2.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산끄뜨-삐치르부르크] :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역사도시로, 러시아의 제 2의 도시이다. 아무도 지금은 이 곳을 보고 과거 이 땅이 늪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발달했다.
원명은 네덜란드식 표기인 Sankt-Pieter-Burch였고, 후에 독일식인 Sankt-Peterburg로 붙여졌다.
그럼 sankt-pieter(혹은 sankt-peter)가 누굴까?
saint peter 곧 성 베드로
예수의 12제자 중 한명이자, 1대 교황인 베드로(원래 이름은 시몬)이다. 그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표현한 것이 sankt-peter [장크트-피타]이며, 이 단어가 러시아어로 오면서 Санкт-Петербург [상끄뜨-삐치르부르크]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도시명은 '성 페테르의 도시'라는 뜻이다. 어원학상으로도 이게 맞긴 하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에게는 베드로 외에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 베드로였을까? 베드로는 어부였고, 반석이라는 멋진 뜻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물의 도시'이자 200여년간 제국 수도의 땅이였기 때문에(1713~1918) 이 이름이 가장 적합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당시 러시아가 산업혁명이 덜 되었다해도, 이미 그 땅엔 계몽사상과 르네상스(renaissance)의 물결이 흘러들어왔고, 곧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 종교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고 있을 때였다. 또,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한 절대군주제(절대왕정)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 차르국의 차르였던 표트르 1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에 갑자기 지어진 신도시이자 신수도였다. 이는 곧 자신의 이름인 Пётр [뾰뜨르]의 이름을 땄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치학적으로 이 도시의 어원은 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뾰뜨르 1세 알렉세예비치, 1672~1725) 인것이다!
앞에선 saint-peter가 누구였고, 왜 그 이름을 따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다. 이번엔 뒤에 어미로 붙은 бург의 어원을 보자. 매우 간단하다. бург [부르ㅋ]는 독일어에서 도시, 성, 요새화를 뜻하는 Burg[뿌와(ㄹ)ㅋ]에서 왔다. 한글 표기법에서는 부르크 혹은 베르크로 표기한다.
이번엔 이 도시명의 변천사를 알아보자. 산트페테르부르크의 이름은 2번이나 바뀌었다가 원명으로 돌아왔다.
1703년, 루스 차르국의 차르, 뾰뜨르 1세(표트르 1세)의 신도시 계획으로 습지를 매립하여 세운 도시인 상트페테르 부르크.
이후 이 이름이 유지되다가, 1914년 독일이 일으킨 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에 대한 반발심이 생기면서, 독일어인 Sankt(뜻 : 성인)와 Burg(뜻 : 도시, 성)를 빼고, 러시아식으로 '뾰뜨르의 도시'라는 의미로 Петроград(ъ)[뻬뜨로그라드]로 개정했다.
1924년,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870~1924)이 죽자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Ленинград [레닌그라드]라고 명명했고 소련 붕괴(1991년 12월)직전까지 이 이름이 쓰였다.
1991년 9월, 시민투표로 Санкт-Петербург으로 다시 붙여지며 지금까지 쓰이고 있다.
굉장히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의해 도시명이 바뀐 케이스인 만큼 특별히 지명 변천사를 기록한다!
이 도시에는 조금 슬픈 별명이 있다. '뼈위에 지은 도시'인데, 이는 당시 농노들과 노예들을 복역시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이동수단이 없어, 복역자를 데리고 올 때는 걷게 하거나 흙이 부족할 때는 죽은 복역자들의 시체를 물에 던져넣기도 했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시켰다.
이번엔 '성 베드로의 도시'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
1700년에 시작된 대북방전쟁(1700~1721) 중인 1703년, 뾰뜨르 대제는 제국의 수도를 영토의 중심에 위치했던 모스크바에서 전쟁지와 가깝고 사람이 살기 힘든 '네바(핀란드어로 '늪'이라는 뜻) 지역'으로 옮겼다. 당시에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крепость)가 수도 도시 역할을 했었는데, 이 요새는 뾰뜨르 대제가 스웨덴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공고히 지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든 요새였다.
요새가 건설되기 전까지도, 이 지역은 날씨도 험했다. 장대같은비와 몰아치는 질풍,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큰 안개, 거기다 한 해의 절반 이상이 얼음으로 뒤덮혀있던 곳이며, 지금도 연평균 4°를 웃돌고, 한해의 일조량은 약 한 달(31일)정도인 곳이다... 이 음침하고 독기서린 습지에 표트르 대제는 수도를 건설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Российская академия наук)가 세워졌고, 최초의 공공 도서관과 극장, 식물원들이 건설되었으며, 평민 자녀를 위한 최초의 학교 또한 이곳에 세워졌다.
이 도시가 건설되고, 뾰뜨르 대제는 이 곳을 '유럽화'했다. 도시 자체도 유럽을 모방해서 건설했으며, 추운 날씨에 맞지 않게 그리스와 로마를 연상케하는 각종 석조 건물들(성당, 공공건물 등)을 건설했다. 또한 이곳에서 러시아 귀족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유럽식으로 바꿔 행동해야했다! 즉 후진적인 중세 모스크바식 관습을 버리고 진보적이고 계목된 근대 서구세계의 모습을 따라 그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 도시의 건설이후 부터 러시아는 계속 이런 질문을 받는다. '러시아란 무엇인가?' 이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러시아의 예술, 역사, 종교, 정치, 철학을 아우르는 보편적 문제가 되어 지금도 러시아인들의 삶속에 깊게 묻혀있다.
또 이 지역은 유럽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러시아의 작가이자 시인인 푸시킨은 이 도시를 보고 아래와 같이 말했다.
окно в европу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러시아 제국의 문학가, 1799~1837) |
결국 이 도시는 18세기 당시까지 유럽사의 중심에서 비껴있던 러시아를 서구화, 근대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건설된 도시이며, 핀란드 만과 네바 강 늪지대 위에 지어진 거대한 계획도시이면서 15만명 이상의 인명을 희생시키고 탄생한 무덤 위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즉, '근대 러시아 문화의 새로운 방향성을 표상하는 상징적인 곳'인 것이다.
또, 러시아인들에게 모스크바가 '어머니이자 심장'이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차가운 아버지이자 머리'라고 느낀다.
이곳에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겨울궁전와 에르미타쥬 미술관, 성 이삭 성당, 성 카잔 성당, 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리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 여름 궁전 등의 유명한 건축물들이 있다. 하나하나 간단히 살펴보자.
2-1. 청동기마상
청동기마상은 1782년, 남편이자 이전 황제였던 표뜨르 3세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독일 출신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 조각가 파르콘에게 의뢰해 만든 동상이다. 이 동상에는 정변의 당위성을 인정받기 위한 글귀가 적혀 있다.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 MDCCLXXXII (라틴어) - 청동기마상 |
이 기마상의 말의 앞발이 번쩍 들려 있는데, 이는 전유럽에서도 찾기 힘든 형태의 동상이다. 들려있는 앞부분을 지탱하기 위해 뒷 발과 꼬리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어내고 있다!! 또 앞발이 들린 높이는 표뜨르 대제의 권위를 뜻하며, 뒷발에 밟힌 뱀은 악을 뜻하고, 그 밟고 있는 형상은 악을 물리치는 정의를 뜻한다고 한다. 이 기마상의 명칭은 푸시킨의 시에서도 볼 수 있다.
Медный Всадник |
이 동상을 받치고 있는 화강암 대좌는 높이 12m, 둘레 30m에 달하며, 약 66만 kg에 이르는 이 화강암을 옮기는 데만 1000명이상의 인원과 18개월 이상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 동상은 성 이삭 석당에서 네바 강 쪽으로 볼 때 있는 공원을 가로지른 방향에 위치한다.
2-2.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앞서 말했듯,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처음 세워진 전쟁용 요새이따. 18~19세기에 이 도시를 중심으로 수많은 길(대로), 광장, 궁전, 정원, 탑(첨탑), 동상, 운하 등이 계속 건설되어 독특한 문화 공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축과 토목과 관련된 계획의 기본 원리는 '합리성'이 었고, 그로 인해 울퉁불퉁한 땅위에서도 반듯한 형태의 도시가 형성 되었다.
2-3. 에르미타쥬 국립미술관
에르미타쥬 미술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술관으로,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에 꼽힌다.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을 수집하여 겨울 궁전 옆에 작은 궁전을 짓고 그곳에 미술 컬렉션을 보관했기 때문에 '은둔소, 외진 오두막집'을 뜻하는ermitage[에ㄹ미따쥐]에서 따와 Эрмита́ж [에르미따ㅈ(ㅜ)]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예카테리나 2세의 '전용 미술관'이었으나 19세기 말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했다.
이곳은 약 120개의 계단과 1800여개의 출입문으로 이루어진 총 길이 27km로 이루어져 있다. 램브란트의 <탕자의 귀환>과 미술관 신관에 위치한 그 유명한 마티스의 <붉은 방>을 포함하여 70여 만 점에 이르는 소장품이 있는데, 이는 작품 하나를 1분씩 관람한다고 쳐도 총 5년이 걸릴 정도이다!!
<겨울 궁전 연표>
1711, 러시아, 표트르 대제, 현 지역에 겨울 궁전 건설 시작 1730~1740, 러시아, 안나 여제 재위 1741,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 즉위, 겨울 궁전 신축 시작 1741~1762, 러시아, 엘리자베타 여제 재위 1762~1796,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 재위 |
2-4. 성 이삭 성당
1818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40년 뒤인 1858년에 완공된 성 이삭 성당은 현재 러시아의 최대 성당이다. 도시 자체가 늪지대였기 때문에 지반에 길이 6m의 자작나무 말뚝 24000여 개를 박았다. 맨 위 돔에는 100kg이상의 금이 사용되었다. 이곳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경치가 그렇게 예쁘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이삭은 야곱의 아버지면서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조상이 되는 이삭이 아니고, 4세기에 죽음을 맞이한 크리스트교 성인 '달마티아의 이삭'을 말한다.
2-5. 성 카잔 성당
넵스키 대로를 걷다 보면 길 한편에 아치형의 성당이 보인다. 팔을 벌려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승자의 이미지를 가진 이 성당은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가 안드레이 니키포로비치 바로니킨(1759~1814)에 의해 1801년에 짓기 시작해 10년뒤인 1811년에 완공되었다.
완공되고 1년 뒤인 181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시작했는데, 그에 대항하여 싸웠던 러시아 야전 원수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골레니시체프쿠투조프(1745~1813)가 이 성당에 있던 '카잔의 성모'에게 도움을 구하고는 전투에서 프랑스를 대패시켰다고 한다. 그 때 탈취한 프랑스의 군기나 러시아가 만든 승리의 트로피가 이곳에 걸려 있고, 또 이 장군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행해졌다. 종교적 명성 뿐 아니라 러시아군의 영광을 상징하는 장소인 셈이다.
2-6. 그리스도 부활 성당
피의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그리스도 부활 성당은 1883년에 건설되어 1907년에 완성한 성당이다. 지금까지 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18~19세기에 건축된 것들이었는데, 이 그리스도 부활 성당은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이 사라지기 직전에 만들어졌다. 이 성당의 건축 연도는 별명인 피의 성당과도 관련이 있다.
1881년 3월 13일, 당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재위 : 1855~1881.03.13)는 백성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제를 만들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부활 성당이 세워진 곳에서 인민의 의지당(Наро́дная во́ля)원 2명에게 폭탄 테러를 당하여 사망하게 된다.
많은 시민들의 고충을 들어주기 위해 의회를 설치하려 했지만 반대 세력 중 겨우 2명의 공격으로 인해 모든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항상 리더가 개혁을 위해서는 하층의 지지도 받아야 하지만, 개혁에 반대하는 기득권층도 설득해서 같이 이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후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재위 : 1881.03.13~1894)이 곧 아버지를 추도하며 이 성당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성당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하고 중세 러시아식 건축으로 만들었다.
여담으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1894~1917.03.15)가 죽었던 자리에도 '피의 성당'이 세워졌다.
2-7. 여름 궁전(페테르고프 궁)
러시아의 베르사유 궁(The Russian Versailles)이라고도 불리는 이 궁전은 1714년부터 1728년까지 표트르 대제에 의해 건축된 궁전이다. 프랑스의 마를리 궁(Château de Marly)을 모티브로 해서 궁전 주변에 작은 폭포를 만들었고, 17세기 프랑스의 정원 양식을 본따 정원을 설치하는 등 여러모로 프랑스식 건축을 이용해 건설한 궁전이다.
이외에도 수많은 볼거리가 많은 역사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원과 의의, 역사와 건축을 살펴보았다. 제국의 성공을 위해 지었지만, 제국의 패망을 느끼게도 해주었던 곳. 이 큰 늪지대 위의 도시는 러시아의 정체성에 큰 영향과 의문을 던지고 있다.
뜬금없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를 2010년대 방문한 지인에 따르면,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화장실이 깨끗하다고 한다. ㅋㅋㅋ
3. 세바스토폴
역덕, 밀덕이면 한번 쯤 들어봤을 세바스토폴 공방전(Siege of Sevastopol)이 벌어진 세바스토폴은 선박 보수 정비에 특화된 도시이다. 이곳은 2014년에 발생한 크림 위기의 배경이 된 도시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 유럽 정치 및 사회에 관심이 많다면, 이 도시를 꼭 알아두길 바란다.
이 도시를 지배했던 근대 이후의 국가들과 당시 지명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자.(정확한 행정구역명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흔히 불리던 명칭으로 기재 한다.)
1475~1783 |
크림 칸국 |
Акъяр [아크야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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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3~1917 |
러시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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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хтиар [아ㅋ나르] (1783~17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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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евастополь[세바스토폴] (1784~17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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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хтиар [아ㅋ나르] (1797~1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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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евастополь [시바스또빨] (러시아어) [세바스토폴] (우쿠라이나어) (1826~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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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
러시아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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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42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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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4 |
나찌 독일 |
Theoderichshafen [티오도릭ㅎ샤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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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54 |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
Севастополь [시바스또빨] (러시아어) [세바스토폴] (우쿠라이나어) (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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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91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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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2014 |
우크라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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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우크라이나 (법률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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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러시아 연방 (실질적) |
Севасто́поль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왔는데, '유덕한(덕망있는), 위엄있는'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σεβαστός [세바스토스] 와 도시를 뜻하는 πόλις [폴리스]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사실 고대 그리스어로 지어진 이 이름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이름이다!
당시 크림 반도에서는 고대 그리스어 단어로 도시명을 정하던 유행이 있었다. 이 유행을 따라 1784년,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의 명으로 이곳을 '덕망있고 위엄있는 도시'라는 뜻에서 '시바스또빨'이라고 지은 것이다.
자 그러면, 분쟁의 중심이 되는 그 덕망있는 도시의 소련 붕괴 이후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이 지역에는 러시아어 사용자가 훨씬 많았고, 이들중 당시 정부 대표들조차 일시적으로 본국(러시아)로부터 분리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가 이 지역도 우크라이나화(Ukrainisation)를 시도했지만 이런 상황에선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어쩔 수 없이 자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어 1991년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을 재설립을 허락했다.
3-1. 크림 의회의 요청(1993.04.14)
크림 공화국의 대통령직 창설을 러시아 연방에 요구한다 - 1993년 4월 14일, 크림 의회의 상임간부회 |
일주일 후(1999.04.21), 러시아의 발렌틴 아가포노프 부관(Valentin Agafonov)은 러시아가 크림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감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CIS에 공화국을 별도의 독립체로 포함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3-2. 소련 해체 후 러시아 내부적 통보(1993.07.10) 불곰국은 약속을 지킨다???
세바스토폴은 러시아의 연방시로 포함한다 - 1993년 07월 10일, 러시아 연방의회 결의안 |
그런데 당시 이 발표가 나왔을 때, 보리스 옐친과 그의 지도자들은 의회 업무에 참여하지 않았다. 스스로 업무 참여를 중단한 것이다.
3-3. 유엔 안보리의 비난(1993.07.20)
러시아 의회의 세바스토폴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을 비난한다. - 1993년 7월 2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
그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은 '어쩌라고?'였다.
3-4. 무지한 군인의 맹언 (1993.09)
우크라이나가 자신의 함대 일부를 개조해 자신의 인원에 대한 무력공격을 자행했고, 그에 따라 우리는 함대를 경계 태세에 돌입시키는 대응책을 강구할 것! - 에두아르 발틴(Eduard Baltin, 러시아-우크라이나 흑해함대 연합군 사령관) |
그러나 1992년 6월 러시아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구소련 흑해 함대를 러시아 함대와 우크라이나 함대로 분할하기로 이미 합의했었다. 그럼에도 이런 논쟁이 일어난 이유는 에두아르 발틴이 그 사건 이후인 1993년 1월 15일에 보리스 옐친과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에 의해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추가로 1992년 6월의 합의로 인해 옛 소련 흑해함대와 그 시설은 러시아의 흑해함대와 우크라이나 해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나뉘면서 이 곳엔 각각 러시아 흑해함대 사령부 우크라이나 해군본부가 설치되었다. 그들은 공동으로 다리나 바다를 사용했고, 그렇기에 이들은 자주 마주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렇기에 러시아 해군과 우크라이나 해군의 법적 마찰은 계속 되었다.
3-5. 우호조약 체결(1997.05.31)
유엔 헌장의 조항 및 유럽에서의 안전 및 협력에 관한 최종법의 의무에 따라, 고위 계약 당사자들은 서로의 영토 보전을 존중하고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국경의 불가침성을 재확인해야 한다. - 1997년 5월 31일, 러시아-우크라이나 우호조약 2장 |
그런데, 이 조약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 연방 정부의 영토 주장을 배제한 체로 체결된 평화우호조약이라는 것이다. 이는 뻥 뚤린 바다를 러시아 함대가 자유롭게 다녀도 우크라이나가 뭐라고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3-6. 시의회 의장의 말씀(2009.07)
우크라이나는 외국(러시아)의 흑해함대를 유치한 것에 대해 세바스토폴시에 지불하는 배상금을 늘려야 한다고 밝혔다. - 2009년 7월, 발레리 사라토프(세바스토폴 시의회 의장, 지역당 소속) |
러시아의 지역당은 중도, 친러성향의 정당이다. 이곳의 당원이자 당시 세바스토폴 시의회 의장이었던 발레리 사라토프는 러시아군 주둔에 대한 배상금 문제를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 국방부에 그러한 의무를 요청하지 않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요청했다. 일반적인 우크라이나 국민이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은 근 2세기동안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곳이다.
3-7. 하르키우 합의(Kharkiv Pact) (2010.04.27)
러시아의 크림 해군 시설의 임대 기간을 2017년 이후 2042년까지(25년간) 연장한다. - 2010년 4월 27일, 하르키우 합의 |
러시아 두마는 별다른 사건 없이 98%의 다수로 그 조약을 비준했다. 당연히 러시아에게 유리한 합의였던 만큼 대부분이 찬성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의회에서는 찬반이 확실하게 갈렸고, 급기야 난투극까지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의회에서는 52%의 다수결(450표)로 비준되었다.
3-8. 우크라이나-유럽 협력 협정(Ukraine–European Union Association Agreement) 파기 (2013.11.21)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유럽과 의 협력을 거부하면서 러시아에 전면 의지를 선택했다. 이로 인해 거대한 시위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유로마이단!
3-9. 유로마이단 (2013.11.21~2014.02.23)
<유로마이단의 목표> 1. EU 협력 협정 및 자유 무역 협정 서명 2. 대통령 빅토르 야우코부치 하야 및 조기 선거 3. 2004년 우크라이나 헌법 재채택 4. 야우코부치와 아카로브 정부(Azarov government)에 대한 국제 제재 5. EACU(유라시아 관세 연합, 러시아 중심) 거부 |
3-9-1.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 (2014.02.18~02.23) - 시위가 전쟁으로 퍼질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
[시위 구도] [혁명의 목표] 1. 빅토르 야누코비치 탄핵 2. 2004년 우크라이나 헌법으로의 복귀
[혁명의 결과] : 유로마이단과 야당(우익 섹터)의 승리 |
3-10. 2014년 우크라이나 친러시아 분쟁 (크림 반도 : 2014.02.20~2014.03.19) (돈바스 : 2014.04.06~)
우크라이나 혁명(2014)으로 친서방 정권이 수립되자 그에 반대하는 친러파가 시위를 시작했고, 곧 유혈사태까지 일어나고 있다. 결국 이 분쟁으로 크릴이 러시아에 합병되게 된다.
3-11.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2014.02.20~2014.03.26)
3월 18일, 러시아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세르게이 악쇼노프 크림 공화국 총리,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프 크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알렉세이 찰리 세바스토폴 시장이 <러시아와 크림 공화국 합병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크림 반도 내에서 벌어진 친러시아 분쟁이 끝난 3월 19일, 러시아 연방 헌법 재판소는 합병 조약이 합헌이라며 판결을 내렸다. 만장일치로 말이다. 3월 21일 러시아 연방평의회에서도 이 안건을 전원 찬성했으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최종 서명을 마쳤다.
러시아의 크림 합병 이후 국제 사회는 냉담하게 바라보았다. 자치주가 본국 정부의 허락없이 나라를 만들었고, 거기다 다른 나라에 합병까지 해버린 것이다.. 유엔 총회는 러시아의 크림 공화국 합병에 대한 반대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미국, 유럽, 일본은 대러시아 제재를 강화했고, 폴란드는 러시아의 유류 공급 외에 다른 에너지 생산 방향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러시아에 존재하는 총 3개의 연방시에 대해 알아보았다. 각각 수도, 제2의 도시, 국제적 논쟁점이 존재하는 구역이었으며, 국제적으로도 그렇지만 러시아 국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곳들이다.
이 도시들을 만들 때, 지배자의 가혹한 노역, 강압적인 영토 확장의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로인해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은 당시 사람들의 고난과 희생 그리고 지금 세대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재정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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